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기능 방위개념 무속신앙 결합

십이지상은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 나라마다 있으나 춤추는 십이지상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의 십이지 번화(幡畵)가 그 대표적 예인데, 이 번화의 십이지 동물은 모두 갑주무장(甲武裝)의 수수인신(獸首人身) 형태로, 활발하게 탈춤을 추듯 약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십이지상 형태는 불교 신장의 수호의 기능과 십이지의 방위 개념, 그리고 한국 전통의 무속 신앙이 교차적으로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로 생각된다.


십이지, 삼국시대 등장 통일신라 전성기

사천왕 등과 아울러 불탑에 장엄되기도

가장 중요한 도상적 특징은 춤추는 자세

잡귀 몰아내기 위한 ‘축귀무’ 방불케 해



<통도사 십이지 번화(幡畵) 가운데 호랑이.>
우리나라 십이지 미술의 기본 성격이 중국과의 교류와 전파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십이생초(十二生肖) 개념은 중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북아시아 나라들을 비롯해서 동남아시아, 유럽의 국가에도 십이생초의 개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이생초의 구성과 내용에 있어서는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인도의 십이지동물은 쥐.소.사자.토끼.용.뱀.말.양.원숭이.새[金翅鳥].개.돼지이며, 그리스의 십이생초는 목우(牧牛).산양.사자.나귀.게.뱀.개.쥐.원숭이.홍학.매.악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멕시코의 경우를 보면, 호랑이.토끼.용.원숭이.개.돼지는 중국이나 우리나라 십이생초와 같고 나머지 여섯 가지는 다르다. 베트남에서는 토끼 대신에 고양이를 십이생초에 포함시키고 있다.

불교에도 뱀.말.양.원숭이.새.개.쥐.소.호랑이.사자.토끼.용 등으로 구성된 십이수(十二獸)의 개념이 있다. 5세기경에 편찬된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중국 북량의 담부참(曇無讖) 번역) 내용 중에서 십이생초와 십이수 간의 유사성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사는 섬인 염부제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 바다에 유리산(瑠璃山), 서쪽 바다에 파리산(頗璃山), 북쪽 바다에 은산(銀山), 동쪽 바다에 금산(金山)이 있다. 이 네 개의 섬에 각각 3종류씩 모두 12종의 동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유리산에는 뱀.말.양, 파리산에는 원숭이.새.개, 은산에는 쥐.소.호랑이, 금산에는 사자.용.토끼가 살고 있다. 각 짐승은 동굴 안에서 수신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밤낮 12시간.12일.12월에 나누어, 교대로 염부제에 나가 돌아다니면서 교화를 계속한다. 열두 동물 중에서 돼지가 사자로, 닭이 새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중국과 한국의 십이생초의 구성 내용과 같다.

십이지 미술은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나타났고, 통일신라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당시의 십이지상은 외호 신상으로 왕릉 호석에 새겨지기도 했고, 사천왕등 불교 신중들과 더불어 불탑에 장엄되기도 했으며, 불전 포벽 장식 그림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십이지상의 형태는 머리는 동물, 몸은 사람 모양인 수수인신 형식을 갖추었으며, 착의는 장포를 입은 경우와, 갑옷을 입은 경우가 있고, 무기를 들거나 무기 없이 공수(拱手) 자세를 취한 경우가 있다. 이런 추세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롭고 독특한 모습의 십이지상이 창안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도무(跳舞) 십이지상인 것이다.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십이지 번화가 그 전통을 이어받은 도무 십이지상의 대표적 유례이며, 우리나라 도무 십이지상의 특징을 확연히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번이란 의식장 주변을 장엄하기 위한 일종의 깃발 그림을 말하는 것으로, 관정(灌頂) 의식 등 의식을 행할 때 불전 기둥이나 당간, 또는 탑의 상륜부에 매달아 놓기도 하는데, 특별히 십이지 번화는 십이지 동물의 방위에 맞춰 12방위에 배치된다.

<통도사 십이지 번화 중 말.>
현재 성보박물관에는 세 종류의 십이지 번화가 소장되어 있다. 대한제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이 십이지 번화는 세로 약 120㎝, 가로 약 68㎝ 규모로, 당초에는 번화(幡畵)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족자 형태로 꾸며 보관하고 있다. 필력의 차이는 있으나 도무(跳舞)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다.

