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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반동 마애조상군

막 물을 대기 시작한 논 때문인가. 경주의 새벽은 특유의 무게를 지닌 채 가라 앉아 있었다. 남산 언저리를 에돌아들자 남천(南川)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에 뒤덮인 망덕사지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얼굴처럼 가물거리고, 멀리 토함산 등성이로는 붉디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망연히 망덕사지로 올랐다. 신발은 이내 이슬에 젖고 주춧돌 곁에서 바람결에 흔들리던 보랏빛 제비꽃 두어 무더기가 순례자를 맞이했다. 그는 기둥과 전각을 잃어버린 것이 마치 자기 탓이라도 되는 양 수줍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다소곳한 자태에 취해 있던 나를 남산 언저리로 데려 간 것은 설익은 새벽바람이었다.

순례자 발길 뜸한 숲길서 ‘신비로운 장면’ 연출

바위에 선각으로 사리장엄구를 표현했다. 가운데의 불좌상이 곧 불사리를 상징하며 오른쪽의 나무는 보리수이다. 보개 끝에 영락을 달아 장식을 했다.

뭇없이 사라져간 안개가 머물던 들과 산의 풀잎과 나뭇잎들은 거침없이 내려 쪼이는 봄볕에 반짝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 풋것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일까. 탑곡(塔谷) 들머리를 향해 남천의 둑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남산은 묵은 잎과 새잎이 어우러져 가을 단풍과는 또 다른 정취를 내 뿜고 있었다. 걸을수록 마음이 활짝 열리는 순정한 봄기운이 가득한 길을 지나 다다른 곳은 마애조상군이다. 사리장엄구로 짐작되는 조각이 있는가하면 코끼리 상이 새겨져 있으니 그것은 사리를 이운(移運)하는 장면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이렇듯 쉽게 말할 수 있지만 1997년 봄, 처음 이 마애조상군을 대했을 때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내 깜냥으로는 도무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선명한 조각이라고는 바위의 동남면 오른쪽 끝에 새겨져 있는 전각과 보리수 그리고 전각 안에 앉아 계신 불좌상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외에는 그저 희미할 뿐 불상이나 보살상 그리고 목탑과 같은 조각을 더 찾기까지는 수도 없는 걸음을 나누어야만 했다. 마치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러시아의 목각인형 마트로시카(Matryoshka)처럼 바위 앞에 머물면서 뚫어져라 바라보던 어떤 날은 다행히 새로운 조각을 찾을 수 있었지만 허탕을 친 날 또한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숨은그림찾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대구에 갈 일이 있었다. 볼 일을 마치고 잠시 짬을 내서 국립박물관에 들러 유물을 살펴보다가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불교중앙박물관의 개관기념전에 전시되고 있는 칠곡 송림사(松林寺) 오층전탑 불사리장엄구(佛舍利莊嚴具)가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지금 내 앞에 있는 불좌상을 모신 마애 전각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위에 새긴 사리장엄구였으며 지붕인 보개(寶蓋) 끝으로부터 영락(瓔珞)과도 같은 장식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까지 똑 같았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다시 경주로 달려 와 마애조상군 앞에 섰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그때부터 경주에 가는 길이면 이 마애조상군에 방부(房付)를 들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애 전각이 사리장엄구를 표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자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었다. 너비가 8m에 이르는 바위의 왼쪽 끝에 새겨져 있는 목탑과 불보살들과의 관계가 의아했던 것이다. 그즈음 구한 자료에는 바위의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 코끼리 상이 있다고 했지만 눈에 쉽게 띄는 것이라고는 코끼리 눈으로 짐작되는 조각뿐이었으니 선뜻 동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곳에 새겨진 조각들은 부조가 아니라 모두 선각일 뿐 더러 바위 면조차 울퉁불퉁하여 난감했던 것이다.

