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
탑곡 마애조상군은 부처바위라고도 불리며 부처님의 세계인 법계가 아름답게 표현된 사방불이다. 사진은 남면이다. “나라 안에 있는 사방불 가운데 가장 아름다워” 여래좌상 오른쪽 위로는 ‘가릉빈가’ 날고 동면 왼쪽엔 보리수 아래 선정 든 ‘스님’이…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잠이 들고 / 아침마다 또 함께 일어나곤 하네. / 일어나나 앉으나 늘 서로 따르며 / 말을 하건 안하건 거처를 함께 하네. / 능히 만상의 주가 되고 / 사시를 따라 시들지 아니하네.” 스스로 선혜대사(善慧大士)라 불렀던 부옹(傅翁)이 지은 시편을 해낭(奚囊)에 넣고 찾아 온 때문인가. 지금 거닐고 있는 황룡사터의 새벽은 찬란하기 그지없다. 절터는 차마 눈이 부셔 마주 보지 못할 만 치 영롱하게 빛나는 이슬로 뒤덮였으니 풋내기 순례자의 가슴은 환희로움으로 가득 차 감당하기 버거운 지경이었다. 산등성이를 넘어 온 햇살이 머무는 풀 끝 마다 매달린 이슬, 그것이 곧 부처님의 뜻이며 조사의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더냐. 방온(龐蘊)거사와 함께 수행의 길을 걸은 아내 방파(龐婆)가 그랬던가. ‘백초두변조사의(百草頭邊祖師意)’라고 말이다. 그러니 오늘 새벽 절터에서 듣는 설법은 말과 글이 아니라 빛이다. 가뭇없이 사라져 간 전각들이 있던 자리에 돋아난 이름 모를 풀끝에 매달린 이슬이 빚어내는 무언의 설법인 셈이다. 그 장면을 앞에 두고 중문 터에 서서 목탑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옛 모습을 추억이라도 하는 양 불거진 심초석이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듬직해 보이는 크기이지만 되레 앙상하게 여겨지는 심초석 곁으로 가지 않았다. 다만 신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회랑을 따라 두어 바퀴 절터를 거닐다가 남산의 탑곡으로 향했다. 그곳에 황룡사 9층 목탑일 것으로 짐작되는 마애상이 있으니 그 곁에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철쭉꽃과 해당화가 이운 곳에 불두화가 피어나고, 계곡 물소리에 모란이 터지는 소리가 묻어있는 길을 걸었다. 부처님오신날을 축원하는 연등은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어느덧 우거져 가는 숲을 물들이는 햇살이 소나무 사이로 탑곡 마애조상군에 비쳐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함에서 미처 깨어나지 않은 순정한 시간, 연로한 보살 한 분이 두 손을 모아 절을 하고 있었다. 〈화엄경〉에 “보살의 마음으로써 집을 삼고, 여리(如理)의 수행으로써 가법(家法)을 삼으라.”고 하더니 눈앞의 보살이 바로 그 행자이지 싶었다. 노 보살에게서 뗀 눈을 부처님을 찬탄하는 조각이 베풀어진 바위로 천천히 옮겼다. 이윽고 눈길이 머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하는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탄성은 바위에 베풀어진 숭엄한 조각 때문이 아니었다. 눈길은 미처 바위에 닿기도 전에 멈춰버리고 말았으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소림정사 뜰에서 바라보는 북면은 휑했다. 해마다 흰 꽃으로 환하게 헌화공양을 올리고 그도 모자라 꽃비로 부처님을 찬탄하던 벚나무가 사라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바람소리 한 올도 놓치지 않고 머금었다가 다시 들려주던 시누대숲이며 7층 목탑 위에 자라던 두릅나무도 간 곳 없고, 넌지시 부처님을 바라보며 등을 기대던 두어 그루 소나무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부옹의 시 마냥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잠이 들고 아침이면 같이 깨어나는 사시를 시들지 않던 나무들이었다. 아!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슬픈 마음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천개(天蓋)를 쓰신 부처님은 여여한 모습으로 미소를 잃지 않고 계시건만 중생일 따름인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꼭 들어맞았다. 지난 해 봄날, 지인들과 함께 꽃비가 흩뿌리던 장면 앞에서 경탄을 금치 못한 채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그날, 벌어진 입으로 들어 온 그 아름다운 장면은 이내 몸과 마음을 청신하게 씻어주었건만 오늘 벌어진 입으로는 몸속의 기가 송두리째 빠져 나갈 뿐이다. 부처님 면전에서 나무를 베는 살생의 장면을 목도하였다면 내 결코 가만있지 않았으리. 1999년에도 한 차례 남산의 불적 근처에 있는 나무들이 베어지는 수난을 당하지 않았던가. 부처님의 세월을 지키기 위하여 외호(外護)인 양 어우러져 있는 나무의 세월을 그처럼 무참하게 지워버리는 것을 과연 부처님께서 허락하셨을까. 오히려 나무를 간단없이 가꾸어도 시원찮을 판인데 말이다. 