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백호 여인 |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천송리 282번지 봉미산에 위치한 신륵사(神勒寺). 오대산에서 흐르는 백두대간의 줄기의 봉황꼬리가 여주 땅에 이르는 명당에 자리해 예로부터 수 많은 선지식들이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제도한 역사가 있다. 특히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스님이 영원사로 가는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해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이 사찰은 지역민들로부터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남한강변에 위치한 다층전탑(多層塼塔)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나한으로 화현한 어머니, 아들을 보호하다
효심 깊던 청년, 백호봉변 피하고 강 건너 부처님 가피 입고 ‘장원급제’…사찰 중창
신륵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처음 창건역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효대사는 꿈을 꾸었는데 흰옷을 입은 노파가 신륵사 절터가 들어선 연못을 알려주며 사라졌다. 원효대사는 이곳에 사찰을 지으려 하였으나 난관에 부닥쳐 7일기도를 하니 9마리 용이 승천했다. 그 후에야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고종 때의 창건 역사도 있다. 신륵사가 위치한 지형은 봉황의 꼬리에 위치하지만 바로 앞에 남한강의 굽이치는 용의 기운이 물결치는 곳이어서 그 기운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인당대사가 부처님의 힘(神佛)을 빌려 용마의 고삐에 굴레를 씌우고(勒) 절 이름을 ‘신륵사’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남한강이 범람하여 주민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 없어지고 문전마다 옥답으로 변해 살기 좋은 고장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창건역사는 고려우왕때 여주의 마암(馬岩)에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스님이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와 용마를 다스렸다고 해서 ‘신륵사’라 불렀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원찰이기도 한 신륵사는 조선시대에 대대적인 중창을 해 조선 예종 원년(1469) 정희왕후가 중창해 보은사(報恩寺)로 바꾼다. 다시 성종 때 중창의 계기가 마련되는데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당시 봉미산 기슭에 살았던 한 청년이 괴나리 봇짐을 지고 한양길에 오르고 있었다. 이 청년의 모습은 초라했지만 몰락한 양반가 종손이자 외아들로 가문을 다시 세워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해. 상당했던 전답은 아버지의 병수발에 대부분 팔아치워야 했고, 땅 몇뙤기 남아 있던 것마저 어머니의 병고에 모두 팔아버렸어. 하지만 나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반듯하게 세울거야.” 굳게 다짐에 다짐을 거듭한 청년은 주경야독을 하며 과거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 일을 어찌하라. 병약한 어머니마저 이제는 병석에 눕고 말았으니 과거일이 다가오는 이 청년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과거일이 보름 앞으로 다가오던 날 저녁 어머니가 조용히 아들을 불렀다. “이번 과거에 반드시 나가야 한다. 내 몸이 성치 않지만 너는 지금까지 열심히 과거를 준비하지 않았느냐.” 어머니의 신신당부에 청년은 도저히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반드시 금의환향할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꿈에서 청년은 보은사의 동승(童僧)이 되어 강나루를 건너고 있었다. 동승인 자신은 어찌해서 배로 강을 건너는 게 아닌가. 사공은 이런 동승이 호락호락해 보였는지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다. “꼬맹이 스님이 어딜 가시나?” “나는 건너편 보은사에 사는 사미승이요. 우리절 큰스님께서 모은 시줏돈으로 절을 중창하기 위해 대장건에 돈을 건네주러 가는 길이니 어서 날 태워주시오.” 당당한 사미승의 말에 사공은 태도를 바꾸어 뱃머리를 대고 정중하게 태웠다. 배가 강 중간을 건너고 있는데 난데 없이 뒤에서 간드러지는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 “날 좀 태워 가세요. 날 좀 태워 주세요.” 하도 애원하는 말투라 사미승은 뱃사공에게 말했다. “다 건너지도 않았고, 아주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으니 함께 태워 가시지요.” 뱃사공은 다시 뱃머리를 돌려 여인을 태웠다. 다시 배는 강을 건너고 있는데 여인이 사미승에게 왜 강을 건너느냐고 물었다. 사미승은 이런저런 이유로 간다고 말을 했다. 이어 여인은 “저도 보은사 중창을 하고 싶으니 저희 집에 가시면 기왓장 한 장 올릴 시줏돈을 드리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공이 갑자기 노를 들어 여인을 후려쳤다. “야! 이 요물스런 요괴야 어딜 감히 스님을 농락하려 드느냐!” 순간 여인이 강물에 뛰어 들자 커다란 백호(白虎, 어떤 책에는 큰 암구렁이 혹은 흰 뱀으로 표현하고 있다)가 되어 강을 되돌아가 사라져 버렸다. 청년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꿈이었다. “무슨 변괴가 있나….” 청년은 주변을 살피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어허. 빨리 강을 건너야겠는걸” 때마침 청년은 뱃사공을 찾았다. 머리가 흰 노파가 배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어르신. 나를 저 강 건너편으로 얼른 태워주시오.” “날도 저물어가는데 어딜 가시려구요?” “과거를 보러 한양을 가는데 갈 길이 바빠서 그렇소.”
