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칠불암마애여래석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맞다. 그랬어야 했다. 아예 발을 들여 놓지 말았어야 했다. 곁에 있거나 말거나 못 본체고개를 돌리고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갔어야 했다. 차마 매몰차게 돌아서지 못하여 두어 군데만 들렀다가 떠나리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수렁에 빠진 것처럼 헤어나지 못하게 되고 말았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경주의 남산에 호되게 발목을 잡힌 나는 오늘 새벽도 하릴없이 오솔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풋내기 순례자라지만 어찌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을 하겠는가. 속박이어도 마음은 즐겁고 걸음은 경쾌하기 짝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염불 마저 잦아든 곳 … 일곱 부처님 미소로 반겨 동남산 깊은 ‘봉화골’ 칠불암 … 경석편 다수 출토 구름 문양 좌대서 ‘아래’ 굽어 보는 신선암 마애불 먼산으로부터 너울대며 다가드는 송도(松濤)는 수묵의 농담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간 짙어지고 해도 솟지 않았는데 벌써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맙게도 산길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계류에 얼굴을 들이대면 몸 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번쩍 깨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흐르는 물기를 닦지 않은 채 너럭바위에 앉아 바람에게 얼굴을 맡겼다. 칠불암 마애석불이다. 뒤의 삼존불은 하나의 광배 안에 삼존을 모신 일광삼존불의 형식이며 앞의 작은 바위에는 사방불을 새겼다. 사진에 보이는 사방불은 남면과 서면의 여래상이다. 바람은 마치 세필(細筆)로 쓰는 초서(草書)와도 같이 섬세했다.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나름대로의 운율을 지니고 있던 바람, 그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질 때 마다 뒤척인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 그 부드러움과 자재함을 만끽하느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자칫 부처님을 찾아 떠난 순례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 자리에서 바람의 붓놀림에 몸을 맡긴 돌이 되어도 좋았으리. 나무인들 어떻겠는가. 계류가 되어 순한 새벽바람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무와 바람 그리고 계류와 노니느라 한 시간이면 족할 거리를 세 시간이 넘도록 걸렸다. 잠시 다리쉼을 하고 가파른 시누대숲을 빠져나가자 일곱 부처님이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계셨다. 풍경소리 그치고 염불소리 마저 잦아든 곳에는 이제 막 비쳐드는 햇살을 받은 일곱 부처님이 머금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으니 곧 묵소(默所)였다. 조선 중기를 치열하게 살다 간 계곡(谿谷) 장유(1587~1638)는 병중에 한가롭게 쉴 때면 떠오르는 세 가지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마음에 맞는 화가를 만나지 못해 그림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마음이 앞 서 찬(贊)부터 지었다. 그의 문집인 〈계곡집〉에 전하는 ‘삼화찬(三贊)’이 그것인데 첫 번째는 공자가 행단(杏壇)에 올라 제자인 안회(顔回)가 오현금(五絃琴)을 타고 증점(曾點)이 거문고를 타는 장면을 바라보는 것이요. 두 번째는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이야기로 남곽(南郭)이 궤안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이다. 남곽은 궤안에 기대어 하늘을 우러러 보며 멍하니 탄식하다가, 자기 신체의 짝인 마음을 잃어버린 듯 했다고 전한다. 마지막 세 번째 그림은 비로거대(毗盧踞臺)이다. 그가 남긴 찬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저 자리 앉은 이(彼當座者) / 부처라 할지 악마라 할지(是佛是魔) / 둘러싸고 있는 저들(彼圍者) / 일(一)이라 할지 다(多)라 할지(是一是多) / 악마든 부처든 본래가 공하거니(魔佛本空) / 일이든 다이든 무슨 상관있으리오.(一多何知) / 비로자나(毗盧遮那) / 그 진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眞身在玆).” 비로거대란 곧 견불거대(見佛踞臺), 곧 천광대(天光臺)에 앉아계신 부처님을 일천불(一千佛)이 둘러싸고 있는 장면을 말하는 것이다. 