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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침묵은 설법보다 훌륭한가


문 : <유마경>을 보면 유마거사가 문수보살을 비롯한 많은 보살들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난 후 자신은 침묵으로 불이법문을 표현했고 문수보살은 유마거사를 찬탄했는데, 그렇다면 유마의 침묵만이 최고의 법문이라 할 수 있는지요?

침묵도 훌륭한 설명의 수단

설법이 있기에 가능한 방편

: 침묵도 하나의 설명이 됩니다. 특히 유마의 침묵은 이미 많은 보살들의 설명이 있었고, 특히 언어로서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문수보살의 자세한 설명 후의 침묵이기에, 앞에서 말로 표현한 것들의 진실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문수보살의 찬탄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침묵의 방법을 가끔 쓰셨는데, 그것은 언어적 유희인 말의 희롱에 대한 말 없는 설법인 셈입니다. 이 침묵을 거친 후에 부처님께서는 상대방에게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다시 말로써 설법을 하시곤 했습니다. 예컨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은 하나의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논쟁을 하는 이유와 논쟁자의 심리적인 측면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두 논쟁자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닭과 달걀을 동시에 놓아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설법으로서의 침묵은 일체를 놓게 하여 본체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로 하는 설법과 침묵의 설법을 두고 우열을 따지는 것이 부질없는 일입니다.

길을 잘 아는 두 사람과 길을 잘 모르는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간다고 할 때,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운전한다면 길에 대해서 묻을 것도 없고 가르쳐 줄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당연히 길에 대해 물어야하고, 또 질문을 받은 이는 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만약 길을 잘 아는 두 사람이 침묵한다면 길을 모르는 운전자만 잘못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잘 아는 사람마저도 동승한 까닭에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깨달음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최상이라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동승하고 있는 불교계가 우왕좌왕하게 되고, 불교계가 속한 국가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결국은 지혜로운 사람까지도 한 배를 타고 있는 까닭에 시끄러워지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불교계가 핍박받을 때에는 선지식들도 강제로 퇴속해야하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수의 언어가 없으면 유마의 침묵이란 아무 소용이 없게 됨을 뜻합니다. 그 결정적인 예는 석가모니부처님이십니다. 만약 석가모니께서 깨닫고 난 뒤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면 우리는 지금 그 깨달음을 짐작도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유마가 침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길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문수보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문수보살은 굳이 아는 것을 물었을까요? 그것은 다른 이들을 위한 보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마의 침묵은 대승의 침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 편하고자 침묵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깨닫게 하려는 보살의 마음으로 침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마거사의 침묵과 문수보살의 설명은 마치 손바닥과 손등처럼 별개의 것이 아니며, 또한 우열을 가려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이법문을 등지는 셈이지요.

송강스님 / 개화사 주지

[불교신문 2469호/ 10월22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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