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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가야산 백제의 미소길

국 뱃길과 이어진

가야산 ‘백제 미소길’

 

100 사찰 있던

불국토 가야산

 

세월의 무게에

거의 사라져

 

언젠가 크고 환한

법등이 다시 밝히리

①국보 84호 서산 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 먼 곳에 계실 것 같은 부처님이 아니라 친근한 이웃 같은 부처님의 모습이다. 부처님의 미소를 보면 누구든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서산 예산을 아우르는 가야산 깊은 산속에 천오백년 긴 세월 동안 세상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소박하고 자비로운 미소가 있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국보 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지난 8월29일 오후 늦게 찾았다. 이미 해가 많이 기울어 마애여래삼존상을 친견하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마지막 여름의 강한 햇살이 삼존불 뒤쪽에서 비치고 있다.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를 만난다. 인사를 올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방문객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전에 더 컸던 거 같은데….” “맞아 그랬는데….”삼존불을 찾은 사람들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한다. 1959년에 발견된 마애여래삼존상에는 1965년 보호각이 설치되었다. 어두웠던 보호각 안에 들어가서 관리인이 비춰주는 전등불을 아래서 삼존불을 보았을 때를 기억해보니 ‘지금보다 크게 느껴졌을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든다. 습기 등 문제를 일으켰던 보호각은 지난 2008년 완전히 철거되어 이젠 자연광 아래 다양하게 미소 짓는 부처님을 볼 수가 있다.

 

햇살이 많이 넘어가니 편안하게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소박하긴 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마애불. 불심이 깊었던 백제인들은 딱딱한 화강암 바위 속에서 부처님 모습을 찾아냈다. 그리고 바위 속 부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조금씩 바위를 깎아 내려갔을 것이다.

부처님 모습이 드러나자 상호는 인도인 모습이 아닌 백제인의 환한 미소를 새겼다. 백제시대 서산 태안 지역은 중국과 뱃길로 왕래를 하던 곳이다.

‘잘 돌아왔어’ ‘조심히 다녀와’ 속삭이듯 환하게 웃는 부처님은 늘 이 자리에서 편안한 미소로 그들은 배웅하거나 맞이했다. 불상은 10도 정도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시선까지 생각해서 조성되었다. 가운데 넉넉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석가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왼쪽 보살입상과 오른쪽 반가사유상 또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또한 석가여래입상은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 손동작으로 힘든 중생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강댕이 미륵불이 있는 용현계곡 입구부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친견하고 가야산을 넘어 예산으로 향하는 길이 ‘백제의 미소길’ 이다. 이 길은 내포문화숲길 중 원효깨달음의 길 그리고 아라메길 같은 둘레길과도 어느 정도 코스를 같이 한다.

다음 날, 중국으로부터 긴 뱃길에서 무사히 돌아온 백제인을 상상하며 ‘백제의 미소길’을 걸었다. 가야산에는 100여 곳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니 중국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부여로 향하는 신심이 돈독했던 백제인들은 불국토로 돌아온 느낌을 받았으리라. 가야산 사찰 중 가장 큰 곳은 마애여래삼존상과는 불과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보원사였을 것이다. 계곡을 따라가던 좁은 길이 시원하게 열리면서 거대한 절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야산(상왕산) 자락에 있는 10만㎡ 규모의 보원사는 신라시대 화엄십찰 중 하나였다.

 

먼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보물 제103호 당간지주를 비롯 현존하는 가장 큰 보물 제102호 보원사지 석조, 보물 제104호 오층석탑, 보물 제105호, 106호 고려 초 법인국사의 승탑과 비 등이 사지에 남아 있다. 또한 지금 이 곳에 있지는 않지만 1968년 발견된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을 비롯 고려철불좌상, 철조여래좌상 등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성보들이 과거 보원사가 얼마나 큰 가람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2006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면서 ‘보원사’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수 천 개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하지만 백제시대부터 조선까지 법등을 이어오던 보원사가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진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발굴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04년부터 내포 가야산 지역에 보원사 복원을 필두로 성역화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보원사지 바로 옆에 수덕사의 말사인 보원사가 2004년 세워져 조선시대 폐사된 보원사 복원불사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백제 미소의 길은 용현자연휴양림을 지나서 가야산으로 향한다. 파란 하늘이 나왔다가 어느새 구름이 짙게 드리우기를 반복한다. 홀로 걷는 숲길에 후두둑 토토리가 떨어져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퉁퉁고개를 넘으면 예산 땅이다.

예산 쪽 가야산 자락에는 ‘미소의 길’을 계속 미소 지으며 걸을 수 없는 아픈 역사가 있다. 백제시대 창건하여 가야산의 중심도량이었던 가야사가 있던 자리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원군의 묘가 있다.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에 묘(墓) 이장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1822년 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 어느 날, 한 지관이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다고 했다. 이하응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을 택했다.

이하응은 가야사 석탑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세웠다. 천년 넘게 법등을 면면히 이어오던 가야사는 이하응의 야망에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만다.

가야사지에 세워진 남원군 묘 동북쪽 150m 떨어진 곳엔 상가리 미륵불이 있다. 북쪽 방향을 보고 있는 데 가야사 쪽을 보고 계시다가 불 탈 때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00곳의 사찰이 있던 불국토 가야산에는 세월에 무게에 무너져 오래된 유적들만 남아 있지만 다시 빛나는 법등을 밝힐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⑤내포문화숲길-원효깨달음의 길 안내판.

[불교신문3232호/2016년9월10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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