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륜대좌불 |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그 속살에 시 쓰기를 즐겼으며, 다 쓰면 한참을 읊조리다가 홀연히 그 속살마저 깎아버렸다는 그를 만나지 않고는 도저히 돌아 설 수가 없었다. 예까지 흘러오는 밤이면 언제나 그랬다. 그가 생각 나 까만 밤을 뒤척이곤 했던 것이 말이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그를 향해서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것도 반복되는 일이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이슬에 젖은 노란 송화 가루가 채 기지개를 펴기도 전, 이제 막 어둠이 벗겨지려는 산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길은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인 양 서먹하게 내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사진설명 : 오른쪽에 마래여래좌상이 새겨졌으며 왼쪽에 불두를 잃은 채 뒷모습을 보이는 불상이 삼륜대좌불이라 일컫는 석불좌상이다. “푸른 벼랑 어지러운 안개에 저녁놀 비추누나” 그도 이런 길을 걸으며 노래했을까. “온종일 짚신 신고 발길 가는대로 거니노라니 / 한 산(一山)을 다 지나자 또 한 산이 푸르다. / 마음에 집착 없으니 어찌 육체의 종이 될 것이며 / 도는 본래 이름 할 수 없나니 어찌 빌려 이루랴. / 간 밤 이슬 마르기 전에 산새들 지저귀고 / 봄바람 무진(無盡)하여 들꽃이 환하다. / 단장 짚고 돌아 갈 때 일천 묏부리 고요하고 / 푸른 벼랑 어지러운 안개에 저녁놀이 비추누나.”라고 말이다. 조선중기 성리학의 이상을 꿈꾸던 사림파 중 한 명인 음애(陰崖) 이자(1480~ 1533)는 그가 남긴 시문들을 읽고는 “불가에 몸을 담고 유교를 행한 이다.(跡佛而儒行者也)”라고 했다. 비록 그가 구도행을 마다 않았지만 결코 불가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를 방편으로 삼아 유교를 지켰다는 것이다. 율곡 또한 그를 두고 심유적불(心儒蹟佛), 곧 마음에는 유가를 품고 있지만 불가의 자취를 쫓았다고 했다. 그는 삭발염의하고 불가에 귀의 할 때에도 분노에 차 있었을 뿐 속세의 인연을 싹둑 끊지는 못했다. 그가 말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이 세상을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남겨 둔 것은 장부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다(削髮逃當世 留鬚表丈夫)”라고 했으니 이는 원나라의 한림학사를 지낸 명천연(明天淵)이 승려가 되고 난 다음 한 말과 너무도 같다. 머리를 깎고 내복(來復)이라는 법명을 받은 명천연은 수염을 깎지 않았다. 그 또한 말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번뇌를 없애기 위함이요, 수염을 남겨 둔 것은 장부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다.(削髮除煩惱 留鬚表丈夫)”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여운이 남는 단절인 것이다. 이쯤이면 그가 누구인지 짐작을 하리라. 그는 매월당(梅月堂)이자 청한자(淸寒子)이며 동봉(東峰)이자 췌세옹(贅世翁)이라는 호를 쓰던 설잠(雪岑) 김시습(1435~1493)이다. 나라 안 곳곳, 그의 발길 미치지 않은 곳이 없지만 하얀 찔레꽃 한 송이 꺾어 든 순례자가 찾아가는 용장골(茸長谷) 또한 그가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머문 곳이다. 그러나 그는 〈상류자한서(上柳自漢書)〉에서 고백하기를 자신은 “불노(佛老)와 같은 이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스님이란 본디 물외인(物外人)이요. 산수 또한 물외경이기에 스스로 물외에서 노닐려고 스님들과 벗하며 지냈다”고 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그가 홀연히 머리를 깎은 것은 1455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손위하고 물러나자 수락산으로 자취를 감췄으며 곧 긴 방랑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관동과 관서 그리고 호남지방에 이르는 긴 탕유(宕遊)를 끝내고 이곳 용장골로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31세 때인 1465년이었다. 그러나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호남 일대를 떠돌던 그가 1462년 합천 해인사를 거쳐 1463년 봄과 여름을 용장사 부근에서 지내며 분황사에 있던 화쟁대사비를 보고 ‘무쟁비’라는 시를 지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당시에 이미 성사 원효를 닮아 불기(不羈), 곧 그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삶을 꿈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해 가을, 다시 서울로 향한 그는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간경도감에서 시행하는 〈묘법연화경〉의 언해 사업에 열흘 동안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저 글자 풀이를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묘법연화경〉과 선(禪)을 접목시키며 따로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을 지었다. 