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 |
주자(朱子)의 사위인 황간(黃幹)의 제자이며 경의(經義)에 밝았던 쌍봉 요로(饒魯)가 <논어>에 소주(小註)를 단 것 중에 ‘허공중벽색(虛空中塞)’이라는 것이 있다. 벽색은 벽적(積)과도 같은 말이어서 연이어 덮쳐 쌓이는 것을 말한다. 그런가하면 선가에는 ‘허공부잡안(虛空不眼)’이라는 공안이 있다. 그것은 허공이 눈짓이라도 하더냐는 말이며 당의 숙종황제에게 혜충국사가 물은 말이다. 761년 황제의 초청으로 궁중법회를 열던 중 황제는 끊임없이 국사에게 질문을 했으나 국사의 입은 요지부동일 뿐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운해 群舞위 부처님의 세상 보여주다 바위 박차고 나와 선경 즈려밟고 나갈듯한 모습 구름 위 청정의 허공, 부처님 모습과 맞닿아 있어 황제인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은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황제가 혜충국사를 나무라자 국사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저 허공을 보십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허공이 폐하에게 눈짓이라도 하던가요?” 하고 말이다. 허공은 원만구족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평등할 뿐 그 어떤 것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공은 이미 불법이 충만한 세계이다. 진여자성의 묘를 깨우친 불성이 가득 넘쳐나는 그곳 말이다. 그런데 오늘 깜깜한 새벽을 달려 다다른 곳이 바로 그렇다.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하나의 허공이되 그곳에서 벽색과 부잡안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으며 부처님은 다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실 뿐이다. 그 앞에서 아무리 살펴도 어디가 땅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새벽안개가 겨우 먼 산봉우리만을 남겨놓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뒤덮어 버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살의 순한 빛은 강해졌고 그때마다 발아래 운해(雲海)는 파도가 일렁이듯이 한차례씩 출렁거리며 더욱 두텁게 쌓여갔다. <사진> 옥천 용암사의 마애여래입상은 날마다 바위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가 다시 들어가시는 것만 같다. 특히 오늘과 같이 운해가 장관을 이루는 날이면 어김없을 것이다. 바위의 붉은 색은 후대에 채색을 했다고 전해진다. <사진> 요즈음처럼 일교차가 큰 날 새벽에는 부처님 바로 앞에서부터 옥천읍에 이르기까지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그러나 높은 하늘은 티끌조차 미끄러질 것 같이 깨끗했으며 맑았으니 선경이 따로 있겠는가. 안개가 켜켜이 쌓여 구름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모습은 비록 아름다울 지언 정 현상이요, 그 위 맑은 하늘은 변치 않는 본질이자 근원인 것이니 거듭되는 순례길이라도 동시에 그 오묘한 차이를 바라보며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날이 그 얼마나 있을까. 부처님을 등지고 서서 운해가 피어나고 또 스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부처님은 동살이 물들인 붉은 법의를 걸치고 반공(半空)에 떠서 다시 관허공(觀虛空) 중이었다. 금세라도 바위 속에서 나와 허공 속으로 걸어 나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부처님에게서 운서 주굉, 자백 진가, 지욱선사와 더불어 명대의 선지식인 감산(山) 덕청(德淸,1546~1623) 스님의 모습을 봤다. 그가 아직 겨울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중국 오대산의 북대 용문사에 올라 선을 닦고 경행(經行)을 하다가 그 무엇 보다 깊은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이윽고 삼매에서 깨어난 그는 게송을 읊고 다음 해에는 아예 방문을 닫아걸고 삼매에 들었다. 시자들이 방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주위 사람들과 힘을 합해 창문을 부수고 방으로 들어가자 스님은 그저 단정히 앉아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붙잡고 흔들어도, 아무리 큰소리로 불러도 깨어나지 않자 귓전에 대고 요령까지 흔드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눈을 떴는데 그에게는 일촌의 시간이었을 뿐이지만 방문을 걸어 잠근 지 무려 5일이나 지난 뒤였다. 