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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미륵전 내에서 바라본 관촉사 석조미륵 보살입상. |
‘은진미륵’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은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미륵보살상이다. 반야산(般若山) 중턱의 운치 있는 암반 위에 존엄한 자태로 서있는 이 거대한 미륵보살상은 고려 당시의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유행하던 지방화 된 불보살상 양식을 대표하고 있다. 조상(造像) 예술의 전성기 인 신라시대의 불상만은 못하지만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상 무시 못 할 귀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닌 가치는 크다.
풍탁 달린 면류관 형태의 ‘보관’ 특이
그 안의 금제 아미타불상 日 약탈설도
목 부분에 그어진 세 줄은 ‘삼도’ 상징
고려의 혜명(慧明)스님에 의해 968년(광종 19)에 창건된 관촉사는 이후 몇 차례의 증축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년 고찰답게 지금도 사찰 경내에는 석등(보물 제232호), 배례석(拜禮石)(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을 비롯해서 사자상 석탁자, 오층석탑, 사적비 등 많은 고려시대 유적들이 있다. 특히 장방형 화강암 위에 팔엽(八葉) 연화를 새긴 배례석은 풍려한 도안과 정교한 조형미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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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보관(寶冠) 1층 판석의 팔엽연화문. 철사로 봉합된 부분이 보인다. 1층 판석과 2층 판석 사이에 까맣게 보이는 것이 금동불상을 부착했던 흔적이다. |
은진미륵에 관한 옛 기록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은진현 ‘불우(佛宇)’ 조에는, “관촉사는 반야산에 있다. 높이가 54척이나 되는 돌미륵이 있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고려 광종 때에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 오른 것을 혜명스님이 쪼아서 불상을 이루었다”는 내용과 함께 미륵불을 읊은 목은 이색(李穡)의 시도 소개되어 있다. “마읍(馬邑) 동쪽 백여 리, 시진 고을 관촉사네. 큰 석상 미륵불은 ‘내 온다. 내 나온다.’ 하고 땅에서 솟아났단다. 눈같이 흰 빛으로 우뚝이 큰 들에 임(臨)하니, 농부들 벼를 베어 능히 보시하네. 석상이 때때로 땀 흘려 군신(君臣)을 놀라게 했다 함이 어찌 구전(口傳)만이랴. 국사에 실려 있다오.”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 조에, “일본 대화국(日本大和國) 대사(大寺)에 있는 큰 불상은 높이가 5장3척5촌이고 얼굴의 길이가 1장6척이며, 너비가 9척5촌이고 눈썹이 5척4촌5푼이고 눈 길이가 3척9촌이나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말하자면, 호서(湖西)의 은진현 반야산의 관촉사에 있는 돌미륵은 높이가 54척이요, 호남 금구현(金溝縣) 금산사 미륵전의 금불입상 3구(軀)는 5내지 6장씩이나 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규모가 큰 불상들”이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조선시대에 은진미륵은 다른 무엇보다 큰 규모로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던 것 같다.
지금 은진미륵은 풍탁이 달린 면류관 형태의 보관(寶冠)을 쓰고 중품중생(中品中生)의 수인을 결한 모습으로 동남향을 향해 근엄하게 서있다. 불상 앞에는 양 끝에 사자상이 조각된 석조 연화장식 탁자가 횡으로 길게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 예배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미륵불상 앞 약 20미터 쯤 되는 곳에 새로 지은 미륵전이 위치하고 있는데, 미륵전의 마룻바닥에 앉아 북쪽 벽에 뚫린 큰 창을 향해 고개를 들면 문득 경배자를 응시하고 있는 미륵불의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경배자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한 미륵불의 눈매가 범접할 수 없는 근엄함과 환상적인 기괴함 같은 것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은진미륵의 몸체는 거대한 두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미륵불 왼쪽에 서있는 ‘사적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혜명대사가 조정의 명을 받아 백여 명의 명석공(名石工)을 동원하여 존상을 완성했으나 불상을 세울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어느 날, 사제촌(지금의 신교리)의 한 쌍의 동자가 진흙으로 삼동불상(三胴佛像)을 만들어 세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평지에 몸체 아래 부분을 먼저 세운 후 모래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다음에는 몸체 윗부분을 그 위에 굴려 세우고, 나머지도 같은 방법을 써서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고 그 방법을 따라 미륵불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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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청동제 연꽃 지물. |
은진미륵이 가진 특징 중 하나는 면류관 형태의 보관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보관은 인근 대조사의 미륵불을 비롯한 충청도 일대의 미륵불과, 안성 매산리 미륵불과 같은 경기도 일부 지방의 미륵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매산리 미륵불의 보관은 하나의 방형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은진미륵은 두 개의 방형 판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매산리 미륵불의 보관이 은진미륵보다 앞선 시대 양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두 불상은 경기도 지역과 충청도 지역에서 석불 보관의 확산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믿어지며, 석불 보관의 형태는 면류관형 보관을 모방한 것, 육각 또는 팔각 형태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전개되어 나갔다.