짐작컨대 사리장엄구와 비슷한 전각이 새겨져 있고 코끼리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사리이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었다. 그러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을 이용해 사진을 찍어서 살펴보거나 멀리 떨어져 뚫어져라 바위를 바라봐도 도무지 코끼리의 형태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실측도나 탁본을 구할 수 없었으니 허망한 발길을 돌리기를 수차례, 아예 코끼리가 사리를 이운하는 장면을 눈에 익혀서 가기로 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사리봉영상(舍利奉迎像)과 지금은 하세가와의 모사도로만 남은 키질 제 22굴에 벽화로 그려졌던 석가모니 사리팔분도(舍利八分圖)를 프린트해서 들고 다시 바위 앞에 섰다. 그제야 볼 수 있었다. 어렴풋할 뿐이지만 머리를 목탑 방향으로 향하고 걸어가고 있는 코끼리가 분명 있었다. 네발이 모두 있으며 코는 높이 치켜든 채 바위의 왼쪽 끝, 불쑥 솟은 면에 새겨진 오층 목탑의 기단부 오른쪽에 잇대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2004년이었으니 처음 이 마애조상군을 대하고 7년의 시간이 이 흐른 다음의 일이다.

오층목탑 곁의 우협시불.

오층목탑 곁의 좌협시불.

마애조상군의 전경. 사리장엄구는 가장 오른쪽, 목탑은 가장 왼쪽 그리고 코끼리는 가운데에 베풀어져 있다.

오늘 다시 새소리만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이 마애조상군 앞에 서니 그때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찻길에서 불과 100m 남짓하지만 여전히 순례자의 발길은 뜸하여 숲길은 그대로이고 먼 곳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고즈넉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고 내 발밑이 가장 먼 곳인가. 순례자들은 하나같이 보물 제 201호인 탑곡 마애조상군으로만 달려 갈 뿐 이곳으로는 찾아들지 않으니 오히려 깊은 산 토굴과도 같아 편안하기만 한 것이다.

어느새 해는 중천으로 치닫고 바위 전체가 빛을 받기 시작했다. 조금씩 빛이 배어들수록 가장 오른쪽의 전각과 보리수로부터 보살입상 그리고 불좌상을 거쳐 이윽고 사리를 옮기는 코끼리가 환해지는가 하면 또 다시 불좌상과 목탑이 그 찬란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떼의 구름이 지나가면 낡은 영사기가 멈춰버린 변두리 극장의 화면처럼 어두워지곤 했다. 하지만 눈을 떼지 않고 기다리면 이내 다시 드러나는 숭엄한 순간들은 마음 속 깊이 각인되어 버려 말로는 다 토해 놓을 수 없는 신비로운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그 순간마다 내 눈길은 버릇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위를 더듬었다. 다 꺼냈다고 생각했던 마트로시카에서 또 다른 작은 인형이 나오듯이 미처 내가 찾지 못한 조각이 또 있을까 싶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을 앞세운 행동만은 아니다. 여느 마애조상군인들 그렇지 않겠나마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샅샅이 찾아보려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더욱 특별하다. 바위의 전체 높이가 얼추 3~4m에 이르고 너비는 8m에 달하는 면에 빼곡하게 베풀어진 조각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회화적 구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불사리의 상징인 탑을 향해 사리를 옮겨가고 있는 장면이 마치 그림처럼 베풀어졌기에 하나하나의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들 이 앞에 서면 나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야기는 가장 오른쪽의 사리장엄구인 것 같은 전각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겠는가. 그곳에 모셔진 불사리를 코끼리가 이운하여 가장 왼쪽의 목탑에 봉안하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새겨졌다는 것은 나의 지나친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어느 하나만을 보고 돌아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빙산을 다 봤다는 것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사리와 불탑은 곧 부처님의 진신과도 같은 것이니 늘 익숙하게 봐 오던 부처님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지 않다고 해서 이곳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흔히 대하지 못하는 부처님의 진신이기에 더욱 애틋하여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도 구름은 분주했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태양을 가리며 오가고 있으니 멀리 소나무에 기대어 바위를 바라보는 시간보다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기꺼운 것은 그 시간마다 불멸(佛滅) 후 사리팔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태양은 바위 면을 비껴 지나가고 그림자만이 드리웠다. 점심 공양조차도 잊은 채 바위만을 바라봤건만 배는 고프지도 않았다. 마음이 충만한데 그깟 배고픈 것쯤이 대수이겠는가. 아마도 이곳은 날마다 맑은 바람이 마애조상군 주위를 옹호게(擁護偈)로 청정하게 다스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사리게(舍利偈)로 불사리를 찬탄할 것이다. 해마다 봄날 흩날리는 산 벚꽃이 꽃 뿌릴레, 꽃 뿌릴레 염화게(拈花偈)로 산화락(散花落)을 노래하면 이윽고 꽃잎 가득한 그 길을 따라 불사리의 이운이 시작될 것이다.

