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소탑(사진 왼쪽)과 탑지. <불사리신앙과 그 장엄> 中
도굴된 탑지 · 소탑 범인 잡히며 회수
출토지 분명한데 國博 보관 ‘안될 말’
불교에서 탑이 처음 등장한 것은 부처님 입멸 후다. 부처님의 열반을 아쉬워한 제자들과 불자들은 탑을 세워 그 안에 사리를 안치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리가 모셔진 탑을 부처님처럼 여김에 따라, 탑과 사리에 대한 신앙은 인도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전해졌으며, 일본으로 건네졌다.
사리신앙과 함께 발달한 것이 바로 사리장엄구다. 소중한 부처님의 사리를 함부로 보관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사리를 담을 용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정이나 유리로 만든 병에 사리를 넣고 내함(內含)에 담았다. 또 외함을 만들어 내함을 넣었고 이를 석함에 다시 봉안한 뒤 탑 안의 사리공에 안치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금이나 은으로 만든 함을 갖가지 문양으로 장엄해, 부처님을 찬탄하는 마음을 담아냈다.
탑은 물론 사리와 사리장엄구가 문화재를 넘어선 신앙의 대상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성스레 탑 안에 사리를 봉안한 사람들의 신심은 사리장엄구와 탑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물 1242호로 지정된 해인사 묘길상탑은 안타깝게도 수십년 전에 사리구를 잃었다.
묘길상탑은 해인사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서 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양으로, 3m 크기의 이 탑은 진성여왕 9년(895)에 조성됐다. 탑의 사리구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1966년 여름 도굴단이 검거되면서다. 당시 탑에 대한 기록이 적힌 탑지(塔誌) 4장과 작은 탑 157기가 회수됐다.
이 때 발견된 탑지는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쓴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진성여왕 8년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서 창궐한 도적떼로부터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추모하며 탑을 조성했다고 한다. 함께 발견된 소탑 157기는 통일신라 때 유행한 조탑경(造塔經)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해 조성된 것이다. 경전에는 77개와 99개의 탑을 안치한다고 기록돼 있으나, 회수된 것은 157기에 그쳐 19개 탑은 분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사리를 봉안했던 사리병이 지난 2007년 해인사성보박물관으로 돌아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 박물관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묘길상탑 주변에서 풀을 베던 홍제암의 종성스님이 사리병을 발견하고 30여 년간 보관해오다가 박물관 재개관을 앞두고 기증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때 도굴범으로부터 회수한 탑지와 소탑 모두가 국가에 귀속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됐다는 점이다. 해인사 묘길상탑이라는 명확한 출토지가 있었고, 도난당한 것이 분명함에도 사찰로 되돌려주지 않은 것은, 불교성보에 대한 문화재 관리 당국의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해인사도 지난 2002년 성보박물관을 완공해 국가지정문화재 5건과 시도지정문화재 4건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사찰 내에서 문화재 보존.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귀속된 묘길상탑 사리장엄구가 원래 자리로 돌아와도 더 이상 보존이나 도난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탑을 떠난 사리장엄구가 돌아올 곳은 오직 한 곳, 원래 봉안돼있던 탑뿐이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14호/ 4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