이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까. 닫집처럼 해마다 흰 꽃으로 부처님을 장엄하던 벚나무나 청정한 향기로 향공양을 올리던 소나무들이며 풍경소리와도 같았던 시누대숲 바람소리의 영가를 위하여 천도재라도 지내야만 할 것 같았다. 불끈거리고 일어나는 분노에 가까운 마음을 가라앉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 솔밭에 드러누워 버렸다. 청정한 솔향기는 이내 마음을 다스려 주었으며 솔바람은 다시 기운을 북돋우어 주었다. 한걸음, 한걸음 바위 앞으로 나아가자 어느새 햇살에 젖은 바위는 찬란한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순례자를 맞이했다. 거대한 바위의 동서남북 면에 불보살, 비천, 스님, 신장, 나한 그리고 탑, 보리수, 사자와 같은 조각이 모두 35구나 베풀어졌으며 여래입상과 삼층석탑 까지 우뚝하니 어찌 불국토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북면은 괘불을 걸어 놓은 듯 하고, 동면은 섬세하기 그지없는 고려불화의 장면을 연상시키며, 남면은 절집 마당에서 대웅전으로 걸어가는 것 같은가 하면 서면 또한 한 폭의 불화를 단출하게 펼쳐 놓은 것만 같다. 이토록 엄숙한 법계(法界)가 베풀어진 바위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법향(法香)에 물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법음(法音)이 에워싸는 것만 같았다. 그 때문인가. 자꾸만 바위 속으로 들어가고픈 입석(入石)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서붓서붓, 동쪽의 그에게로 갔다. 그리곤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전율은 내 삶의 전체를 일깨우는 할喝이 되었고, 죽비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죽비는 어깨와 정수리를 가리지 않고 날아 왔건만 소리를 내지 않았고, 할은 울림이 없었다. 죽비는 그저 흩날리는 는개와도 같이 무게가 없었으며 할은 어느새 젖었는지도 모르게 번뇌와 망상으로 웃자란 머리숱을 적시는 이슬이 내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러나 나의 아픔은 송곳으로 찔린 것 보다 깊었으며, 폭풍우 속을 헤매며 듣던 천둥과 번개소리보다 더 큰 소리의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법향과 법음은 그렇게 스며들어 나를 일깨우고, 내가 두 발 디디고 있는 현재를 내 앞에 펼쳐 놓은 것이다. 부처님 앞에서 내가 깨달을 것, 지금 나의 현재보다 더한 것 또 무엇 있겠는가. 내가 고요하면 산 아래도 산이고, 내가 분망하면 산 또한 산 아래인 것을, 그 모두 나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것이니 산이 번잡스러우면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부처님은 나에게 그 말을 해주고 계셨다. 내가 있는 현재의 자리, 그곳이 곧 산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어디로부터 무엇을 찾고 구할 것인가. 사시를 시들지 않는 것은 법향이요, 법음인데 오직 시드는 것은 나일뿐이다. 아! 눈을 떠야 하리라. 그리고 마음을 봐야 하리라. 내 발밑을 살피고 또 거듭 살펴야 하리라. 북면의 여래와 목탑에 빛이 비쳐들던 이른 새벽으로부터 서면의 여래와 비천상이 환희로운 미소로 순례자를 맞이하던 늦은 오후까지 잠시도 바위 곁을 떠나지 못한 까닭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더구나 며칠 후면 사월 초파일이기도 하거니와 법계가 이토록 장엄하게 펼쳐진 곳을 순례길 어디에서 또 만날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법계가 베풀어진 이 큰 바위 곁에 그윽한 솔밭이 없었다면 머물지 못했으리라. 그곳에 앉아 바라보고 나아갔다가 되돌아오기를 수십 차례, 해낭 가득 담긴 시초(詩抄)는 비단 법향과 법음뿐이 아니었다. 바람결에 날리는 노란 송화 가루와 무더운 날씨를 식혀주던 솔바람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만 일어섰다. 주섬주섬, 펼쳐 놓은 걸망을 챙기면서도 바위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바위 앞에 무엇이라도 공양을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순례자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여말선초의 문사인 양촌(陽村) 권근이 사월 초파일날 경기도 장단에서 지었다는 시 한 수뿐이었다. “농사짓는 촌부 해 저물자 봄갈이 파하고 / 외로운 등불 높이 걸고 부처님 앞에 예를 올리네. / 아스라이 스쳐보니 봉성(鳳城)이 삼십 리라. / 성긴 별 밝은 달은 하늘을 비추누나. / 이날이라 농부들 밭갈이를 폐하고서 / 부산히 돌아와 부처님 앞에 발원하네. / 적막한 강촌이라 등불은 찾을 길 없고 / 중천에 달빛만이 휘영청 밝네 그려 / 성안에선 집집마다 농사도 아니 짓고 / 관등(觀燈)으로 밤을 새니 이슬방울 하얗구나.” 