유자(儒者)인 그가 유불의 경계를 넘어 그리워했던 장면,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천불이 되지 않으면 어떠랴, 비록 일곱 분 부처님일 뿐이지만 그윽하게 눈을 감으면 이미 내 정신과 넋은 공중문법(空中聞法), 허공에서 만나고 흩어지면서 부처님의 법음을 듣고 있는 것을…, 장유 선생 또한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가 유자일지언정 병중에 누워 비로자나 곧 법신불을 보았으니 그가 〈능엄경(楞嚴經)〉을 공부하며 수행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엎드려 절하며 예를 갖추고 나무그늘에 앉은 지 한 시간이 지났건만 부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은커녕 오가는 사람조차 없으니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낯선 이를 구경삼아 날아온 새들의 지저귐만 호들갑스러울 뿐 그마저 그치고 나면 또 다시 적막이었다. 장유 선생은 스스로 자호(自號) 하기를 묵소(默所)라 했는데 그 까닭은 “온갖 묘함이 나오는 근원(衆妙門) / 침묵만한 것이 없으리로다.(無如默) … 도는 침묵 통해 성취되고(道以默而凝) / 덕은 침묵 통해 길러지며(德以默而蓄) / 정신은 침묵 통해 안정되고(神以默而定) / 기운은 침묵 통해 축적되며(氣以默而積) / 언어는 침묵 통해 깊어지고(言以默而深) / 사려는 침묵 통해 터득되며(慮以默而得) / 형식은 침묵 통해 덜어지고(名以默而損) / 내용은 침묵 통해 불어나네.(實以默而益)”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그대 입을 다물어라(而喙) … 그대 정신 수습하여(斂而靈) / 공허한 경지에 놔두게나.(光藏沖漠) / 깊고 깊은 연못 속 외물(外物)에 동요되지 않나니(九淵沈沈外不蕩) / 그대의 삶 텅 비우면 만물을 포용하리라.(虛而生明涵萬象)”고 하고 있다. 이것이 선(禪)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던가. 더구나 그는 홀로 있을 때일지라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어두운 저 구석을(屋漏在彼) / 내 스승 삼으리라(吾以爲師)”고 하고 있으니 수행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자세를 지녔던 분이다. 두어 시간, 장유 선생을 떠 올리며 부처님에게 숙였던 머리를 털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흙이라고는 없는 바윗길의 연속이었다. 5분이나 올랐을까. 안계가 툭 터지고 갓 모내기를 한 배반동 들판은 푸르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아련한가하면 멀리 토함산 능선이 유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조금 전 머물렀던 칠불암은 발아래에 까마득하고 그 위태로운 곳에서 큰 바위를 그러안고 돌아들자 그곳에 또 한 분, 보살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신선암 마애보살상. 신선암의 암팡진 보살상, 그는 천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산 높은 곳에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련만 여여한 모습으로 선정에 잠겨 있었다. 그 앞에서 향을 사르며 조심조심 예를 갖출 뿐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도 앉았다. 그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눈을 감고 말과 생각의 뿌리조차 깡그리 거두었다. 일렁거리던 안화가 사라지자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왔으며 눈을 떠도 어둠이요, 감아도 어둠이었다. 다시 향을 사르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감은 눈이지만 차츰 앞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으로 궁구하는 것이 맑게 사무치면 정신이 고요해져 능히 그 무엇도 볼 수 있다고 하더니 이것이 그것인가. 그로부터 너덧 자루 향을 더 사를 뿐 결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해가 머리위로 넘어가 얼굴에 그늘이 드리울 때 까지 부동의 모습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거대한 생각도 없었고 위대한 꿈도 마련하지 않았다. 논리도 세우지 않았으며 사유도 그쳤었다. 마치 위대한 양 호들갑을 떠는 미술사도 팽개쳤고 문학은 주머니 속에 꿍쳐 두었다. 다만 내가 붙든 것은 한줄기 바람이었다. 풀잎이 바람에 휩쓸리며 써 놓는 초서와도 같이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되는 것은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써 놓은 몇 줄 글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선명하지 않았다. 각인되어 있기는 하되 보이지 않았으며, 어떤 글자인지 알고는 있으되 옮길 수가 없다. 기억의 끝을 붙잡고 그것을 되살리려 하기보다 차라리 장유 선생의 글 한 줄을 읽었다. “거울에 때 끼어 밝지 않아도(鏡垢不明) / 원래가 밝지 않은 물건 아닌 만큼(未嘗無明) / 때를 없애고 나면 다시금 밝아지고(垢去則明) / 물이 흐려 맑지 않아도(水渾不淸) / 원래가 맑지 않은 물건 아닌 만큼(未嘗無淸) / 흐린 물 정화하면 다시금 맑아지네.(渾澄則淸) 그대의 때 제거하고(去而之垢) / 그대의 흐림 정화하면(澄而之渾) / 거울보다 밝고 물보다 맑은 그것(則有明於鏡而淸於水者) / 본디 모습 되찾아 참된 삶 보전하리.(復其天而全其眞乎)” 이것이 장유 선생이 깨달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지식들이 묻지 않던가. 옛 거울을 닦지 못했을 때는 어땠고(古鏡未磨時如何), 그것을 닦고 난 다음에는 어땠냐(磨後如何)고 말이다. 