그때 감산스님이 체험한 경계는 오늘 하늘처럼 구름 한 점 없이 광활하지만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것이었으리라. 그 찬란하도록 맑은 것으로부터 모든 것은 비롯되나니 <능엄경>에서 말한다. “맑음이 지극하면 광명이 사무치고(淨極光通達), 고요하게 돌이켜 비추면 허공을 삼키게 된다(寂照含虛空)”라고 말이다. 눈앞의 부처님이 반공으로부터 내려와 걸어가려는 곳 또한 그곳일 것 같았다. 날마다 칠흑 같은 어둠속으로부터 맑은 하늘이 열리고 땅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구름바다가 뒤엉키지만 구름은 사라질 지언 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저 푸른 허공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본성에 대한 깨달음에 티끌이 내려앉지 않도록 오히려 티끌로 가득 찬 구름바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보임(保任)에 임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미 깨달았다고 어찌 수행을 그치겠는가. 부처님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날마다 갈고 또 닦아 더욱 청정해진 법신으로 우리들 앞에 나투시니 그 모습은 언제나 빛으로 가득하여 그 빛으로 우리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리라. 눈앞의 부처님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송이 꽃처럼 그렇게 나에게로 하강을 하고 있었다.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내게로 오시는 것 같이 느껴지게 하니 그 모습은 지극히 오묘했으며 가슴 설레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 어느 곳에서 이토록 벅찬 환희를 느꼈을까. 바라보면 볼수록 <능엄경>에서 말하는 몸과 마음뿐 아니라 산하와 대지는 물론 허공까지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들의 밝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구절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새소리마저 깨어나지 않은 새벽의 고요보다 더 깊은 고요가 마음에 찾아들었다. 아마도 발밑에 깔린 구름바다 때문이리라. 그는 모든 소리를 머금기만 할 뿐 토해내지 않으니 사위는 고요하여 숨소리조차 들릴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앞에서 몸 또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그쳤고, 눈은 보는 것을 멈추었으며 귀는 닫히고 말았다. 굳이 삼마지(三摩地)의 경계를 그리워 한 것은 아니지만 절로 그 경계에 든 것인가. 불현듯 들이닥친 선물과도 같은 순간을 감당할 길 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묵좌(坐)를 할 뿐이었다. 혹 내가 허공을 걸을 수 있다는 보허술(步虛術)을 익혔다면 당연히 그곳으로 나아갔으리. 그리곤 돌아 와 계곡(谿谷) 장유선생의 시구를 빌려 뭇사람들에 말하리라. “허공이 이기는 물건 하나 없지만(虛空不勝物) / 허공을 이기는 것도 하나 없구나(物亦勝不得)”라고 말이다. 한 생각이 지나가자 퉁기던 줄을 놓은 거문고와 같았다. 형체는 있으되 그것을 정적이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귀를 열고 눈을 뜬 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가부좌를 튼 오른쪽 발을 군의 자락 밖으로 내 놓은 채 앉아 계신 팔공산 동화사 일주문 곁의 마애여래좌상이 떠올랐다. 그는 이곳이 입상과는 달리 팔각의 대좌 위에 앉아 계셨지만 그 대좌가 놓인 곳은 구름 위였다. 그리고 구름의 끝은 마치 비천들의 천의 자락처럼 하늘을 향해 날리고 있었다. <사진> 용암사 마애여래입상 전경 그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강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곳 용암사의 부처님은 구름은커녕 그저 담박한 연화대좌 위에 서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곳의 부처님이 반공에 떠서 우리들의 세계로 내려오고 있는 듯이 여겨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허공과도 같이 넓고 높은 바위의 가운데 아래쯤을 감실처럼 파내고 그 안에 부처님을 새긴 때문도 아니었다. 또 그 부처님의 크기가 바위에 비해 현저하게 작아 보여 마치 하늘에 낮게 떠 날아가는 독수리 크기만 한 것도, 더불어 부처님 계신 곳에서 바라보면 산 아래가 까마득하게 발 아래로 깔려서 만도 아니었다. 그것들과 더불어 법신 곁으로 나 있는 정 자국이 더해진 때문이었다. 