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남원에서 운봉이나 함양으로 가는 길목인 여원치에 있는 마애불이다. 마을 사람들은 ‘할미’라고 부르고 있으며 전각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전각을 중수하며 새긴 비문이 사진 오른쪽에 보인다.
티끌 하나 없는 하늘이 빚어내는 노을은 순례자의 헛헛한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할 만큼 찬란했다. 그러나 전각이 허물어진 절터의 우뚝한 탑에 기대서서 넋을 놓아버린 까닭은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색으로 물든 하늘 때문은 아니었다. 하늘이 점점 짙은 남색으로 바뀌어 갈 무렵 초롱초롱한 푸른 눈매로 나를 바라보던 그믐달의 자태 때문이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한기가 절터를 에워쌌지만 찬 기운이 더해질수록 달은 더욱 빛났으니 차마 곁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언제 긴 밤이 지났는지 멀리 새벽놀이 벌겋게 물드는 창가에 서서 어제 밤, 만복사터에서 바라보던 달을 추억하다가 길을 나섰다. 그러나 여원치(女院峙)로 향하는 동안 놀은 어디로 흩어져버렸는지 어느새 흰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버렸다. 냉큼 오른 고갯마루에 자동차를 세우고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묘한 소리에 발길을 붙들리고 말았다. 마치 싸락눈이나 소나기가 쏟아지는 소리와 같은 것이 아련히 들렸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예전 원(院)이 있었던 빈 터를 지키는 늙은 서어나무가 쌀쌀한 기운을 못 이기고 잎을 털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부처님은 그 나무 뒤의 바위에 새겨져 있으니 밤새 낙엽 지는 소리에 잠이라도 이루었을까 싶을 만큼 분주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향 한 자루를 사르고 뒤돌아 앉아 낙엽 지는 모습을 보거나 갓 떨어진 낙엽들을 밟으며 서성일 뿐 부처님을 향하지 않았다.
졸저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의 법천사터 편에 “부처에게로 가는 사람, 누군들 상처 없는 이가 있겠으며, 또 그에게로 가서 그 상처마저 아름답게 아물지 않을 이가 또 누가 있을 것이냐”고 썼지만 이곳 여원치의 부처님에게만은 그 말이 소용이 없다. 그는 이미 스스로 상처투성이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를 찾는 사람들 모두 마음을 모아 부처님을 어루만지며 그 상처를 보듬어야 할 것만 같은 것이다.
<사진설명>상처투성이의 마애불은 비록 깨지긴 했지만 고려시대의 솜씨 좋은 석공이 새긴 것이다.
나라 안을 골골샅샅 톺아보며 마멸되어 스러져 그 형체마저 알 수 없이 존재감만을 지니고 있는 부처님 앞에 선 적이 한 두 번이겠는가. 그러나 여원치 부처님 앞에만 서면 마음이 더욱 스산해져 가눌 길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너무도 뚜렷한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아예 가늠하기조차 힘든 지경으로 마멸 되어버렸다면 이처럼 처연하지는 않으리라. 도대체 반이나 잃어버린 얼굴을 하고 미소를 짓고 있으면 그 앞에 선 나는 어쩌란 말인 것인지, 또 다시 먹먹해져 오는 가슴에 낙엽 두엇 떨어져 스치고 지나갔다.
그 때문인가. 나는 이 부처님이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해 내려오는 설화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새겨진 비문이 곁에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동의를 한다. 하지만 그 비문은 조선 고종 5년인 1901년에 새겨진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조성되고 난 후 최소 500여 년이 지난 뒤 운봉현감이었던 박귀진(朴貴鎭)이 부처상 앞의 전각을 중창하면서 운봉읍지라고 할 수 있는 <운성지(雲城誌)>에 전해오는 내용을 간추리고 자신의 감상을 덧보태 놓은 것이다.