그것을 알면 눈 뜬 사람이요, 미처 깨닫지 못했으면 아직 눈 뜨지 못한 것이라 했으니 그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바람이리라. 바람은 결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법이 없지 않던가. 그를 보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통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니 바람의 거울이 바로 천지간에 가득한 삼라만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먼 산 능선이 노을로 물들고 사위에 어둠에 내릴 무렵에야 가부좌를 풀고 눈을 떴다. 종일 부처님 곁에 머물렀다. 그것도 여느 때보다는 훨씬 많은 수의 부처님이 곁을 맴돌았지만 나에게 부처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바람이 나에게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종일 바람과 함께 있었으며 내 곁에 그가 머물렀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형체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 또한 그럴 것이다. 산길은 이미 어두웠고 마음은 적정(寂靜)했으나 스쳐가는 바람에게서 봄인데도 삽삽(颯颯)한 냄새가 났다. ■ 특 징 “칠불 … 석굴사원 안에 모셔졌을 가능성 있어” 삼존불의 우협시는 관음보살이며 오른손에 정병을 들었다. 사방불은 동면과 남면의 여래이다. 봉화골(烽火谷)은 동남산의 깊은 골짜기이다. 그 끝닿은 곳에 칠불암(七佛庵)이 있다. 칠불암이라는 명칭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일곱 분의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가 있으므로 근래에 들어 세운 암자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삼존불의 우협시는 관음보살이며 오른손에 정병을 들었다. 사방불은 동면과 남면의 여래이다. 1940년, 부처님 근처에서 경석편(經石片)이 출토되기도 했으나 그 중 하나에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새긴 것으로 확인 되었을 뿐 사명(寺名)을 알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근처에 탑의 지붕돌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발굴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칠불암의 일곱 부처님(보물 제 200호)은 하나의 광배 안에 세분의 부처님을 모신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의 형태를 거대한 자연석에 새긴 삼존불과 그 앞에 다시 독립된 사각형의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일광삼존불을 마애불로 새기는 경우는 통일신라시대 전인 8세기에 나타나는 형식이다. 자료사진에서 보는 경주 벽도산의 두대리 마애삼존입상(보물 제 122호)이 같은 형식이며 서악동 선도산의 아미타삼존불상(보물 제 62호)도 같은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조각은 흔하게 볼 수 없는 고부조(高浮彫)이며 항마촉지인을 한 본존불은 민머리에 당당하며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다. 우협시는 관세음보살이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다. 좌협시는 오른손에 보상연화(寶相蓮花)를 들고 있으며 양쪽의 협시보살 모두 본존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다.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뒤로 올라가보면 전각을 세웠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으며 이는 이 칠불이 석굴암과 같은 석굴사원 안에 모셔졌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선암 마애보살상(보물 제 199호)은 바위 전체를 깎아 감실처럼 다듬고 그 안에 보살상을 새겼다. 보살은 구름문양의 대좌 위에 앉아 있어 마치 높은 하늘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구름 위에 다시 대를 놓았으며 한 쪽 다리는 구름 위로 늘어뜨렸으며 다른 한 발은 대 위에 올려놓은 유희좌(遊戱座)이다. 조성 시기는 칠불암 마애석불 보다는 늦은 8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한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가서 4.5km 가량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울산으로 향하는 7번 도로와 만난다. 경주고속주유소를 끼고 우회전하여 1km가량 가면 오른쪽으로 통일전 팻말과 함께 샛길이 나온다. 그곳으로 접어들어 직진하여 통일전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남산동 쌍탑과 전(傳)염불사지를 지나 한 시간 남짓 오르면 된다. 이 지 누 / 기록문학가 [불교신문 2334호/ 6월13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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