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수만리 마애불좌상 |
대아 저수지를 에돌아 갈 때만 하더라도 곱게 물든 단풍은 남의 것인 양 싶었다. 그러나 산에 들어서자 흰옷을 입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말았다. 고운 나무 아래를 지날 때 마다 흰 옷은 단풍 색을 받아들여 시시각각 다른 옷으로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흰색의 아름다움은 그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있고, 검은 색은 오로지 저 자신만을 고집하지만 회색은 그 둘을 포함했으면서도 또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에 있다. 곧 색을 머금었으되 다시 내뱉지 않는 아름다움이 회색인 것처럼 순례자의 마음 또한 그래야겠지만 오늘은 흔들리고 말았다. 빛깔 좋은 단풍으로 마음공양 올립니다 外物 황홀함에 信心 놓칠까 두려움 앞서 바위 안 우직한 자태…사바의 장수 같아 <사진설명> 대부산 정산 근처에 있는 수만리 마애불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구의 마애불이다. 조성방식에 있어서도 상호부분은 부조이지만 아래로 내려 갈수록 선각으로 바뀌는 형식이다. 부처님에게로 가는 길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현란하고 화려했기 때문이다. 곁으로는 졸졸 소리를 내는 계류가 은근하고 거뭇한 돌길조차 단풍잎들이 덮어버려 길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잠시 모든 경계를 놓아버리고 그곳에서 길을 잃었으면 싶기도 했다. 나의 가장 절친한 도반이었던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를 찾으러 새벽이슬과 찬 서리에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지가 그 언제 부터였던가. 그동안 마음속으로 수도 없는 포기를 일삼으면서도 다시 새벽이 오면 이렇듯 길 위에 서 있으니 차라리 나도 그와 더불어 길을 잃고 헤매면 혹여 그를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은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자칫 외물(外物)의 황홀함에 젖어 정녕 마음을 놓치고 말 것 같은 두려움 말이다. 한발씩 다가가면 갈수록 잿빛 하늘은 파랗게 열렸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휘청거릴 만큼 황홀했거늘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웅크리고 있던 단풍들은 저마다의 색을 뽐내기 시작했으니 산을 오르는 내내 유혹은 깊고도 강렬했다. 소슬한 바람소리에 더욱 시름 깊은 대나무밭을 지나 다다른 부처님 앞, 땀을 훔칠 새도 없이 향을 사르고 예경을 올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찌 저토록 태연자약할 수 있나 싶기도 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정경이 더없이 아름답거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3년 전 모습 그대로이니 말이다. 부처님은 수더분했다. 새겨진 바위는 우람했지만 당신은 우직했다. 한눈에도 결코 결가부좌한 무릎을 풀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단호하여 냉철하지는 않지만 뚝심으로 말하라면 세상 모든 것 달라져도 결단코 자신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몸 전체에서 풍겨 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사바세계를 외호(外護)하는 장수와도 같았으니 믿음직하여 정겹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위엄과 권위가 상실된 것은 아니다. 그 모습 자체가 이미 위엄 있는 권위로써 우리들을 지켜 주고 계신 것일 테니 말이다. 사실 지난여름 내내 호되게 앓고 난 끝이어서 산에 오를 수 있을까 염려스럽기도 했었다. 몸이 지나치게 쇠잔하여 스스로 경계가 심했었다. 그러나 산에 오르고 나니 이토록 정겨운 부처님이 반겨 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몸은 거뜬하고 주눅 든 마음은 아침 햇살에 녹은 서리와도 같이 풀려 버렸으니 부처님 앞, 전각이 허물어진 자리에 나도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간혹 낙엽 지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트리는 숲을 바라보며 앉았노라니 생각은 절로 그치고 선연히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지은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라는 시의 제목이었다. 그 어떤 곳이 가을 깊어 좋은가? 매월당은 아주 작은 어촌과 가을 색 찬연한 은사(隱士)의 집 그리고 나그네들이 묵어가는 주막과도 같은 집을 꼽았다. 그것은 그가 시를 쓸 당시 그런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었을 뿐 그가 그리워했던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어느 곳이든 자신의 발걸음 닿은 당처(當處)만한 곳 없으니 나에게 가을 깊어 좋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거침없이 홀로 앉아 있는 이곳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백장회해 선사의 ‘홀로 대웅봉에 앉아 있다(獨坐大雄峰)’는 공안과도 같은 것이리라. 