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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진관사와 고려현종왕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354번지에 위치한 삼각산 진관사는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다. 진관사는 신라시대 고찰이라는 설과 조선 후기의 성능(聖能)스님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하나 고려 제8대 현종왕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진관스님을 위해 신혈사를 중창해 진관사라고 불렀다는 설화가 정설로 전한다. 고려시대의 살기 넘치는 왕권다툼을 뚫고 보위에 오른 8대 임금 현종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부처님 가피로 암살음모 극복한 사연 ‘오롯’

간교한 헌애왕후 피습 피해 신혈사 은둔

진관스님 보호로 목숨 구하고 보위 올라

스님들 은혜 감사 뜻으로 사찰 중창해

<사진설명>고려 8대 임금인 현종왕이 왕실의 다툼의 피해 은신한 뒤 왕위에 올라 자신을 도와준 진관스님을 위해 창건해 이름지은 진관사 모습.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고려 5대왕 경종의 대를 이어 성종이 보위에 오른다. 성종은 경종의 이복동생. 30대에 일찍이 임금이 승하하자 경종의 부인들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이들은 자매지간이기도 했지만 외로움의 차이는 있었다. 첫째왕비인 헌애왕후에게는 왕송(王訟)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장차 목종이 될 인물이었다.

동생인 헌정왕후는 뛰어난 미모로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해 왔지만 슬하에는 자식이 없어 더욱 쓸쓸한 처지가 됐다. 그녀는 불교에 일찍 귀의해 개경의 10대 사찰 중의 하나였던 왕륜사를 별궁으로 삼아 관음기도를 올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도 자식이 한명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망념이란 말인가.”

며칠 뒤 헌정왕후는 꿈을 꾸었다. “어머, 내가 왜 이래. 내 오줌이 개경을 뒤덮고 있어.” 헌정왕후는 송악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는 꿈이었는데 시내가 홍수로 떠 내려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화관을 쓴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헌정왕후에게 맑은 구슬을 건내주었다. 왕후는 그 맑은 구슬을 품에 꼭 안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참으로 기이하다. 필시 내가 꾼 꿈은 범상하지가 않아.”

자신이 꾼 꿈이 신이(神異)하다고 생각한 헌정왕후는 점술가를 불러 꿈 해몽을 시켜보았다. 그러자 점술가는 왕후에게 9번이나 절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대단한 길몽입니다. 마마께서 만약 옥동자를 생산하시게 되면 장차 나라를 통치할 성군이 될 것입니다.”

혼자가 된 헌정왕후를 연민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주인공은 지아비였던 성종의 숙부인 안종(王郁)이었다. 당시는 왕실 내부의 결혼이 허용되는 시대라 이복형제들이나 삼촌지간에도 정을 통하는 일이 많았다.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당시에는 이런일이 종종 일어났다.

시숙부 안종은 사찰에서 홀로 지내는 헌정왕후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자주 찾게 되었고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어 자식을 가지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헌정왕후는 안종을 찾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제가 저지른 일이기에 멀리 섬으로 도망가 아이를 낳겠습니다. 이 아이를 가질 때 꾼 태몽으로 보아 세상에 태어나면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점술가가 말해 주었습니다. 부디 경솔하게 행동한다고 저를 책망하지 마십시오.”

안종은 헌정왕후를 보듬으며 말했다. “내 비록 부인을 호강시켜 주지는 못할지도 모르나 뜻을 같이 하겠소. 함께 떠납시다.” 하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이들의 처지는 순탄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임금 성종(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의 친오빠)은 숙부인 안종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낸다. 선대 임금의 부인이자 자신의 여동생과 불륜을 저지른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헌정왕후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몸져 누운 그날 밤 헌정왕후는 산기(産氣)를 느끼기 시작했고, 옥동자를 분만했다. 하니 그가 바로 대량원군 왕순(王詢)이며 후일 현종이다. 헌정왕후는 왕순을 낳고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헌애왕후의 아들 송(訟)이 18세 되던 해에 성종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송이 성종의 대를 이어 고려 7대 임금이 되었으니 그가 목종이다. 목종이 즉위하자 헌애왕후는 천추전에 거처하며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했다. 왕후의 이름도 그녀가 거처하는 전각의 이름을 붙여 ‘천추태후’라 불렀다. “이제는 내 세상이야. 모든 것이 내 손에 있어.”