꽃 피고 질 즈음, 올해도 어김없이 그렇게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 이곳에서는 불사리의 이운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가 성사 이차돈의 자취를 찾아 금강산 자락을 헤매며 꽃비 공양을 올리던 날, 찾는 이 드문 이곳에서도 꽃비는 무량하게 흩어졌지 않겠는가. 뒤늦었지만 보온병에 담아 온 차 한 잔 받쳐 들고 다게(茶偈)로 불사리에 공양을 올렸다. 두 번 절하고 일어서서 다시 엎드리자 내 마음은 불사리 앞으로 기껍게 흩어지고 눈물 한 방울이 봄비처럼 떨어졌다.기록문학가

■ 특징

상체가 잘려나간 불보살 입상. 삼존불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배반동 남산 자락의 보물 제 201호 탑곡 마애조상군으로 가는 길 들머리에 있다. 남천 둑길에서 탑곡으로 접어드는 삼거리에 월정사라는 절이 있고 그 뒷산으로 50m 가량 오르면 만날 수 있다. 1994년 지역 주민들에 의해 보고가 되었으며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마애조상군이 있다는 안내판조차도 없다.

바위의 가장 오른쪽에 사리장엄구를 표현한 전각이 있으며 가운데에 앉아계신 불좌상은 곧 사리를 상징한다. 보개의 양쪽 끝에 장식이 달린 줄이 늘어뜨려져 있으며 가장 오른쪽에 보리수나무가 표현되어 있다.

또 보개의 끝에 고대의 지붕 양식 중 하나인 치미가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전각의 왼쪽 아래로 불좌상과 입상 3구가 새겨져 있으니 찾아 볼 것이며 불좌상 위쪽으로 마치 천개(天蓋)와 같은 것이 새겨져 있으나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

천개는 바위의 가운데에서 위쪽이며 가운데에서 아래쪽으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 코끼리 발이 보이며 위로 눈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눈을 확인 할 수 있다. 눈 위로 다시 불좌상이 웃는 얼굴로 있으며 그 왼쪽이 오층목탑의 3층이다.

3층 지붕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면 다시 불좌상이 웃는 얼굴로 앉아 있으며 바위의 맨 아래쪽에서 목탑의 기단부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기단부의 오른쪽을 유심히 살피면 다시 불보살 1구를 볼 수 있으며 코끼리는 그 불보살 근처에서 위로 그 형체를 가늠할 수가 있다.

또 바위가 가장 뾰족하게 솟은 위쪽을 향해서 보면 목탑의 찰주 부분이 선명하게 보이며 목탑의 왼쪽을 돌아 바위의 남서 면에도 조각이 있는데 불보살 입상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하반신만 남고 윗부분은 잘려 나갔다.

전체를 모두 살피려면 오전 10시30분경부터 3시까지는 머무르는 것이 좋다. 근처에 남산에서 가장 온전한 불상인 보물 제136호인 미륵곡 보리사 석불좌상과 조성 연도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짐작되는 보물 제198호인 불곡(佛谷) 감실석조여래좌상도 있어 순례길이 더욱 빛날 것이다.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가서 4.5km 가량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울산으로 향하는 7번 도로와 만난다.

경주고속주유소를 끼고 우회전하여 1km가량 가면 오른쪽으로 통일전 팻말과 함께 샛길이 나온다. 그곳으로 접어들어 200m 남짓 가면 남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인 화랑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둑길로 들어서서 300m 가량, 보물 제201호인 탑곡 마애조상군 팻말이 있고 주차장이 있다. 그곳에 자동차를 세우고 월정사를 찾으면 된다. 주차장에서 마애조상군까지는 200m 남짓하다.

[불교신문 2327호/ 5월16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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