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닦고 선로 놓아 기어이 ‘반출’28. 월광사원랑선사탑비 |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가 원래 세워진 곳은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던 월광사(月光寺)터이다. 월악산 송계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원랑선사탑비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 절터는 계곡을 건너서 한 참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890년 세워진 통일신라 전형적 탑비 일제 때 옮겨…옛 자리 풀숲만 무성 사찰이 언제 창건돼 폐사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원랑선사(816∼883)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에 따르면, 헌덕왕 8년에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 한번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아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소의 내용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다 불교경전을 읽은 뒤에는 상투를 풀어 머리를 자르고, 승복을 걸쳤는데, 그 때가 문성왕 7년(845)이다. 성린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단엄사에서 지낸 스님은 훗날 구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화상 무염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했다. 또 문성왕 18년(856)에 당나라로가 11년간 여러 사찰을 둘러보고 경문왕 6년(866)에 귀국했다.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어느 날 꿈을 꿨는데, 월악의 신관(神官)이 나타나 월악산으로 오길 청했다. 또 다음날 새벽에는 자인선사로부터 월광사에 주석하라는 내용의 글까지 받아 그길로 사찰로 갔다. 깊은 산 속에 있었지만 스님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왕실에까지 전해졌다. 경문왕은 금조(金詔)를 내려 칭찬하고 월광선사가 계속해 주지를 맡도록 했다고 한다. <사진>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돼 있는 보물 360호 월광사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 당나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랑선사가 월광사에 주석한 것으로 미뤄보아, 사찰은 경문왕 6년 이전에 창건됐음을 알 수 있다. 절에 시주하는 사람[檀越]들이 먼 지역에서부터 찾아왔고, 절에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없었다는 비문으로 사세가 제법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은 헌강왕 9년(883) 이곳에서 입적했는데, 원랑선사라는 시호와 대보광선이라는 탑호가 내려졌다. 탑비는 스님이 입적한 6년 뒤인 진성여왕 4년(890)에 세워졌다. 왕 명을 받은 금성군(전남 나주)태수인 김영(金穎)이 글을 짓고, 오등산 보리담사의 순몽(淳夢)스님이 글을 썼으며, 문하의 진윤(眞胤)스님 등이 글자를 새겼다. 탑비의 전체 높이는 3.95m이며 비 몸돌의 높이는 2.26m, 폭은 0.97m이다. 상단부는 특히 마모가 심하고, 전체적으로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와 머리 부분인 이수의 조각이 특히 정교한데,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탑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승탑의 기록은 없다. 1915년대 진행된 조사에서도 승탑은 없었고, 일부 석재만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다. <석조문화재 그 수난의 역사>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이 승탑 반출을 위해 길을 닦아 환목을 정자형으로 깔고 그 위에 선로를 놓아 선반차로 옮기는데 10여 일이 소요됐다고 한다. 이때 승탑은 일본으로 반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남아 있던 탑비는 1922년 3월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돼 있다. 풀숲만 무성한 숲속에 있는 지대석과 연화석만이 옛 절터의 흔적을 보여준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55호/ 9월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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