내가 존재하여 바로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감사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진설명> 항마촉지인을 한 수인의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의 주막집 곁에 자신의 집을 구해 살면서 맞이한 가을을 노래한 매월당은 새로 지은 시를 낙엽에 쓴다고 했는데 머리 위로 후드득 낙엽이 쏟아졌다. 공중에 가득 나부끼는 저 낙엽, 끝내 닿을 곳은 어디일지, 갖가지 모습과 색으로 꽃비처럼 흩어지는 저 낙엽들이 부처님에게 스치면 꽃잎으로 될까. 이마에 닿으면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되고 목에 걸리면 영락(瓔珞)이 되고 소매에 붙으면 연꽃이 되어 피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젖어 있는 꽃잎과는 달리 메마른 낙엽들은 부처님에게 닿으며 죽비인 양 ‘딱딱’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려고 붉은 단풍나무 그늘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세상에 하늘로부터 흩날리며 내려오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법,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宋玉)은 ‘초사(楚辭)’의 구변(九辯)에서 노래하기를 “슬프다, 가을 기운이여. 소슬바람에 낙엽이 져 초목의 모습 일변하니, 멀리 떠난 나그네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해 고향 사람 전송하듯 서글퍼지네.”라고 하며 비엽(飛葉)과 함께 저물어 가는 가을을 슬퍼했다. 그러나 오늘 나의 가을은 슬프지만은 않다. 그것은 차라리 지독한 아름다움이며 더구나 부처님 앞에 앉아 이와 같은 정경을 맞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기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그만 붉은 단풍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다시 누렇게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일산(日傘)삼아 옮겨 앉았다. 투명하게 빛나는 나뭇잎으로 해를 가리고 바라보니 바위는 구름 기운 잔뜩 머금었고 부처님에게는 푸른 하늘 기운이 가득 배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정수리에 하필이면 붉은 단풍잎 서넛이 쌓여 있었으니 서시(西施)가 입술에 바르던 붉은 연지가 그 보다 진했을 것이며 새벽이슬 머금고 피어나던 연꽃들이 그보다 빛났을 것인가. 눈부신 가을, 빈숲에서 잎 지는 소리 한가로이 들으며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덧 대여섯 시간이나 지나버렸고 머무는 동안 가진 향을 모두 태웠으니 어찌 할 것인가. 바람에 실려 간 향훈은 숲속에 머물고 나는 낙엽을 바위 아래에 갖다 두었다. 말라가는 나뭇잎 또한 향기를 풍기는 법, 마치 가위로 오려 낸 듯 기묘한 모습을 한 나뭇잎들을 고르고 그 중에서도 색이 고운 것들을 다시 간추렸다. 그리곤 돌을 모아 작은 성처럼 쌓고는 그 안에 넣어 두었다. 바람이 불어 날아가면 그뿐인 것을 굳이 그렇게 해 놓은 까닭은 마음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새벽 순례 길에 만난 보살이 그랬었다. 보살은 무수히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부처님 앞길을 하염없이 쓸고 있었다. 금세 더럽혀질 것을 왜 그리 정성스럽게 빗질을 하느냐고 말을 던졌더니 돌아 온 대답이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 마음을 부처님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 중 향공양이나 헌화공양이 으뜸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잠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감히 마음을 드린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아직도 나는 외물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형식과 의식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마치 습관처럼 익숙하게 행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공부방에 돌아와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로부터 홀가분해 졌다. 굳이 향이 없으면 어떠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면 종일 부처님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양이 아니겠는가. 당신에게 존재 이외에 바라는 것이 없으니 나 또한 마음 밖에 드릴 것이 없다. 산을 내려오기 전, 긁어모은 낙엽들 중 가장 큰 떡갈나무 잎 하나를 골랐다. 