그렇게 일을 해서 얻은 대가로 〈맹자대전〉, 〈성리대전〉, 〈자치통감〉 그리고 〈노자〉와 같은 책을 구하여 다시 용장골로 돌아 온 것이 1465년 이른 봄이었다. 그러나 그해 4월, 설잠은 원각사 낙성식에 초대를 받아 다시 서울로 향했으며 스스로를 일민(逸民), 곧 정치세계와 단절한 채 은둔하는 사람이지만 참여한다고 했다. 그는 그곳에서 ‘원각사찬시’를 지었으며 그것을 본 세조가 감동하여 계권(戒券), 곧 도첩(度牒)을 내려 정식으로 승려의 신분을 얻었다. 그때 설잠은 서거정을 찾아가 용장골에 새로 지은 정사의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서거정에게 말하기를 “계림의 남산에 터를 잡아서 두어 칸의 정사를 지어 좌우로 서책을 쟁여 두고 그 사이에서 배회하며 읊조리니, 산중의 사시(四時) 오락거리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잠은 장차 여기에서 늙고 여기에서 입적하려고 합니다”라고 했으니 이는 절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서재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1465년 가을, 원각사 낙성식에 다녀 온 후 그의 몸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서울에서 돌아오자마자 지은 〈초당병와서회(草堂病臥書懷)〉를 통해 스스로 몸이 많이 아팠음을 술회하고 있으며, 서재는 그의 시 ‘옥루탄(屋漏歎)’에 따르면 지붕이 철철 새어 마음이 편치 않을 정도로 누추했다. 거기에 더해 〈유금오록(遊金鰲錄)〉의 후기에서 말하기를 더 이상 멀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한기가 깊게 들어 질병이 잇따랐으나 대나무와 매화를 찾아 시를 읊는 것으로 즐거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노닐며 시를 읊던 시누대숲인가, 계곡을 지나 기신기신 오른 절터는 푸른 대로 뒤덮여 있었다. 이윽고 대현스님이 염불을 외며 부처님 주위를 돌면 그를 따라 부처님도 빙빙 돌았다는 삼륜대좌불이 불두를 잃은 채 맞이하고 그 곁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좌상 또한 그윽한 미소로 순례자를 반겼다. 그러나 나는 여느 때와는 달리 들고 온 찔레꽃 한 송이를 부처님 앞에 놓으며 예를 갖추곤 먼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설잠이 죽음을 앞두고 썼다는 〈법화경발문〉을 못다 읽었기 때문이다. 설잠이 홀연히 용장골을 떠난 것은 1471년 봄이었으며 수락산 기슭 폭천(瀑泉)에 터를 잡은 것은 1472년 가을이었다. 그리고는 세조에서 성종으로 바뀐 조정의 관료로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서거정을 비롯한 그 누구도 천거를 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없이 폭천정사에 머물게 된 설잠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1475년, 일연선사의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주해하여 〈십현담해요(十玄談要解)〉, 다음해에는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에 주를 달아서 〈대화엄법계도주병서(大華嚴法界圖註幷序)〉, 그리고 그보다 늦은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화엄석제(華嚴釋題)〉를 저술했다. 그러니 그를 두고 이르기를 유(儒)를 품고 불(佛)을 방편으로 삼았다고 말하는 것은 유자들의 섣부른 결론일 뿐이다. 오히려 그에게 유는 유이고 불은 불일 따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신라의 화엄을 조선에 와서 되살린 화엄학의 우뚝 선 인물이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그는 불기(不羈)를 꿈꾸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무량사에 머물던 1493년 2월에 쓴 〈법화경발문〉을 읽노라면 어느새 돈오와 점수를 아울러 융회하는 불이(不二)의 법문을 펼쳐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폭천에 머물 때부터 교유를 시작한 추강(秋江) 남효온(1454∼1492)은 ‘동봉(東峯)에게 주다’라는 시에서 그를 두고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 선사”라고 했다. 그러나 내 보기에 남효온은 부처를 싫어하지 않는 선사라는 말을 빼 먹은 것 같다. 