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고 장엄한 ‘진리의 圓音’ 갈무리한
고대 동양 靑銅文化의 정수
구리 12만근 조성과정 에밀레종 설화에는
신라인의 지극한 불심과 美의식 녹아들어
음통.용뉴.비천상 등 예술성ㆍ기능성 조화
현재 국립 경주박물관 종각에 있는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은 웅장한 규모, 아름다운 장식, 장중한 종소리 등에서 단연 한국 최고의 종이며, 고대 동양 청동 문화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종은 또한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통해 부처님의 진리를 깨치려는 신라인들의 지극한 불심(佛心)과 미의식이 창안해낸 한국 특유 양식의 종이라는 점에서도 커다란 종교적,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은 신라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치자, 그의 뒤를 이은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한 종이다. 구리 12만근을 들여 높이 약 3.7m, 지름 약 2.2m의 웅장한 규모로 제작된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고, 아기를 시주받아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이 종을 달았던 봉덕사의 위치는 전하는 말로는 경주 북천 남쪽의 남천리(南泉里) 일대라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 수 없다.
신라전성기에 탄생하여 위용을 떨쳤던 성덕대왕신종은 1,200여년의 세월 속에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신라의 불교가 전승된 고려시대에는 전시대의 권위를 유지하였으나 배불숭유를 건국이념으로 삼고 출발한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봉덕사가 홍수의 치명적 피해를 입어 전 가람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다행히 신종만은 그 무게 때문에 떠내려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세조(1460) 대에 와서 신종을 인근의 영묘사(靈寺)(경주 성건리)로 옮겼으나, 얼마 안 있어 영묘사마저 화재를 입자 중종 1~2년에, 당시 부윤 예춘년(芮椿年)이 신종을 경주 읍성으로 옮겨 성문 종으로 사용했다. 그로부터 480년 후인 1915년 8월,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옛 경주박물관에 옮겨졌다가 1975년 새 박물관 건물이 완성되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성덕대왕신종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종 맨 위에 음통(音筒)이 있다는 것이다. 종의 정상부에 음통이 있는 경우는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음통은 대나무 마디와 비슷한 몇 개의 단(段)으로 구획되어 있고, 각 단마다 화려한 앙련과 복련이 장식되어 있다. 종전까지 이 음통은 종소리를 공명시켜 더 크고 우렁차게 하는 기능을 가진 구조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런데 이 음통의 성격에 관한 새로운 학설이 1982년 황수영 박사에 의해 제기되어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내용인 즉, 음통은 통일신라 건국설화에 나오는 영험한 피리, 즉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상징화 한 것이며, 그것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만파식적이란 ‘모든 파도를 고요하게 잠재우는 피리’라는 뜻으로, 이 피리에 얽힌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지었다. 신문왕 2년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해 온다고 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떠 있는 산은 거북 머리 같았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이 피리를 불면 평온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만파식적 조)
성덕대왕신종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종을 매다는 장치가 용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용뉴(龍紐)라고 하는데, 용뉴는 덩치가 큰 신종의 몸체에 걸맞게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용의 자세는 오른쪽 앞다리는 뒤쪽으로 버티고, 왼쪽 앞다리는 앞으로 버티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종뉴의 용은 포뢰(蒲牢)라는 이름을 가진 용으로 생각되는데, 포뢰는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서 나오는 용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에서 전해오는 용생구자설에 의하면 포뢰는 용이 낳은 아홉 용 가운데 하나로서, 동해 바다의 고래를 가장 무서워한다고 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포뢰를 종위에 올려놓고,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고래 형상의 당(鯨撞)으로 종을 쳤다. 경당으로 종을 치면 고래를 만난 포뢰가 놀라 큰 소리를 지르고 그와 함께 종소리도 커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당시에 성덕대왕신종을 쳤던 당이 고래 모양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의, “아래로 자금종(紫金鐘) 셋을 벌여 놓았는데, 모두 종각이 있고 포뢰(蒲牢)가 있으며 경어(鯨魚)로 당을 삼았다”는 기록(탑상 제4, 사불산.굴불산.만불산 조)을 보면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은 ‘신라의 미’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비천상은 강건하고 힘찬 모습을 한 종뉴의 용과 함께 강유(剛柔)의 절묘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신종을 더욱 우아하고 신비롭게 만드는 미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런데 신라시대 비천상의 주류가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 형식인 것과 달리 공양비천 형식을 취한 것은 이 종이 성덕대왕의 명복을 비는 종이라는 점이 고려된 듯하다.