<사진설명> 다층전탑 아래 석탑.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이 보인다. 노인은 청년을 태우며 노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보오 젊은이, 강 건너편에는 하룻밤 머물곳이 없소. 다만 보은사라는 폐사가 있는데 그곳에는 배를 타고 아직 도착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오.” 순간 머리가 오싹해진 청년은 노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저승사자의 배란 말입니까?” “그렇소. 나는 염라대왕이 보내서 온 저승사자요. 당신이 어머니와 하직인사를 한 뒤 저 강 건너 보은사 나한이 되셨는데 머물곳이 없어 바위 동굴에 계시오. 원래 그곳에는 백호가 살고 있었는데 자리를 당신 어머니께 빼앗기자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여인으로 변해 꿈속으로 들어와 헤치려 하려고 했던 것이오. 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당신의 품행을 알고 계신 어머니가 당신을 해치지 못하게 뱃사공의 노로 후려쳐 당신을 구한 것이오.” “그렇다면 꿈속에 나타난 동자승은 누구지요?” “그는 바로 당신의 전생모습이오. 당신은 전생에 보은사를 중창하기로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소.” “아. 그랬군요….” 청년이 강을 건너자 노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청년은 노인이 일러준 보은사를 찾아가 보니 역시 말해준대로 사찰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청년은 어머니의 영가천도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한양으로 향했다. “장원급제요.” 청년은 마음속으로 어머님이 도와서 오늘의 결과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여주 원님으로 부임해 고향집에 가 보니 나룻터에서 겪은대로 어머님은 자신과 인사를 하던 날 돌아가셨다고 이웃에서 일러주었다. “그랬구나….” 고을 원님이 된 청년은 자신이 체험한 일을 알리자 시주가 넘쳐났고, 임금도 재물을 내려 사찰을 중창했다. 보은사는 조선 철종때 다시 신륵사의 사찰이름을 되찾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신륵사 전탑 아래에는 나한님이 된 원님의 어머니가 지금도 머문다고 한다. 여주=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 찾아가는 길 버스이용시는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주버스터미널(1시간 10분 소요)로 가서 신륵사행 버스를 타면된다. 승용차로 갈 때는 중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으로 나와 우측으로 5Km 와서 신륵사행 이정표를 따라 들어오면 된다. (031)885-5936 참고 및 도움: 신륵사 홈페이지. 신륵사주지 세영스님, 여주문화원 조성문사무국장 [불교신문 2450호/ 8월1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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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남한강의 굽이치는 용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웠다는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모습.
청년은 한양으로 가기 위해 남한강 강나루에 도착했다. 다리가 없었던 때라 유일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다.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느라 시간을 지체해 정오나절이 넘어 강나루는 한산했다. 사공을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봇짐을 옆에 두고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