설잠은 유불도(儒佛道) 삼교를 무시로 넘나들었지만 그 어느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았고 싫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에게 그 셋은 모두 동등한 것이며 똑같이 무심하게 자적했던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맹렬한 구도자였다. 자신의 방랑을 스스로 탕유라고 했지만 그것은 엄연히 불적을 따라가는 순례였다. 그렇게 길 위에서 법을 구하고 자리에 앉으면 경사문(經史文)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자신 속에 충만한 깨달음을 몸을 움직여 실천하려 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풋내기 순례자가 선각(先覺)의 흔적을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 있겠는가. 늦은 오후 햇살이 부처님에게로 비춰질 무렵, 훌쩍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자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물었다. “이제 또 어디로 가려는가”하고 말이다. “봄빛 떨어지는 곳 알 길 없는데 아직 섬돌에 떨어진 꽃잎 다 쓸지 못했다”고 답하자 다시 물으셨다. “언제나 네 자리로 돌아 갈 것이냐”고 말이다. 나는 대답 대신 글머리에 쓴 설잠의 시에 이어지는 구절을 되뇌며 세 번 절하고 돌아섰다. “펄렁펄렁 하나의 지팡이가 허공을 울리며 나는데 / 오월의 소나무 꽃이 푸른 산에 가득하다. / 온종일 바리를 들고 다니매 천집(千戶)의 밥인데 / 여러 해를 누더기 빌었거니 몇 사람의 옷이든가 /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 스스로 청정하고 / 몸은 조각구름과 함께 시비가 없다. / 강산을 두루 밟고 다니니 두 눈이 푸르렀는데 / 우담발꽃(優曇花)이 피는 그때에 돌아가리.” 이지누 기록문학가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가서 1.5km 가량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언양으로 향하는 35번 도로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포석정과 삼릉, 경주교도소를 지나면 왼쪽으로 용장골 들머리가 나온다. 35번 도로 상에서 절터까지는 대략 3km 남짓 걸어야한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을 놓칠 염려는 없다. ■ 특징/ 앞은 옷자락 뒤는 연화문…석불좌상 눈길 용장사터(茸長寺址)에는 2구의 부처님이 계신다. 그 중 1구는 보물 제 913호인 마애여래좌상이며 다른 1구는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로 불리는 보물 제 187호 석불좌상<왼쪽 사진>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용장사는 유가종(瑜伽宗)의 시조인 청구사문(靑丘沙門) 대현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 중, 석불좌상은 대현스님이 염불을 하며 석불주위를 돌면 석불도 스님을 따라서 얼굴을 돌렸다고 전한다. 도괴된 것을 1932년에 복원했다고 전하며 불두는 언제 잃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근처 암벽에 올라가서 뒷목 부분을 살펴보면 고의적으로 잘랐음을 추정할 수 있는 홈이 파여져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왼쪽 가슴에 법의를 묶은 매듭이 돋보인다. 또 연화좌 위에 앉은 석불은 법의가 무릎 아래로 쳐져 길게 덮은 상현좌(裳縣座)의 모습이다. 특이한 것은 앞과 뒤가 서로 다른 모습이 서로 달라 앞은 옷자락이지만 뒤는 연화문이다. 상현좌는 흔히 감실부처상이라고 불리는 보물 제 198호 남산 불곡 석불좌상이나 지난 호, 탑곡 마애조상군의 남면 삼존불 중 본존불의 대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성 시기는 가늠할 수 없지만 대현스님이 용장사에 머물던 시기인 8세기 중반에 이미 조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곁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오른쪽 사진>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하지만 1984년 부처님 왼쪽 어깨 곁에 있는 명문이 해독되면서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황수영 박사팀에 의해 판독된 명문은 ‘大平 二年八月 □□ 阿(尉)□ 佛成奉爲時’으로 대평 2년인 고려 현종 13년, 곧 1022년 8월에 부처를 만들어 모셨다”는 것이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음각 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외광(外光)은 보이지 않는다. 대좌는 무릎 밑에 앙련의 연화문을 길게 새겼다.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불교신문 2332호/ 6월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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