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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머문 그 곳] <18> 설악 대청봉

 

중청에서 소청대피소로 향하는 길. 설악산의 절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성철스님이 만일 이곳에 올라왔더라면 향곡스님과의 다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1708m에 대청봉이 있다. 가파른 계단 끝을 올라 배낭을 던지고 바위 위에 쓰러진다. 금세 해가 질 듯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다 왔겠지 생각하며 휴대전화 GPS를 보니 아직 해발고도가 1300m. ‘아직 400m…. 휴대전화 GPS가 틀리겠지…’ 지난 10월27일 오후1시 국립공원 오색약수 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오전에 비가 왔는데 날씨 좋아졌네요. 운이 좋으시네. 천천히 가셔도 4시간이면 정상에 도착할 거예요.”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즐거운 기분으로 단풍을 감상하며 오르기 시작했다. 마실 나오듯 가벼운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가파른 고갯길이 나온다. 계속 고갯길이다. 고개가 끝났나 하면 다시 고갯길이다. 고개 들어 오르막을 확인할 용기가 없어 바닥만 보며 한 발 한 발 보면 걷는다. 

“계속 이렇게 오르막이예요?” 지칠만큼 지쳐서 하산객에게 물어보니 “이제까지 온 길은 쉬운 길이고요, 좀 더 가시면 얼굴이 경사에 닿을 정도로 올라가셔야 할 겁니다.” 설마 했던 등산객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 가파른 고개가 시작됐다. 무거운 배낭이 원망스럽다.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에 지혜를 보지 못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와닿는다. ‘얼마나 먹겠다고 음식을 이렇게 많이….’ 

 

어리석음을 참회하며 관세음보살님을 외치며 한 발 한 발 오른다. “관세음보살, 헉, 헉, 관세음보살.” 점점 조급함도 사라지고 속도는 느리지만 꾸준히 정상을 향해 오른다. 이미 어두워진 산, 작은 랜턴에 의지해 하염없이 걷는다. 호흡소리와 관세음보살 소리만 들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대청봉이 나타났다. “이야~” 힘없이 고함을 한번 지른다. 

봉우리가 푸르러 청봉(靑峰)이라 불리던 대청봉. 이후 다른 봉우리들에게도 이름을 붙이다 보니 가장 높은 봉우리가 대청봉이 되고 그보다 작은 봉우리들이 중청(中靑), 소청(小靑)으로 이름지어졌다. 하지만 이미 어둠이 가득한 대청봉을 즐길 여유는 없다. 중청대피소에서 알려준 입실 시간인 6시가 지난지 오래. 대청봉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500m. 대청봉에서 바라보니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녹초가 된 몸을 끌고 대피소로 향한다. 

“지금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입구를 찾고 있는데 대피소 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자리를 배정받고 배낭을 내려놓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잠시 휴식 후 원망했던 무거운 음식들을 즐거운 기분으로 꺼내는 나를 보게 된다. 거하게 한 상 차려 저녁을 먹는다. 따뜻한 국물에 밥 한 술 입에 털어 넣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행복하다.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조금 전 죽을 것만 같던 등산길도 지나간 추억으로 남는다. 약간의 육체적 고통과 즐거움으로 일희일비하는 모습에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중청대피소에 머문 사람들 거의 다 대청에서 일출을 맞이하러 간다. 6시40분 쯤 일출예보를 듣고 30분 전에 대청봉을 향한다. 대피소부터 대청봉까지 랜턴 불빛이 긴 줄로 이어진다. 

조금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앗 눈이다!” 누군가 외친다. 조금씩 날리던 눈이 거세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날 내린 눈은 대청봉에 내린 올 겨울 첫 눈으로 기록됐다. 첫눈을 맞긴 했지만 흐린 날씨 때문에 기대했던 일출을 볼 수는 없었다. 다시 중청으로 내려가 준비를 마치고 봉정암으로 향한다. 중청으로 향할 때 잔뜩 찌푸렸던 날이 풀리고 파란 하늘이 열렸다. 뿌옇던 대기도 일순간 맑아졌다. 공룡능선, 천불동 계곡 멀리 울산바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암봉들은 햇살을 반사시키며 빛나고 있다. 

설악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산 중 하나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2014년 36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설악산을 찾았다고 한다. 한계령, 마등령, 미시령 등 수많은 고개 뿐 아니라 아름다운 계곡들이 어우러져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국립공원(1970년 지정) 및 유네스코의 생물권 보존지역으로 지정(1982년)돼 관리되고 있다. 

 

둘도 없는 동갑내기 도반이며 한국불교 선지식인 성철스님과 향곡스님의 재미난 일화가 있다. 

향곡스님이 “니 설악산 공룡능선 가봤나? 산은 뭐니 뭐니 해도 설악산 공룡능선이 최고다” 하면, 성철스님은 “니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도 못 들어봤노? 금강산이 최고다”고 티격태격하곤 했다고 한다. 사실 성철스님은 설악산을, 향곡스님은 금강산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천진난만하게 자기가 가본 산이 최고라고 주장하며 다투는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중청에서 소청대피소까지 설악산의 최고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소청대피소에서 봉정암으로 내려가다 보니 멀리 봉정암 오층석탑이 보인다. 거대한 설악산 암반을 기단삼아 솟아오른 석탑은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뇌사리보탑(佛腦舍利寶塔)이다.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은 사리를 모시고 온 자장율사가 길지를 찾아 순례를 다니던 중 아름다운 빛을 내는 봉황을 만난다. 자장율사가 며칠을 쫓아가니 부처님 머리 모습을 한 바위에서 봉황이 사라졌다. 스님은 주변을 살펴보니 길지임을 알고 이 곳에 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날카로운 이빨같은 용아장성의 기암괴석군 속에 있는 봉정암은 5대 적멸보궁이다. 해발 1244m에 위치한 봉정암엔 젊은이들도 올라오기가 쉽지 않은데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봉정암에 법당이 새로 낙성했다. 법당엔 부처님이 없고 대형 유리를 통해 사리탑이 바로 보인다. 법당에서 참배를 한 후 사리탑으로 오른다. 

옛 스님들은 이 산을 설산(雪山)이라 불렀다. 부처님은 출가 후 여러 스승을 만났지만 원하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설산을 들어가 6년간 고행을 한다. 사리탑에서 보이는 용아장성의 봉우리들은 부처님 고행상 같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리탑에서 참배를 하고 잠시 앉았다. 조급하고 흥분했던 마음이 차분해 진다. 땀이 식어 추위가 찾아올 무렵 일어나 산을 내려간다. 어제와는 다르게 평안한 마음으로 설산을 내려간다. 

 

[불교신문3248호/2016년11월12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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