번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십이지 동물은 수수인신 형태로 되어 있으며, 화려한 채색의 갑옷을 입고 손에 칼, 언월도, 검, 창, 방망이 등의 무기를 들고 춤추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갑옷에 시문된 문양은 곱팽이문, 호피문, 원문(圓文), 귀면문(鬼面文), 용비늘문, 소슬문, 여의두문, 쇠코문양 등 매우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굵은 선을 사용하여 갑옷, 박대, 지물 등을 개념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색채는 원색에 가까운 오방색을 기조로 하고 있다.

번화의 십이지상은 신격(神格)을 나타내는 박대(博帶)를 걸치고 있다는 점, 위엄과 힘을 상징하는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 신장과의 유사성이 강하다. 불교의 신장은 불법과 사찰을 지키는 외호적인 성격과,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조성하는 내호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불교 신장 집단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약사여래 권속의 약사 십이신장이라 할 수 있다.

약사여래는 그의 곁에 12명의 신장을 거느리고 중생을 제도한다. 질병과 재난을 면하게 해주고 의식주 여건이 부족한 이들에겐 그것을 충분히 마련해주며, 외국의 침략군까지도 물리쳐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준다.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은 약사여래의 주처인 동방유리광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동방 지향의 약사여래 신앙이 사방불신앙으로 확대 발전하여 방위신앙(方位信仰)과 연관을 맺게 되면서 방위적 성격을 가진 십이지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번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갑주 무장 십이지상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통도사 십이지 번화의 가장 중요한 도상적 특징은 뭐라 해도 춤추는 자세에 있다. 손에 무기를 든 채 한쪽 손과 한쪽 발을 들고 마치 장작불을 뛰어 넘는 듯이 활발하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인데, 바람결에 휘날리는 박대가 춤의 동세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활달한 춤사위는 무당이 굿판에서 추는 축귀무(逐鬼舞)의 춤사위를 방불케 한다. 축귀무는 잡귀를 몰아내기 위한 춤으로, 도무(跳舞)를 추는 것이 특징이다. 도무에는 한발돋움, 두발 돋움 춤사위가 있는데, 무당은 도무를 추면서 언월도, 삼지창, 신칼 등을 휘젓는 행동을 한다.

<통도사 십이지 번화 중 소.>
십이지 번화의 축귀무 자세는 통도사 번화에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벽사를 목적으로 한 축귀무의 기원을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호국을 기원하는 법회에서 오방신상을 만들거나 초상으로 모시는 일이 성행했고, 구나의식(驅儺儀式) 뒤에 동.서.남.북.중앙을 상징하는 오방색 무복을 입고 처용무를 추기도 했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중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猊)의 다섯 가지 놀이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대면’에 관한 가사 내용은 이러하다.

“누런 금빛 탈을 썼다 바로 그 사람(黃金面色是其人), 방울 채를 손에 쥐고 귀신을 쫓네(手抱珠鞭役鬼神), 잦은 몰이 느린 가락 한바탕 춤은(疾步徐趨呈雅舞), 너울너울 봉황새가 날아드는 듯(宛如丹鳳舞堯春).”

‘대면’은 등장인물이 큰 탈을 쓰고 채찍을 들고 나와 귀신을 다스리는 내용인데, 이것은 나례의 일종이거나 나례의 영향을 받은 의식으로 볼 수 있다. ‘대면’에서는 탈을 쓴 인물이 채찍을 들고 등장하여 귀신을 쫓는, 또는 귀신을 부리는 동작을 한다. 한편 나례에서는 십이지신이 탈을 쓰고 나와서 채찍을 휘두르며 귀신을 쫓는데, 이 모습은 탈놀이의 양반과장에서 말뚝이가 탈을 쓰고 나와 한 발 돋움, 두 발 돋움 춤을 추기도 하고 채찍을 휘두르기도 하면서 양반들을 함부로 다루다가 쫓아내는 내용과도 상통한다. 이러한 춤의 전통이 후대로 이어져 통도사 십이지 번에 나타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통도사 십이지 번의 도무 십이지상은 성격상으로는 약사십이신장의 수호기능과 십이지동물의 방위개념, 여기에다 한국 무속의 축귀무 내지는 탈춤의 춤사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립된 한국 특유의 불교 신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균 /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21호/ 4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