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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산 동불암 마애불좌상

붉은 기운 머금은 그 모습 “아 고우셔라”

만물 창생의여명, 부처님 휘감은 모습 황홀

마애불 주위 사각구멍…공중누각 흔적 ‘특이’

푸른 새벽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쌀쌀한 바람을 벗 삼아 산길로 접어든 순례자는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오른쪽 맨 앞 바위가 칠송대이며 그곳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그 왼쪽 위로 지장보살을 모신 도솔천 내원궁이 있다.

그리곤 바위처럼 굳어버린 그 자리에서 신음처럼 찬탄의 소리를 흘렸다. “아! 곱다.” 너무도 고와서 차마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재빨리 휘둥그레진 눈을 감았지만 벌렁거리는 가슴은 그치지 않았다. 고요히 산길을 걸어 해 돋는 시간에 마애부처님 앞에 서리라던 지극한 마음이 삽시간에 들이닥친 황홀한 정경에 조금씩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지 않았다.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해 단풍에 둘러싸인 선운사(禪雲寺) 언저리를 배회하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혹독하리만치 아름다운 정경을 모른 체 곁으로 두고 묵묵히 걷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걸을수록 눈이 느끼는 것 보다 훨씬 큰 파장으로 일렁이던 마음도 어느새 가라앉고 있었다.

도솔암(兜率庵)으로 향하는 길은 지난 밤 이후,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이었다. 그 길에 해가 비치지 않음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아마 해라도 비쳤으면 순례자는 또 다시 자연의 처연한 아름다움에 휘둘려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저 멀리 칠송대(七松臺) 큰 바위의 남쪽을 깎아서 새긴 동불암(東佛庵) 마애부처님이 희끗 그 모습을 나투셨다. 부처님 앞 너른 공터에 다다르자 산 너머 골짜기에는 벌써 해가 비쳤는지 붉은 기운이 앞 능선에 머물고 있었다.

초도 켜지 않았고 향도 사르지 않았다. 그리고 절도 올리지 않은 채 부처님을 등지고 능선을 향해 앉았다. 이 순정한 시간의 아름다운 빛 앞에 촛불은 무엇이며 향은 또 무엇일까. 밤새 젖은 숲이 깨어나며 풍기는 향기는 그 자체로 이미 전단향 못지않은 것일 뿐 더러 능선 너머에서 하늘을 어르고 있는 저 붉은 빛은 억겁을 두고 만물과 창생(蒼生)을 비추며 영원히 꺼지지 않은 빛이 아니던가.

마애불의 크기는 15m에 가까워 내금강 묘길상 마애불과 크기에 있어 으뜸과 버금을 다툰다.

능선 위로 해가 삐죽 고개를 디밀자 그 찬란한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느새 칠송대 위 내원궁으로부터 밝아져 오던 바위는 순식간에 햇살로 뒤덮이고 부처님은 더욱 뚜렷하고 환한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제야 향을 사르고 예를 갖췄다. 그리곤 멀리 떨어져 우러렀다. 투박하고 우직한 모습은 물론이려니와 머리 위로 나 있는 사각형 구멍이며 양쪽 어깨 옆으로 나 있는 흔히 보지 못하는 홈이 눈길을 끌었으니 금세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공중누각(空中樓閣)에 관한 이야기였다. 남아 있었다면 나라 안에 하나 밖에 없는 공중누각이었을 그것은 마애불을 에워싸고 만들어졌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버린 그 공중누각의 이름은 동불암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조 당시 몰아친 비바람에 허물어져 누각을 세웠던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았을 뿐인 것이다. 그 이야기를 믿는다면 부처님 머리 위나 옆으로 박혀 있는 쇠못은 물론 부러진 목재 가구(架構)들은 그 공중누각을 설치했던 흔적인 것이다.

눈동자가 표현되지 않아 기이하게 느껴지며 머리위로 사각형 홈은 전각을 설치했던 흔적들이다.

비록 중국 따퉁(大同)의 공중사원인 현공사(懸空寺)만 못하면 어떨까. 15m는 족히 넘을 허공에 떠 있었을 동불암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근사하기만 했다. 또 지금에 와서 그 기이한 모습을 볼 수 없음에 안타까움도 더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곳 뿐 아니라 내금강의 보덕암은 물론 가까운 부안의 내변산 의상봉 바로 아래에도 이와 비슷한 공중누각의 모습을 한 암자가 있었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스스로 몸을 버리는 망신참(亡身懺)으로 법을 구하며 수행에 들었던 불사의방(不思義方)이 그곳이다.

