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삼성암터 마애약사여래입상 |
팔공산 자락에서 깨어난 새벽,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쪽빛 물을 들인 양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떠있지 않았고 쏟아지는 햇살은 거침없었다. 부인사(符仁寺)로 올라가는 길은 이른 아침인데도 달궈져 있었으니 절 마당에 들어서서 그늘부터 찾아야 했다. 절집은 근래에 중창불사를 마친 모양이었다. 전각들은 풋것의 자태를 뽐냈지만 나는 구태여 옛 주춧돌을 찾아 걸터앉았다. 그곳에서 펼쳐 든 것은 제불다천(諸佛多天)과 제불성현 삼십삼천(諸佛聖賢三十三天)에게 다시 판각하는 대장경판을 지켜 달라며 지은 ‘대장각판 군신 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이었다. 굳이 그것을 펼쳐 든 까닭은 1237년, 이규보의 나이 70에 지은 그 글에 부인사에 소장되었던 대장경 판본이 불타버렸다는 내용이 나온 때문이었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부처님 상호 오히려 친근” 글을 읽으며 절의 옛 모습을 되새기다가 몇 개의 주춧돌과 서너 개의 장대석 그리고 옛 탑과 석등을 어루만지고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부인사 담을 에돌아들자 이내 시멘트 길이 끝나고 오솔길이 이어졌다. 삼성암터(三省庵址)로 가는 그 길에는 짙은 나무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길섶에는 키 낮은 꽃들이 무수히 피었다간 이운 흔적이 흩어져 있고 나무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순한 고갯마루에는 큰 바위 두엇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단(蒲團)같이 두툼하고 둥근 바위에 나무그늘 드리우고 바람마저 머물고 있었으니 이 길 오가는 그 누군들 걸터앉지 않았을까. 이른 아침이어 아직 은밀한 기운 가시지 않은 산골짝의 나무에는 새들의 지저귐만 매달려 있었다. 그 맑은소리 머리에 인 채 정좌(靜坐)하고 앉았으니 정신까지 맑아져 몸은 한결 개운했다. 다시 걷는 오솔길, 좀 전과는 달리 숲은 향기를 품고 있었다. 더러는 스쳐지나가고 말아 그 근원을 알지 못했지만 어느 곳에서는 하얀 함박꽃이 붉은 꽃술을 보이며 웃고 있기도 했다. 그 꽃이 내 뿜는 긴 여운의 향기를 흠씬 들이마시고 걷던 나는 차마 발길 내 딛지 못해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팔공산 기슭의 삼성암터 마애약사여래입상. 암자 터에서 200m 가량 떨어진 봉우리의 바위에 새겼으며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다. 하얀 때죽나무 꽃이 오솔길을 가득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내 곁을 스쳐가는 바람은 마치 나를 종이삼아 사경이라도 하는 양 부드럽게 어루만졌으니 아, 길은 아름답고 나는 황홀했다. 더불어 마음은 환하게 열려 나를 어루만지는 바람보다 순해지고 말았으니 부처님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부처님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양촌(陽村) 권근이 쓴 ‘수놓아 만든 원불(繡成願佛跋)’이라는 글에 따르면, 조선 태종의 비인 정비(靜妃)가 태종의 건강을 위해 천불(千佛) 1축(軸)과 팔난(八難)ㆍ관음(觀音)ㆍ범왕(梵王)ㆍ제석(帝釋)을 각각 1축씩 수놓아 아름다운 원불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꽃길 또한 그에 견주지 못할 까닭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 떨어진 꽃이건만 행여 다칠세라 발끝을 곧추 세워 조심조심 지나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겨우 발을 편히 내딛는가 싶어 마음 풀면 꽃길은 또 다시 이어졌으니 환희로움에 두 팔 벌려 길을 감싸 안을 뿐 벅찬 가슴을 추스를 겨를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마와 등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었지만 눈과 마음은 꽃길과 꽃향기에 젖어버렸으니 이제 무엇을 본들 아름답지 않을까. 그러나 어느덧 꽃길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단정한 텃밭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 거적을 덮어 비를 가리고 합판으로 바람을 막은 토굴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대장각판 군신 기고문’ 인연 부인사 인근 때죽나무 꽃 뒤덮은 오솔길 순례자 반겨 전기 들어오지 않는 곳 노보살 30년 외호 삼성암지였다. 옛 터에 누군가가 토굴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노보살 한 분이 “일찍 올라 오싯네”라며 반겼다. 그 보살이 토굴의 주인이었다. 49세에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는 한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그이 덕인가. 