심한 마멸에도 웃고 계신 모습…내 마음 뭉클
마애불 함부로 이전…중생들의 홀대 안타까워
그 내용 중 짚어봐야 할 것은 박귀진이 바위에 새겨진 상(像)을 보고 느낀 것을 스스로 말하는 감상인데 바위에 새겨진 상이 곧 여인이며 산신(山神)이라는 것이다. 물론 운봉읍이 지리산이라는 큰 산 아래에 있는 고을이며 지리산 자체가 노고(老姑)나 마야고(麻耶姑)와 같은 여신들의 산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연한 불상을 산신으로 그리고 도고(道姑)라는 노파의 여상(女像)으로 까지 보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다.
박귀진은 고개이름이 여원이라고 된 것은 “길가의 돌 앞면에 여인의 모습이 음각(陰刻)되어 있는 데다 각(閣)이 덮여져 있고 깨진 기왓장과 주춧돌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끼가 두텁게 내려앉은 불상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내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완연한 산신의 진면목을 보는 듯 했다”며 감탄하듯이 비문을 썼다.
대개 이런 일들은 전해오는 설화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또한 다르지 않다. 그 내용인즉 이렇다. 고려 우왕(愚王) 6년인 1380년, 부산을 시작으로 함양을 점령한 왜구들이 운봉에서 가까운 인월까지 쳐들어왔다. 조정에서 이성계를 이 지역으로 내려 보내 고을을 지키게 하였다. 그가 남원에서 운봉으로 진격하는 길에 여원치에 다다랐는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니 노파 하나가 나타났다. 도고라는 그 노파가 이성계 장군에게 왜구들과 싸울 전략이나 싸울 장소와 같은 것을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는데 과연 그 노파의 말대로 하여 연승하며 왜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에 이성계는 여원치 정상에 진을 치게 한 그 노파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고갯마루의 바위에 노파의 상을 새기고 전각을 지었으며 산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여상이 오른손을 들어 가슴을 가리고 있는 것은 그 노파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왜장이었던 아지발도(阿只拔都)가 함양에 살던 그녀의 젖가슴에 손을 대며 희롱하므로 칼로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쳐서 잘라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눈앞의 상은 불상조성의 요소를 모두 갖춘 엄연한 여래상이며 그렇기에 더구나 여상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느 불상보다는 얼굴이 풍만하고 몸집 또한 살집이 넉넉하며 또렷한 입술과 신체에 비해 작게 표현된 손과 같은 것들이 여성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 자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운봉에서 인월로 나가는 길에 그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을 뿐 더러 여원치 근처에는 병사들이 주둔했던 것을 암시하는 병막동(兵幕洞)과 같은 지명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성계는 여원치 전투의 승리로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된 인물이다. 그 후 마을 원로들이 이성계와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발길이 닿은 여원치의 전투를 미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왕이 자신의 고장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고장은 자부심을 느낄만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마애불을 원용(援用)하여 설화를 완성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곧 깊은 산골에서 불교가 민간신앙과 만나는 과정에서 민간신앙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조금 엇나가기는 했지만 마을사람들이 자신의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겼으며 그로인해 여태 보호받았을 터이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닌가. 거기에 비하면 여원치에서 내려와 찾아가는 주천면 호기리의 마애약사여래좌상은 더욱 불행한 경우이다. 남원-주천간 도로확장으로 인해 이주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씁쓸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다. 마애불이란 움직일 수 없는 부동산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붙박이로 새겨져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갈 수 있는 동산과 같은 불상과는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애불은 그것 자체로 불교의 성보유물이기도 하지만 새겨진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사회상과 같은 것을 아울러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호기리 마애여래좌상.