마치 닳아빠져 거칠기 짝이 없는 대나무비로 쓸어 놓은 듯이 하늘을 향해 성기게 나 있는 정 자국들은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무수히 많은 자국들은 같은 굵기일뿐더러 길이 또한 어슷비슷 했다. 그렇지만 일정하게 곧추 선 직선은 아니었다. 마음가는대로 정을 놀려 쪼았다는 것은 누구라도 단박에 알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법신과 연화대좌를 새긴 솜씨와는 너무도 달랐으니 그것은 하나의 표현이었으리라. 부처님을 화려하게 장엄하려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표현 말이다. 비천들의 천의 자락이 제 마음껏 휘감겨 날리듯이 법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속도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것 또한 절묘하다고 느꼈다. 그 까닭은 대개 하강하는 비천들은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발이 하늘로 향하거나 아니면 앉아 있는 모습이다. 또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천들은 옆으로 누워 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 도상이다. 그러니 이렇듯 서 있는 것들에 대한 표현은 난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두광이며 신광이 생략된 법신을 에워 싼 광배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설령 미술사적으로 따져 그것이 맞다 손 치더라도 나는 거기에 동의할 생각이 없다. 이곳에 설 때 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내 마음 속의 천상불(天上佛)이기 때문이다. 허공이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듯이 이미 허공인 부처님이 어찌 변하겠는가.이지누 / 기록문학가 ■마애여래입상은 세련美-투박美 ‘오묘한 조화’ 용암사는 충남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장령산(長靈山) 기슭에 있다. 절의 창건은 천축에서 돌아 온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진흥왕 13년인 552년에 했다고 전하며, 마찬가지로 의신조사가 창건한 속리산 법주사보다 1년이 앞선다. 경내에 산천비보사상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전하는 보물 제1338호인 쌍삼층석탑이 있으며 마애여래입상은 대웅전 뒤 큰 바위에 조성되어 있다.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은 절의 창건보다는 후대인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3m에 달하며 연화대좌를 새기고 그 위에 두 발을 양쪽으로 벌린 채 서 있다. 머리는 소발이며 두툼한 육계가 솟았다. 목의 삼도는 선각으로 뚜렷하게 새겼으며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걸쳤으나 오른쪽 어깨에 늘어진 가사를 감아 올려 걸친 것 같은 표현이 이채롭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께로 올려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왼손은 늘어뜨려 살포시 주먹을 쥐었다. 이는 여주 계신리 마애여래입상과 어슷비슷하지만 계신리는 손바닥을 어깨 쪽으로 향했지만 이곳은 가슴께로 향한 것이 다르다. 상호는 갸름하면서 길게 표현되었으며 턱이 뾰족하지 않아 원만한 모습이다. 상대적으로 갸름한 얼굴과 찢어진 눈에 비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눈두덩은 마치 잠에서 갓 깨어난 모습과도 같다. 불신을 에워 싼 감실에 이곳처럼 정 자국을 남긴 곳은 조성 시대가 이곳 보다 후대이긴 하지만 속리산 법주사의 보물 제216호인 마애불의상에서도 나타난다. 법신 주위로 빗살무늬와도 같은 정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선이며 보다 규칙적인 반복을 이루고 있어 용암사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매끈하고 세련된 마무리로 불상을 조성하고 그 곁에 투박하고 거친 형태의 정 자국을 남긴 것은 빼어난 미의식의 발로인 것만은 분명하다.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에서 시내방향으로 우회전한다. 1.3km가량 직진하면 옥천역 삼거리에 다다른다. 역 앞에서 좌회전 해 1.6Km기량 가면 오른쪽으로 소정리 입구가 나타나고 소정저수지 방향으로 1km직진한다. 저수지 사거리에서 용암사 주차장까지는 1.5km정도이다. (용암사 043-732-1400) [불교신문 2370호/ 10월24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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