토굴 주위에는 덤불이며 웃자란 풀조차도 볼 수 없을 만큼 단정했다. “이 많은 풀을 보살님 혼자 다 베셨어요?”라고 묻자 “그라마 이거를 누가 베겠소, 부처님 도량인데 지저분하이 그냥 놔 둘 수는 없꼬, 혼차 이 넓은 거를 다 할라카이 이래 맥아리가 없는 거 아이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른 아침인데도 그이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어떻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까지 들어 와 그토록 오래 머무셨냐고 물으니 그저 부처님 따라 왔다고 할 뿐 말을 아끼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 산에서는 무슨 일로 소일하며 지냈느냐고 하니 산에 처음 들어 왔을 때는 날마다 미친 듯이 산을 쏘다녔단다. “이 짝에 서봉이며 동봉 이런 데를 안방 문턱 넘어 댕기듯이 날마다 댕깃지, 요새는 인자 80이 가까우니 힘이 부치서 못가지 한 5년 전만 해도 산에를 안 갔다 오면 종일 몸이 다 찌부둥해서 빙이 나고 그랬는데….” 왜 그렇게 산을 쏘다녔느냐고 물으니 빙긋이 웃고만 있다가 먼 산을 바라보더니 “바람 잡으로 댕깃지, 산에 바람 말고 잡을끼 또 뭐 있는가” “아니 부처님 따라 산에 들어 왔다면서 부처님은 놔두고 바람만 잡으러 댕기면 이것도 아이고 저것도 아이네” “허, 이 사람아, 산에 들어 와 살아 봐, 산에 있으면 바람도 부처님이고 부처님도 바람이네 그려. 부처님 뵈러 왔으면 어여 올라가 봐, 늙은이 하고 뭐 할 이야기가 있는가. 나는 글도 몰라 경도 못 읽는 늙은인데…, 어제는 풀 벤다꼬 올라가 보도 못했는데 지저분하면 젊은이가 좀 치워 주소. 참배 온 사람들이 치워 놓고 갔으면 다행이고….” 허물어진 암자에 지은 초라한 토굴이며 스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도량이 아닐까. 부처님 계신 곳 30년 동안 쓸고 닦았으며 비록 글 모르지만 호된 마음공부 길 거쳐 나온 노보살 아니었으면 어디에서 또 이만큼 정갈한 부처님 자리 만날 수 있을까. 그 마당에 펼쳐 놓은 평상에 앉아 보살과 나눈 몇 마디 말이야 말로 ‘삼선(三禪)의 혀’가 만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부인사를 에돌아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 이미 초선(初禪)이요, 꽃길 앞에서 숨이 멎을 듯 모든 움직임 그쳤을 때가 이선(二禪)이었으니 말이다. 삼성암터 마애약사여래입상은 바위 자체가 기울어져 있어 보존대책이 요구된다. 그만 부처님 계신 곳으로 향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샘에서 목을 축이고 올려다보니 아침 햇살이 부처님 새겨진 바위에 가득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부처님 앞에 다다라서도 온전한 눈길로 그를 우러르지 않았다. 다만 향을 사르고 석가께서 구시라(拘羅)에게 가르쳤다는 참선법인 관비단백(觀鼻端白)에라도 든 양 단좌(端坐)한 채 타오르는 향연을 바라 볼 뿐이었다. 너덧 자루의 향이 타고 스러져 재만 남았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눈을 감았고 향연이 그치면 다시 향을 사르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저 고요한 마음에 들릴만한 소리로 묘연화(妙蓮花)를 암송했다. 그리하여 삼마지(三摩漸)에 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서툰 순례자는 마치 송추비구라 불렸던 주리반특가(周利盤特迦)와도 같았다. 석가께서 헛된 마음에 들어 찬 것 모두 잊어버리라며 “빗자루로 쓸어버리라”는 말을 가르쳐 주자 ‘빗자루’를 떠 올리면 ‘쓸어버리라’는 말이 기억나지 않고, 겨우 뒤 구절을 기억해 내면 ‘빗자루’를 잊어버리던 그이 말이다. 하지만 그이는 석가께서 선을 가르치자 안거에 들어 깨달음을 얻어 훌륭한 제자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우매한 순례자는 삼마지에 들기는커녕 묘연화 조차 제대로 외우지를 못해 앞을 짚으면 뒤를 잃고 겨우 뒤를 찾으면 앞이 간 곳이 없었다. 그렇게 잃었다가 되찾고 다시 잃어버리기를 서너 차례, 고요했던 마음은 흐트러져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대장각판 군신 기고문’을 지었던 이규보는 늘그막에 경서(經書) 공부를 그만두고 〈능엄경〉을 공부해 밤에 누워서도 욀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불 속이 바로 도량이라고 했으니 이 부끄러움을 어찌 할 것인가. 감히 연화(蓮花)를 잡고 다다르리라 기대했던 사선(四禪)의 경계가 바람에 흩어져 사라지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언감생심이었다. 연화가 선연히 눈에 보이고, 천엽(千葉)이 꿈속에서도 환하다는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의 언저리나마 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욕심이 지나쳤던 것이다. 그곳이 그처럼 쉽사리 다다를 수 있는 경계라면 누군들 부처님 앞에 나아가지 않겠는가. 내가 혼돈에 휩싸여 있는 사이 태양은 쉼 없이 움직여 나에게 드리웠던 소나무 그늘마저 지워버렸으니 그만 떠나라는 소리 같았다. 홀연히 마음을 접고 산 아래로 향했다. 