그러나 고도로 산업화가 이루어진 첨단사회이자 집단이기주의가 난무하는 21세기에서는 그것조차도 옮기고 말았다. 그나마 다른 지역이 아니라 바로 이웃한 곳이기는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라. 마애불이란 불상 그 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위치해 있는 산과 바위의 크기 그리고 불상의 규모에 따라 사뭇 다른 느낌이 나는 것이다. 더구나 마애불임에도 그것이 위치해 있던 본디 자리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는 것은 마애불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화.역사적 가치까지 상실하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부처님은 기어코 옮겨지고 말았다. 아무리 지정문화재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지역주민들에게 홀대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옮겨지면서 근사한 전각을 얻었지만 억지 춘향 같아 보여서 오히려 슬퍼 보인다. 더구나 한심한 것은 마애불을 떼어내어 옮기는 전대미문의 일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넓힌 도로에는 자동차로 빼곡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텅 비어 있으니 무슨 일인가.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옮기는 과정에서 발견된 3단의 연화대좌는 왜 또 다시 가려 놓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부처모퉁이라는 제자리에 있을 때에도 그 대좌는 흙속에 묻혀 그것이 새겨져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옮기는 과정에서라도 드러나게 했어야 마땅한 일이거늘 가려 놓았으니 누구의 안목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래저래 오늘 하루는 마음이 스산하기만 했다. 그것은 가을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부처님들을 어루만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지누 기록문학가
■남원의 두 부처님은…
남원 여원치 마애불 여성山神 주장…실제론 여래상 근접
호기리 마애여래좌상 상호부분 마멸 심각…윤곽만 어렴풋
여원치 마애불은 유형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북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여원치 고갯마루에 있다. 여원치는 남원이나 운봉 그리고 경상도인 함양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며 고갯마루에는 원(院)이 있었다.
해방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원치를 넘는 길은 마애불 앞으로 나 있어 남원 장을 오가던 마을사람들은 물론 장꾼들도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고갯마루 권포리로 들어가는 길가의 대여섯 집이나 될까 싶은 장동(獐洞)마을의 어른들은 아직도 마애불을 ‘할미’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는 2.42m에 달하는 마애불은 머리와 오른쪽 얼굴의 눈이 있는 쪽이 깨졌으며 왼쪽 팔은 잘려 나갔다. 또 오른손의 손목에서 팔꿈치까지는 떨어져 나가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각은 지방 석공의 솜씨치고는 제법 훌륭하다. 그러나 배아래 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어 조각이 더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어 입상인지 좌상인지 구분이 모호한 상태이다.
얼굴부분은 얕은 부조로 새겼으며 머리 위에는 두 겹의 두광이 에워싸고 있다. 왼쪽 눈썹 아래로 희미한 눈은 길고 가늘게 찢어졌으며 코와 입술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양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선각으로 새겨진 법의는 통견이며 아래로 내려 갈수록 희미하여 없어지므로 혹시 땅에 파묻힌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조성연대는 고려 중반 이후로 보이며 마애불 앞에는 전각을 받쳤던 주초석 2개가 나란히 놓여있으며 바위 끝에는 운봉현감이었던 박귀진이 마애로 새긴 비문이 남아 있다.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 부처모퉁이에 있던 마애여래좌상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상호는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마멸되었으며 대략적인 윤곽만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불상 전체의 안정감은 빼어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였으며 결가부좌한 아래로 동화사 일주문 옆이나 하남 태평2년 명 마애약사여래좌상과 같은 3단의 연화대좌위에 앉아 있다. 그러나 그 앞으로 바투 붙여 불단을 조성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성연대는 나말여초까지 올라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찾아가는 길
남원 시내에서 운봉으로 향하는 24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여원치 정상에 다다르면 장동마을이 있다. 그곳에서 되짚어 남원방향으로 100m 가량 오다가 보면 왼쪽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입석 하나가 서 있다. 그곳에서 자세히 살피면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희미하다. 길을 따라 150m 가량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여원치 마애불이 보인다. 호기리 마애여래좌상은 남원 시내에서 주천면으로 향하는 730번 지방도로를 따라 간다. 5분 정도 가면 왼쪽으로 용담사가 있고 1~2분 정도 더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작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불교신문 2376호/ 11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