오색 연등이 없으면 어떠랴. 휘영청 밝은 달을 등 대신 하늘에 달았으니 그 보다 큰 등이 또 있을까. 만법이 온천지에 가득한 날, 밝은 달이 떠오르면 예를 갖추리라. 이 땅 깊은 산 속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을 향해 두 손 모으고 세 번 절하리라. 기록문학가 가는 길 지난 호, 배반동 마애조상군을 가는 길과 같다. 주차장에서 옥룡암이라는 팻말을 따라 300m 가량 걸으면 된다. 북면의 목탑과 사자상 그리고 여래 위의 천개와 같은 것은 마애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다. 동면은 다분히 회화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본존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비천이 감싸고 있다. 서면은 가장 단출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래좌상과 비천 2구, 나무 2그루가 새겨져 있다. ■ 특징 나무 비천 탑 신장도 함께 조각 경주 남산 기슭의 탑곡 마애조상군은 보물 제 201호이다. 일본인이 근처 솔밭에서 신인사(神印寺)라는 사명이 새겨진 와당을 수습했다고 하나 알 길이 없다. 높이 9m에 이르는 거대한 자연 암석의 사면(四面)에 빼곡하게 부처님 세계인 법계가 표현되었으며 나라 안에 있는 사방불 중 가장 숭엄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또한 불보살만을 새기는 여느 마애조상군과는 달리 승상과 나무, 비천, 탑, 신장상과 같은 것들이 함께 새겨져 있어 부처님 세계를 표현하는 불화와도 같은 회화적 구성이 돋보인다. 이는 이 사방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며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북면에는 9층 목탑과 7층 목탑 사이에 천개를 쓰고 계신 여래좌상이 있으며 9층 목탑 위로는 여래에게로 향하는 비천상 2구, 양쪽 탑 아래는 인왕상을 상징하는 사자가 각각 한 마리씩 새겨져 있다. 서면에는 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양쪽 곁에 보리수로 보이는 나무가 있다. 또 여래의 머리 위와 왼쪽 허리쯤에도 비천이 새겨져 있다. 동면은 이 사방불 중 가장 화려한 곳으로 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이 각각 1구씩,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은 모두 7구가 새겨져 있다. 또 여래좌상의 머리 오른쪽 위에는 가릉빈가로 짐작되는 조각이 있다. 동면의 오른쪽 아랫부분에는 스님 한 분이 무릎을 꿇은 채 여래에게 차 공양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염불을 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있다. 동면의 왼쪽 끝 부분에는 보리수를 양쪽에 두고 선정에 든 스님상이 있으며 그 왼쪽 옆 독립된 바위에는 앉아계신 스님이 새겨져 있다. 동면에서 남면으로 에돌아가는 길의 바위에는 삼지창을 든 신장상이 있으며 불전함이 놓인 바로 앞 바위에 몸을 왼쪽으로 돌린 스님과 나무 한 그루가 새겨져 있다. 남면에는 삼존불이 오롯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오른쪽 끝에 보리수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우협시불 아래, 곧 석조여래입상 뒤로 보면 감실처럼 움푹 파인 곳에 나한 1구까지 햇살이 비쳐드는 모습을 보려면 오전 6시30분경부터 오후 4시 가까이는 머물러야 한다. 이곳에 새겨진 여래상은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그 형식의 유사성을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수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법의 속에 두 손이 감춰져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서면이 여래를 제외한 여래의 두광에 방광선(放光線)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 배치의 자유로움 그리고 남면 삼존불에서 보듯이 분방함이 어우러져 있으며 천개와 사자상, 나무 아래 선정에 든 승상과 같은 흔히 보지 못하는 조상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동쪽의 여래가 약사여래가 아니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조성연대를 짐작한다. 조성연대는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있지만 7세기에서 9세기 초에 이르는 사이일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신문 2329호/ 5월2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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