성품이 포악하고 음탕하였던 천추태후는 섭정을 하면서도 동생 헌정왕후를 시기 질투했다. “내 사랑을 빼앗아간 너는 내 동생이지만 용서할 수 없다.” 헌애왕후는 당시 간교하기로 소문이 나 있던 외사촌 사이인 김치양과 정을 통하기도 했다.

김치양은 태후와 놀아나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도록 권세를 누렸고 호화로움에 부정까지 저질렀다. 목종은 김치양을 내쫓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돼 실행치 못했다. 태후는 거리낌없이 김치양의 아이를 낳고 목종에 이은 보위를 넘기려 음모를 꾸몄다. 이 모습을 본 목종조차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태후는 김치양과 모의하여 헌정왕후가 낳은 대량원군 왕순(王詢)을 궁중에서 내쫓기로 계략을 꾸몄다. 12살의 어린나이였지만 왕순은 백모인 헌애태후가 시기하는 눈치를 채고 궁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개경 남쪽에 있는 사찰 숭경사(崇敬寺)로 몸을 숨기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부처님 제자가 된 대량원군은 총기가 남달라 10년 공부를 3년에 끝마치는 등 성군의 자질을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헌애태후는 대량원군을 없애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반드시 대량원군을 없애버려야 한다. 대가는 넉넉히 주겠다.”

숭경사 스님들은 자객의 사찰침입을 눈치 채고 대량원군은 한양의 삼각산의 조그만 암자인 신혈사로 보냈다. 신혈사(神穴寺)에는 진관스님이라는 노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대량원군이 읊는 시 한 수를 듣고 장차 고려의 왕이 될 그릇임을 알아챘다.

“현재는 출가수행자의 몸을 하고 계시지만 장차 이 나라를 이끌 성군이 되실 분이니 소승이 잘 모시겠습니다.”

대량원군의 행방을 뒤쫓던 천추태후는 마침내 삼각산에 있는 조그만 암자인 신혈사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스님의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스님은 언제나 사람을 일주문 근처에 배치해 수상한 사람이 오면 피신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부처님을 모셔놓은 불단 아래 땅굴을 파서 그곳에 기거하도록 하기도 했다.

대량원군이 피신해 있는 동안 나라는 혼탁해질대로 혼탁해졌다. 목종은 심장병에 걸렸고, 이 틈을 타서 김치양은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대량원군을 암살하려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눈치챈 목종은 최항 채충순 등의 신하에게 대량원군을 자신의 후대 임금으로 옹립할 것을 지시했다.

“이 나라의 왕이 될 자격은 태조의 손 (孫)으로서 유일하게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대량원군이니 경들은 사악한 자들의 역적모의를 차단하고 단죄하라.”

<사진설명>진관사 일주문 현판.

목종은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인 강조(康兆)에게 입궐을 명해 자신의 후계자로 대량원군을 옹립했다. 1009년 목종이 승하하자 고려 9대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였다. 대량원군은 신혈사를 떠나며 진관스님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 대사의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보위에 오른 현종은 신혈사를 중창해 목숨을 구해 준 진관스님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불렀으며 마을이름도 진관동으로 명명했다. 100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진관사에는 1960년대부터 진관사를 크게 세운 노 비구니 스님인 진관스님이 주석하며 사찰을 지키고 있다.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찾아가는 길 /

지하철 3호선 구파발 역에서 진관사로 향하는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40분 간격인데 지하철에 내려 북한산 방편 버스정류소를 찾으면 된다. 편하게 가려면 연신내역이나 구파발 역에서 진관동으로 향하는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참고자료: <길따라 절따라> (김승호), 진관사 홈페이지, <전통사찰의 창건설화>(서문성)

[불교신문 2404호/ 2월27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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