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와 대초리에 걸쳐 있는 운주사(雲住寺)(사적 제312호)는 고려시대의 도선국사가 천불 천탑을 불과 일주야간에 건립하여 당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는 절이다. 운주사의 불탑과 불상은 그 형태나 조형형식, 기수(基數), 건립동기나 건립시기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운주사 불적(佛蹟)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지만 아직도 운주사는 무한한 의미 발전소로만 존재하고 있다. 정말로 ‘도선국사가 하루 낮밤’에 세웠을까…형태 조형형식 건립동기 등 ‘전설’ 가득 정통적 양식 깬 파격…무한한 상상 보고 독특한 불상.불탑 중에 ‘부부와불’ 유명
운주사에 관한 기록은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중종 때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영조 때의 〈여지도서〉, 정조 때 편찬된 사찰지인 〈범우고(梵宇攷)〉, 고종 때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모두 ‘천불 천탑이 있다’, ‘폐사되었다’고 하는 등의 단순한 내용만 기록하고 있어 운주사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폐사 전의 운주사의 분위기를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하는 기문(記文)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해의 〈아계유고(鵝溪遺稿)〉 6권의 ‘월야방운주사기(月夜訪雲住寺記)’와, ‘운주사기’가 그것이다. 만력 경자년(선조 33년, 서기1600년) 겨울에 운주사를 방문했을 때의 기록인데,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드디어 서로 이끌고 승당(僧堂)으로 들어가니, 승당은 여덟 칸이었는데, 하나의 온돌로 통하였고 100여 명을 수용할 만했다. 불전(佛前)에 밝혀 놓은 촛불이 대낮같이 밝아서 정신도 육체도 모두 상쾌했다. 조는 듯 마는 듯하다가 일어나서 보니, 벽을 향해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앉아 있는 자도 있고 불경을 외우면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도 있고 어떤 자는 누워 있기도 하고 또 기대어 있는 자도 있었으며, 속객은 또 스님과 장기를 두는 자도 있고 스님과 산천을 이야기하는 자도 있었으며, 불러도 반응이 없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자도 있었는데, 이것 역시 일대 특이한 광경이었다.”
운주사 불탑과 불상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누가, 언제, 왜 이러한 독특한 형태의 대규모 유적을 건립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이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지만, 문헌자료가 없다고 해도 불탑과 불상이 정통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시대별 양식을 기준으로 편년정도는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운주사의 불상과 불탑은 정통적인 양식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 실증적 해명조차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누가’, ‘왜’라는 의문은 어떻게 보면 도선 국사 전설이 이미 다 풀어 준 것 같지만, 도선국사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역사적 사실을 밝힌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몇 가지 주장과 가설이 나와 있다. 그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경내 산기슭에 있는 칠성바위를 보고 착안한 것으로, 운주사의 천탑은 하늘의 별자리를 지상에 구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밖에 몽고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팔만대장경과 같은 의도로 조성했다는 설, 미륵의 혁명사상을 믿는 노비와 천민들이 들어와 천불 천탑과 사찰을 만들고 미륵공동체사회를 열어놓았던 곳으로 추정된다는 것 등 몇 가지 주장들이 있다. 전남대학교박물관이 1984년과 1988년 및 1989년 4차에 걸쳐 내놓은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운주사의 초창은 11세기 초에 이루어졌고, 그 후 12, 13세기경에 두 차례의 중건을 거쳤으며, 정유재란 때 폐사된 것으로 되어 있다. 불상에 관한 내용을 보면, 완형을 유지하고 있는 불상은 57체이고, 불완전한 불상은 43체인데, 이중에서 불두편이 24체, 불신편이 16체 등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12기의 탑과 칠성바위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안에 있는 불상은 비교적 잘 다듬어진 것에 속한다. 이 불감은 골짜기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판석으로 법당 형태를 만들고 그 속에 두 체의 불상을 봉안해 놓았다. 내부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두 불상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석실 안에 두 불상이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는 기록과 일치한다. 남쪽 불상은 코와 귀가 얼굴에 형식적으로 부조되어 있으며 육계는 없다. 목에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보이고, 법의는 통견이며, 주름은 도식적이다. 북쪽의 불상 역시 남쪽의 불상과 비슷하지만 옷 속에서 지권인(智拳印)으로 보이는 수인을 결하고 있는 차이점을 보인다. 석조불감 바로 북쪽 편에 자리 잡은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 역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탑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이 모두 원형으로 된 이 석탑은 현재 6층으로 되어 있으나, 탑신부의 체감율이나 우리나라 석탑 층수에 관한 수리관념(數理觀念)에 비추어 볼 때 원래는 양수(陽數) 층수인 7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기단갑석 둘레는 위쪽을 둥글게, 그 위에 올려진 옥개석은 아래쪽을 둥글게 깎아 놓았는데, 이것은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 유적 중에 일반인들에게 인기 있는 것이 부부와불이다. 두 불상이 나란히 누워 있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도선국사가 천불 천탑을 하루 낮밤에 세우고, 마지막으로 이 두 부처를 세우기 전에 날이 새버려 와불로 남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와불이 일어나면 세상이 바뀐다는 속설을 믿고 일제강점기의 일인들이 불상의 보관을 훼손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들린다. 어쨌든 운주사는 아직도 신비에 싸인 성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면, “산은 구름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지만 산이 높으면 구름이 저절로 와서 머문다.”고 한 이산해의 말처럼, 사세(寺勢)는 빈약해도 스님들의 덕이 높으면 많은 불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머물게 된다는 사실이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42호/ 7월5일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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