비천상 외에도 신종 표면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장식이 베풀어져 있다. 그리고 띠 가장자리에 쳐져 있는 두 개의 단선 안에 연주문(連珠紋 : 구슬을 나란히 꿰어 놓은 모양의 문양) 이 정교하게 시문되어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다른 종에서는 보기 어려운 완만한 팔능형(八陵形)의 긁은 띠가 설정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보상화문과 연꽃문양으로 채워져 있다.
종의 공예미를 더욱 고조시키는 유곽(乳廓 : 젖꼭지 모양의 돌기가 나란히 붙어 있는 구역)은 위쪽 띠에 가깝게 네 군데에 배치되어 있다. 유곽을 둘러싼 넓은 띠는 보상화문으로 가득 차있으며, 띠 안쪽과 바깥쪽에 연주문 띠가 돌려져 있다. 유곽 내부에는 9개의 꼭지(乳)가 달려 있고, 꼭지가 놓인 바탕은 여덟 개의 넓은 연꽃잎을 가진 팔엽복판(八葉複瓣)으로 되어 있으며, 연꽃 중방에 6과(顆)의 연꽃 씨앗이 묘사되어 있다.
종복(鐘腹)에는 이 종을 만든 취지와 목적을 밝힌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은 서(序), 사(詞)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은 이런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대저 지극한 도는 형상 밖에 있어, 아무리 그 모습을 보려고 해도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진리의 소리는 천지간에 진동하고 있으나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한다.(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비유의 말을 내세워 삼진(三眞)의 오묘한 진리를 알게 하고, 신종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鐘 悟一乘之圓音).”
이 종명(鐘銘)의 내용처럼 성덕대왕신종에는 소리를 통해 불법의 진리를 깨달으려는 신라인들의 신심이 서려있다. 그러나 신라의 불자뿐만 아니라 이 신종을 보는 이는 누구나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찬탄하고,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 은은함과 장엄함에 감동한다. 그러므로 성덕대왕신종은 단순한 불전사물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 민족 문화의 긍지를 심어주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17호/ 4월5일자]
고대 동양 靑銅文化의 정수
구리 12만근 조성과정 에밀레종 설화에는
신라인의 지극한 불심과 美의식 녹아들어
음통.용뉴.비천상 등 예술성ㆍ기능성 조화
![]() |
사진설명: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통일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은 신라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치자, 그의 뒤를 이은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한 종이다. 구리 12만근을 들여 높이 약 3.7m, 지름 약 2.2m의 웅장한 규모로 제작된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고, 아기를 시주받아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이 종을 달았던 봉덕사의 위치는 전하는 말로는 경주 북천 남쪽의 남천리(南泉里) 일대라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 수 없다.