때죽나무 꽃길마저 풋내기 순례자를 배웅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슬펐으리라. 그러나 되짚어보면 꽃길과 향기는 나의 집중을 흩어놓은 마등가녀(摩登伽女)의 딸 발길제(鉢吉帝)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 길을 걸으며 이미 부처님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으니 정작 부처님 앞에 다다라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막혔던 것이리라. 그러나 외물(外物)에 흔들린 것은 내 마음이니 어찌 저토록 아름다운 꽃길을 나무랄 것인가. 아직 산길에서 묻혀 온 때죽나무 꽃향기가 채 사라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 마애여래좌상 특징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의 삼성암 터 마애약사여래불은 유형문화재 제 21호로 지정되었다. 암자는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며 지금은 보살 한 분이 토굴을 지어 놓고 부처님을 보살피고 있다. 부처님은 삼성암 터 뒤로 나 있는 계단으로 200m 가량 오르면 만날 수 있는데 특이하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본디부터 기울어진 바위에 새긴 것은 아니며 부처님을 새긴 바위가 갈라지며 지금 모습으로 기운 것이라고 한다. 신무동 마애여래좌상. 바위의 모양 때문인지 좌상이 아니라 입상으로 새겼으며 상호 부분은 뚜렷하게 알아 볼 수 있다. 머리는 소발에 두툼한 육계가 솟았으며 가슴께에 U자형의 법의가 표현되어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음을 알 수 있다. 오른 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법의를 감싸고 있으며 왼손은 복부 부분에서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몸에 비해 상호 작아 ‘어색’ 무릎까지는 U자형으로 법의가 표현되었지만 그 아래로는 조각이 희미하여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는 풍화의 탓도 있겠지만 부처님을 새길 당시부터 간략하게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바위가 기울어졌다고는 하지만 부처님을 바로 세워서 봐도 서 있는 모습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상호가 왼쪽으로 갸우뚱한 고갯짓을 하듯 기울어져 있어 친근함이 더한다. 조성연대는 통일신라의 양식을 이어 받은 고려초기로 짐작된다. 신무동 마애여래좌상은 유형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되었으며 큰 바위의 한쪽 부분을 빌려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높이가 채 1m가 되지 않는 아담한 크기의 마애불이며 바위면을 다듬어 얕은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조각되어 있다.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으며 연화좌대 위에 앉아 있다. 조각은 섬세한 편에 속하나 몸에 비해 상호의 크기가 너무 작아 전체적으로 어색하다. 조성 시기는 고려 초에서 중기로 이어지는 즈음으로 짐작된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동대구 나들목 못 미처 도동에서 포항방면으로 길을 갈아타고 팔공산 나들목으로 나가면 된다. 불로동을 지나 동화사 방면으로 향하는데 팔공산 이정표를 따라가면 길을 놓칠 염려는 없다. 부인사는 동화사 근처 온천지구에서 가까우며 삼성암터 마애약사여래입상은 부인사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 두고 걸어야 한다. 부인사 오른쪽 담을 끼고 시멘트 길을 300m 가량 오르다가 왼쪽으로 난 오솔길에 이정표가 있다. 마애불까지 30~40분 남짓의 평탄한 등산로이다. 신무동 마애여래좌상은 부인사에 칠곡, 송림사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200m 가량 가면 길 왼쪽으로 작은 이정표가 보인다. 길가에 자동차를 세우고 아래를 보면 구룡사라는 신축 사찰이 보이고 그 마당에 있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불교신문 2336호/ 6월20일자] |
'불교유적과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공산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염불암 마애보살좌상 (0) | 2008.04.19 |
---|---|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비로봉 마애약사여래상 (0) | 2008.04.13 |
경주 남산 칠불암마애여래석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0) | 2008.03.29 |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륜대좌불 (0) | 2008.03.29 |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0) | 2008.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