그리곤 “옛 암자 폐허가 되어 낙엽에 묻혀 있고, 외로운 부처가 새겨진 바위에는 짧은 가을 햇살 머무네. 허공 가득 나부끼는 낙엽, 끝내 어디에 떨어지려는가. 부처의 정수리 스친 후, 그 자리에 꽃으로 피어나려는가.”라고 써서 바람이 불어 올 때 석양빛 얼핏 비치는 벼랑 아래로 던졌다. 나풀나풀, 낙엽은 유행(遊行)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그를 보내고 그만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온 산이 울긋불긋한데 석양빛마저 숲에 스며드니 길은 비단을 깔아 놓은 듯 수려했다. 더구나 고요하기까지 하니 그곳에서는 각박한 마음도 사라지고 오로지 남은 것은 맑은 정신 하나 뿐이었다. 그 아름다운 경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 차마 산길을 벗어나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그러나 앉으면 누군가가 자꾸만 물었다. 그 맑은 정신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때마다 벌떡 일어나 달아나다시피 걸었더니 어느덧 산 아래였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완주 수만리 마애불좌상은 유형문화재 제 84호인 수만리 마애불좌상은 전북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 대부산(601.7m) 복호봉 가까이에 있다. 마애불 근처에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암자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석축과 석물을 비롯해 그 터만 남았을 뿐이다. <사진설명> 수만리 마애불은 10m가 넘는 바위에 5m 크기로 새겨진 거구의 부처님이다. 현재 마애불 아래에 있는 안도암(安道岩)이라는 암자는 여염집의 모습이며 굿이나 제를 지내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다만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이 이 산에서 활동했고 지금의 암자 자리가 본거지라는 것과 마애불 앞에 전각이 있었으나 빨치산 소탕작전 때 불탔다는 정도만 들을 수 있었다. 상호 ‘중부조’아래는 ‘선각’ 전형적 고려시대 조성방식 마애불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구이다. 높이가 5m에 달하며 상호는 중부조 정도이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선각의 형태를 띠는 고려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조성방식이다. 무릎 이하 부분은 연꽃대좌의 형태를 가늠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마멸되었으며 암질 또한 윗부분에 비해 좋지 않다. 바위에는 이곳저곳으로 균열이 심하게 나 있으며 머리 위에는 인공적으로 파 놓은 물끊기 홈과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봐서 혹시 마애불 자체에 전각을 씌웠던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는 두툼하게 솟았다. 이마에는 백호가 선명하지만 이끼가 끼어 잘 보이지 않는다. 눈 또한 이끼에 가렸지만 반쯤 뜬 눈매를 하고 있으며 코는 왼쪽으로 삐뚤어져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쪽이 서로 평행을 이루며 무릎으로 흘러 내렸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으며 왼손은 배 근처에 대고 있다. ◆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삼례 나들목으로 나가는 것이 편하다. 나들목 사거리에서 완주경찰서 방향 799번 도로로 좌회전, 완주 고등학교 앞에서 용봉교를 건너 앞대산 터널로 접어들면 17번 국도이다. 줄곧 1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삼기교차로에서 동상, 고산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732번 지방 도로이다. 732번 도로를 따라 대아저수지를 에돌면 대아리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수만리 입석마을을 찾으면 된다. 가다가 왼쪽으로 산여울가든이 있고 오른쪽으로 폐교된 초등학교가 있으면 그 앞에 멈추면 된다. 산행은 초등학교 건너편을 보면 작은 다리(입석교)건너 간이화장실 건물이 보이는 곳에서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 왼쪽의 농수로를 따라 1분 정도 가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곳에서 5~10분 정도 완만한 길을 오르면 허물어져 내린 무덤이 보이는데 무덤을 왼쪽으로 두고 오르는 길을 택해야 한다. 오르다가 안도암 거의 다가서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왼쪽이다. 마애불은 안도암 마당에 올라서서 왼쪽으로 올라야 하며 5분이면 닿는다. 입석교로부터 마애불까지는 3km 남짓, 길어야 4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불교신문 2374호/ 11월7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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