![]() |
사진설명: 용뉴와 음통. 음통은 ‘만파식적’을 상징한다는 학설이 있다. |
성덕대왕신종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종 맨 위에 음통(音筒)이 있다는 것이다. 종의 정상부에 음통이 있는 경우는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음통은 대나무 마디와 비슷한 몇 개의 단(段)으로 구획되어 있고, 각 단마다 화려한 앙련과 복련이 장식되어 있다. 종전까지 이 음통은 종소리를 공명시켜 더 크고 우렁차게 하는 기능을 가진 구조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런데 이 음통의 성격에 관한 새로운 학설이 1982년 황수영 박사에 의해 제기되어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내용인 즉, 음통은 통일신라 건국설화에 나오는 영험한 피리, 즉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상징화 한 것이며, 그것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만파식적이란 ‘모든 파도를 고요하게 잠재우는 피리’라는 뜻으로, 이 피리에 얽힌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사진설명: 공양비천상 |
성덕대왕신종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종을 매다는 장치가 용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용뉴(龍紐)라고 하는데, 용뉴는 덩치가 큰 신종의 몸체에 걸맞게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용의 자세는 오른쪽 앞다리는 뒤쪽으로 버티고, 왼쪽 앞다리는 앞으로 버티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종뉴의 용은 포뢰(蒲牢)라는 이름을 가진 용으로 생각되는데, 포뢰는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서 나오는 용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에서 전해오는 용생구자설에 의하면 포뢰는 용이 낳은 아홉 용 가운데 하나로서, 동해 바다의 고래를 가장 무서워한다고 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포뢰를 종위에 올려놓고,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고래 형상의 당(鯨撞)으로 종을 쳤다. 경당으로 종을 치면 고래를 만난 포뢰가 놀라 큰 소리를 지르고 그와 함께 종소리도 커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당시에 성덕대왕신종을 쳤던 당이 고래 모양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의, “아래로 자금종(紫金鐘) 셋을 벌여 놓았는데, 모두 종각이 있고 포뢰(蒲牢)가 있으며 경어(鯨魚)로 당을 삼았다”는 기록(탑상 제4, 사불산.굴불산.만불산 조)을 보면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 |
사진설명: 당좌와 비천상 |
비천상 외에도 신종 표면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장식이 베풀어져 있다. 그리고 띠 가장자리에 쳐져 있는 두 개의 단선 안에 연주문(連珠紋 : 구슬을 나란히 꿰어 놓은 모양의 문양) 이 정교하게 시문되어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다른 종에서는 보기 어려운 완만한 팔능형(八陵形)의 긁은 띠가 설정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보상화문과 연꽃문양으로 채워져 있다.
종의 공예미를 더욱 고조시키는 유곽(乳廓 : 젖꼭지 모양의 돌기가 나란히 붙어 있는 구역)은 위쪽 띠에 가깝게 네 군데에 배치되어 있다. 유곽을 둘러싼 넓은 띠는 보상화문으로 가득 차있으며, 띠 안쪽과 바깥쪽에 연주문 띠가 돌려져 있다. 유곽 내부에는 9개의 꼭지(乳)가 달려 있고, 꼭지가 놓인 바탕은 여덟 개의 넓은 연꽃잎을 가진 팔엽복판(八葉複瓣)으로 되어 있으며, 연꽃 중방에 6과(顆)의 연꽃 씨앗이 묘사되어 있다.
종복(鐘腹)에는 이 종을 만든 취지와 목적을 밝힌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은 서(序), 사(詞)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은 이런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대저 지극한 도는 형상 밖에 있어, 아무리 그 모습을 보려고 해도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진리의 소리는 천지간에 진동하고 있으나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한다.(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비유의 말을 내세워 삼진(三眞)의 오묘한 진리를 알게 하고, 신종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鐘 悟一乘之圓音).”
이 종명(鐘銘)의 내용처럼 성덕대왕신종에는 소리를 통해 불법의 진리를 깨달으려는 신라인들의 신심이 서려있다. 그러나 신라의 불자뿐만 아니라 이 신종을 보는 이는 누구나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찬탄하고,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 은은함과 장엄함에 감동한다. 그러므로 성덕대왕신종은 단순한 불전사물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 민족 문화의 긍지를 심어주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17호/ 4월5일자]
'불교유적과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도사 십이지 번화(幡畵) (0) | 2013.12.20 |
---|---|
용문사 윤장대 (0) | 2013.12.11 |
범자문(梵字文) (0) | 2013.11.19 |
안성 청룡사 대웅전 (0) | 2013.11.14 |
금강저 (0) | 2013.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