은진미륵의 보관의 1층 판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모퉁이가 파손되어 철사로 봉합해 놓은 것은 볼 수 있다. 이 상처는 일본 사람들이 보관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을 훔쳐갈 때 땅에 떨어져 난 상처라는 설과, 불상을 처음 조성할 당시에 다른 곳(우두산)에서 만들어 이곳으로 운반해 오는 과정에서 파손 된 것이라는 설 등의 두 가지 설이 있다. 깊은 상처는 이 부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관 아래쪽에도 있다. 지금도 이 부분이 거칠게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구리로 만든 화관(花冠)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조선 고종 시대인 신사년 어느 날 명성황후의 명으로 보관에서 분리해 냈다고 한다. 이 일을 소위 ‘신사탈망(辛巳脫網)’이라고 하는데, 탈망된 화관은 당시 궁궐로 가져갔다고 하나 현재는 그 행방이 묘연하다.
불상의 얼굴을 살펴보자. 얼굴은 거대한 장방형으로 이마 위에는 머리카락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었고, 눈.코.입은 아주 큼직하면서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입술 부위에 아직도 엷은 붉은 색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석조불상의 입술을 붉게 칠하거나 신체를 채색한 예는 경주 석굴암 본존불을 비롯한 우리나라 석조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긴 양쪽 귀를 덮고 흘러내리는 장식이다. 머리카락 같기도 하고, 귀걸이 같기도 한 이 독특한 장식은 얼굴을 보살답게 우아하게 꾸미는 데 효과를 거두고 있다. 턱 아래에 그어진 음각 선은 얼굴을 더욱 풍만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법이고, 목에 그어진 세 줄은 불상의 중요한 도상 중의 하나인 삼도(三道)를 나타낸 것이다.
미륵의 두 손은 아미타 구품인(九品印) 중 중생중품과 유사한 수인을 결하고 있으며, 오른 손의 엄지와 중지로 청동제 연꽃 줄기를 가볍게 잡고 있다. 손의 크기는 몸 전체와 비교해서 큰 편이며, 조각 수법은 도식적이면서 투박하다. 법의는 두 어께를 가린 통견(通肩)으로 몇 가닥의 얕은 옷 주름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옷 주름은 ‘U’자를 반복하면서 아래로 흘러내리다가 발 등 부분에서 접혀 약간의 반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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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중생중품 수인. |
은진미륵과 관련해서 한 가지 주목되는 일화가 있다. 불상 조성 당시에 보관에 금제 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한일합방을 즈음한 시기에 일본 사람들이 그 불상을 약탈해 갔다는 내용이다. 죽암문인협회가 편찬하고 관촉사보승회가 1947년에 발행한 〈관촉사유적기〉의 내용을 보면, 1907년을 전후한 해의 어느 날 일본인 3명이 관촉사에 하룻밤 유숙(留宿)하기를 청하자 주지가 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배은망덕 하게도 그들은 한 밤중에 석불 뒤 고목나무 위에 올라 준비해 온 포목의 끝에 돌을 달아 보관 너머로 던진 후 드리워진 포목 줄을 타고 보관까지 올라가 금불(金佛)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아미타불상이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으나, 불상을 뒤쪽에서 고정했던 장치 흔적이 보관 앞쪽에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불상이 그곳에 올려져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전해지고 있는 말대로 보관에 모셔져 있던 부처가 아미타불이고, 그것이 이 보살상의 화불로 봉안된 것이라면, 은진미륵이라는 불상은 미륵보살상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상일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실제로 〈관촉사유적기〉의 ‘고적 건조물의 명칭 품수 급 소재지’ 조의 유적 목록에서는 이 불상을 ‘觀世音菩薩像(俗稱彌勒佛)’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기록이나 의구심과는 상관없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불상을 미륵불로 알고 있고, 믿고 있고, 또 예배드리고 있다면 누가 뭐라 해도 그것은 미륵불인 것이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불교신문 2246호/ 7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