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⑯ 봉곡사 천년의 숲

 

①봉곡사 천년의 숲은 700m의 짧은 거리지만 깊은 숲속을 거닐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봉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봉수산(鳳首山) 봉곡사(鳳谷寺)는 아름다운 ‘천년의 숲’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9월22일 충남 아산 봉곡사를 향하는 길, 기온은 여전히 한여름 같은 30도에 육박했지만 창 밖에 펼쳐지는 황금벌판과 높은 하늘이 더 이상 여름이 아님을 알려준다.

충남 아산은 온양온천, 도고온천 같이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온양온천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온천이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임금이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에서 전철도 운행을 해서 쉽게 찾아 올수 있다.

아산시도 다른 지역자치단체들과 같이 좋은 둘레길을 조성했다. ‘천년의 숲길’로 명명된 둘레길은 송악면 유곡리와 강장리, 동화리, 궁평리에 걸쳐 26.5km에 달한다. 봉곡사 주차장에 커다란 ‘천년의 숲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봉곡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봉수산, 오형제고개, 누에마을을 지나 궁평저수지를 거쳐 다시 봉곡사로 오는 13km의 ‘천년비손길’이 대표적인 코스이다.

둘레길을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는 곳은 봉곡사 입구에서 봉곡사까지 향하는 700m 소나무 숲길이다.

 

②제6교구 마곡사 말사인 봉곡사 전경

입구에서 숲을 감상하며 봉곡사로 향한다. 약간의 오르막길이 천천히 숲길을 감상하는데 도움을 준다. 산림청에서 주최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한 숲길에는 100년 정도 된 소나무 500여 그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나오면서 숲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비친다. 숲이 다시 활력을 얻자 덩달아 기분이 상쾌해진다.

숲에 있는 큰 나무들에 ‘V’ 형태의 큰 흉터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부족한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려고 주민들을 동원해서 낸 상처라고 한다. 마치 웃는 모습으로 보이는 흉터가 더 안타깝게 다가온다.

홀로 숲을 만끽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질투하는 지 ‘윙 윙’ 하며 말벌이 달려든다. ‘가만히 있으면 되겠지’ 했지만 주변을 떠나지 않더니 두 세 마리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유유히 노닐던 마음이 사라지고 쫓겨나듯 숲길을 빠르게 올랐다.

봉곡사에 닿으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길 한 쪽에 서 있는 작은 공덕비다. 작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3기의 공덕비를 감싸고 있다. 예전보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남에게 베푼다는 선행(善行)도 늘었을까. 불자들 가운데서도 공덕(功德)의 의미를 이해 못하고 종자는 심지 않은 채 공덕의 열매를 바라는 기복(祈福)의 신자들, 관념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나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③일제가 패망 직전 항공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소나무에 송진을 수탈해 갔다. 사진은 일제의 만행에 소나무들이 상처 입은 모습.

공덕비를 지나면 왼쪽 계단 위로 만공탑이 있다. 근세 한국불교의 선을 중흥시키고 민족정신을 지키며 올곧은 수행을 이어온 만공스님이 첫 번째 오도한 곳이 바로 여기다. 스님은 25세이던 1895년 새벽 종송(鐘頌) 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문득 깨닫고 오도송을 읊었다.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빈 산 이치 기운 고금 밖인데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고 가누나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고?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오르네

 

④ 만공탑. 만공스님의 친필로 ‘세계일화(世界一花)’가 새겨져 있다.

 

스님은 이후 스승인 경허스님에게 ‘무(無)’자 화두를 받고 다시 정진한 후 33세가 되던 1902년 전법게를 받는다.

탑에서 내려와 대웅전을 향한다. 봉곡사는 신라 887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1170년 보조국사가 다시 건립을 하고 석암사(石庵寺)라고 칭했다. 봉곡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베틀바위가 있다. 아마 거기서 석암사라는 이름을 딴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여섯 암자를 거느리는 대찰의 면모를 가졌지만 안타깝게 임진왜란 때 페허가 됐다. 1647년 중창을 한 후 1794년 궤한화상이 중수를 하고 ‘봉곡사’로 개칭했다.

 

⑤봉곡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송곡면 평촌리에 보물 제536호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다. 5.3m의 거대한 부처님은 두 손에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원해 주기 위한 약 그릇을 감싸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대웅전과 창고로 쓰이던 고방 건물이 충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페허가 된 대웅전은 인조 24년에 고쳤는데 나무는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지어져 있다. 참배 후 대웅전을 나오니 노부부가 손자의 재롱에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맑은 바람이 대웅전 뒤 대나무 숲을 스친다. 흰 구름이 높아진 하늘을 떠돈다.

천년의 숲을 지나온 봉곡사의 어느 가을 오후 풍경이다.

[불교신문3236호/2016년10월1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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