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번뇌를 놓아라”
통일신라 범일조사 창건한 천년고찰
단정하고 균형감 있는 보물 1277호
보물 1277호 삼화사 삼층석탑.
동해를 대표하는 두타산(頭陀山). 의식주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함을 뜻하는 불교의 두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두타산을 따라 삼화사에 오르는 길은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인간의 집착과 번뇌를 놓으라고 만들어진 것 같다.
그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앉아 장기라도 한판 뒀을 것 같은 널따란 바위와 푸른 연못으로 둘러싸인 무릉계곡과 붙어있는 삼화사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이다. 삼화사 사적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율사가 산문을 열고 흑연대(黑蓮臺)라 불렀다고 하고, 또 강원도지에는 경문왕 4년(864)에 신라말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의 창시자인 범일조사가 삼공암(三公庵)을 창건한 것을 시원으로 보고 있다.
흑연대, 또는 삼공암이라 불리던 이곳이 오늘날과 같이 삼화사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다.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전쟁을 거듭해야 했던 그는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재산을 잃고 피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불교의 힘을 빌렸다. 희생된 영혼을 위해 전국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등 사찰을 근거지로 삼아 민심을 위로했던 것이다. 이런 왕실의 후원으로 몇몇 사찰이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삼화사도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사찰로 부상하게 됐으며, 삼화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됐다.
이후 1369년 대규모 불사가 진행됐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다시 지어졌다. 또 1905년에는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다 2년 뒤 왜병의 공격으로 다시 소실되는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다. 현재의 위치는 1977년 이전한 것이다. 쌍용양회 동해 공장의 채광권내에 사찰이 포함되자, 원래 사지(寺址)에서 동쪽으로 1.3km 떨어진 이곳에 이전 복원됐다. 오늘날 사찰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철불, 3층석탑 및 스님들의 부도와 비석은 삼화사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보물 1277호인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이다. 석회암 재질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의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균열이 많지만 기단부에서 찰주까지 전체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찰주까지 높이는 480cm인데, 균형감 있고 단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탑신에 비해 기단석이 비교적 높은데 기단의 네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고, 기단 맨 위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했다. 옥개석은 1, 2층의 높이를 거의 같게 하고 폭을 조금씩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한 반면 추녀 부분에서 완만해지며, 끝이 살짝 올라간 모습이다. 기단부의 구성이나 탑신 괴임,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으로 볼 때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탑은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했는데,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로 된 함이 발견됐다.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보물 1292호 철조노사나불좌상도 유명하다.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이 과정에서 오른쪽 등쪽에 10행 161자로 쓰인 글을 발견했는데,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등장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또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만든 이 불상은 <화엄경>을 토대로 했으며, 880년대에 활동한 결언스님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387호/ 12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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