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근래에 중도보수라거나 중도개혁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런 경우의 중도가 부처님 가르침의 중도(中道)와 같은 뜻입니까?
타협점 찾으려는 정치적 용어와 달라
부처님 중도는 필요 불급한 삶의 방식
답 : 질문에서 예를 든 중도보수는 개혁적 성향을 가진 보수라고 해석할 수 있고, 중도개혁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는 보수적인 것을 수용하는 개혁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현은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은 타협점을 찾으려는 정치적인 용어이지 결코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중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의 중도는 타협점을 찾기 위한 배려나 단순한 배분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당시 세상에 중심적인 사상의 흐름을 직접 체험해 보신 분입니다. 즉 태자로서의 삶은 당시의 쾌락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매순간마다 인생을 즐기는 것이 최고의 삶이 된다는 방식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적인 삶의 방식이 싯다르타태자를 행복하게 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가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체험하신 것은 요가선정주의적인 삶이었습니다. 출가 직후 만난 이는 요가선정주의의 대가인 알라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였는데, 이들에게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명상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지만, 생각이 지극히 고요해지는 이 경지로도 깨달음의 평화는 불가능했습니다.
더 이상 스승이 없음을 안 태자는 고행의 길을 선택하여 6년 동안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극단적인 고행을 했지만 결국 깨달음의 평화는 이룰 수 없었습니다.
독자적 방식으로 보리수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부처님은 설법을 통해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하시는데, 그것이 어떤 극단적인 방법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법입니다. 그렇다고 여러 수행법을 적당히 섞는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중도(中道)는 불교교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만큼 대단히 복잡한 내용으로 전개되지만,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치우침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중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연기법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는 한 순간도 고정된 모습이 있을 수 없으며, 언제나 상관관계에 의해서 생성되고 유지되며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이고 영원한 선(善)도 악(惡)도 있을 수 없으며, 늘 깨어있음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는 ‘둘 아님(不二)의 경지’라고도 합니다.
중도가 수행법으로 제시된 것이 팔정도인데, 정확하게는 팔정중도(八正中道)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삶에서 연기의 이치를 환하게 알아서 견해.사유.언어.행동.생활.노력 .기억.정신통일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왜곡됨이 없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우리를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합니다.
부처님의 중도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필요하고 알맞은 삶의 방식입니다. 중도는 갖가지 분별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적 손익 계산도 하지 않는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섞는 것을 두고 중도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은 어떤 단체의 이익을 취하는 입장에 있으면서 입으로만 중도를 외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송강스님 /개화사 주지
[불교신문 2406호/ 3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