백운거사 이규보가 그 불사의방에 다녀 온 적이 있었다. 백 척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를 따라 절벽에 걸쳐져 있었으며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여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아득하다고 했다. 몸을 뒤로 돌려 차마 발아래를 보지 못한 채 사다리를 밟으며 내려서야만 그곳에 닿는데 전각이 바람에 날아갈까 싶어 바위에 쇠못을 박고 암자를 붙들어 매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런 곳에 암자를 짓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바다의 용이 한 일이라고 까지 했다. 그만큼 기이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리라.

그곳에서 진표율사는 자씨(慈氏)와 지장(地藏)을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3년여의 시간이 흘러도 여의치 않자 그만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 푸른 옷을 입은 청의동자(靑衣童子)가 홀연히 나타나 두 손으로 진표를 받아들고는 더욱 정진하라며 다시 불사의방으로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삼칠일 동안 참구하며 수행을 거듭하자 바위 앞 나무 위에 자씨와 지장이 현신하여 계(戒)를 주고, 자씨는 친히 <점찰경(占察經)> 2권과 아울러 1백 99생을 주며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자씨, 곧 미륵은 우리에게로 오신 것이며 모악산 기슭의 금산사와 익산의 미륵사 그리고 조금 전 지나 온 선운사가 미륵과 지장기도도량의 성지가 된 것이다. 이는 모두 호남 땅에 있으며 그것은 멸망한 백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멸망한 백제의 유민들이 기댈 곳은 그 어디였을까. 그것은 바로 미륵이었던 것이다. 미륵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참회 뿐, 이곳으로 오를 때 지나 쳐 온 참당암(懺堂庵)의 창건설화에 이르기를 우전국의 왕이 선운산에서 대참(大懺)의 기를 보았다고 했으니 곧 크고 깊게 참회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이는 곧 선운산 자체가 미륵도량이라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부처님 또한 미륵불로 조성된 것이지 싶었다.

이규보가 불사의방에 갔을 때는 1200년 8월 어느 날이었다. 8월19일에 내소사에서 하루를 묵은 그는 21일 개암사 뒤편의 원효방(元曉房)에 올랐으며 불사의방은 그 후에 올랐다. 그는 당시 유람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서해안 일대의 촌락들이 보유하고 있는 선박의 수를 조사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해 3월에 출발하여 만경과 임피 그리고 옥구에서 며칠을 머문 후 무장의 장사(長沙)포구로 발길을 향했는데 장사로 향하는 길에 이곳 마애불 앞을 지나간 것이다.

그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당시의 행적을 모두 남겼는데 도솔암 앞을 지나며 다음과 같이 썼다. “길가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미륵상(彌勒像)이 우뚝 서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위를 쪼아 만든 것이었다. 그 미륵상에서 몇 보 떨어진 지점에 또 속이 텅 빈 큰 바위가 있었다. 그 안을 경유하여 들어갔더니, 땅이 점차 넓어지고 위가 갑자기 환하게 트이며 집이 굉장히 화려하고 불상이 준엄하게 빛났는데 그것이 바로 도솔사(兜率寺)였다. 날이 저물기에 말을 채찍질해 달려서 선운사에 들어가 잤다.”

이규보는 유불선을 모두 아울렀지만 특히 불교사상에 심취해 만년에는 <능엄경>을 날마다 읽었던 인물이다. 또 숱한 불상 앞에 엎드려 참배하고 조상기며 점안문과 같은 글을 지었던 인물이기에 나는 그가 미륵상이라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련다. 또한 1995년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마애불 앞의 공터를 발굴했을 때 나온 암키와 편(片)에서 ‘도솔산중사(兜率山仲寺)’라는 명문이 나왔으니 중사(仲寺)는 암자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고 선운산의 옛 이름이 도솔산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산 전체가 미륵보살이 상주하는 천상의 정토인 도솔천(兜率天)이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마애불이 새겨진 칠송대 바위 위의 내원궁에 지장보살을 모신 것 또한 마애불이 곧 미륵불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규보의 글 중에서 공중누각에 대한 언급은 없으니 의아한 일이기도 하다. 그가 원효방이나 불사의방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과는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불사의방에 오를 때 고백하기를 “나는 평소에 높이 한 길에 불과한 누대(樓臺)를 오를 때도 두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던 터인데, 이에 이르러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애불을 에워싸고 있었을 공중누각의 신묘함에 대하여 의당 글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미 허물어진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지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만 부처님 앞을 떠나 천마봉으로 올랐다. 거센 바람에 손이 곱을 지경이었지만 칠송대와 내원궁은 물론 선운산 일대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곤 떠 올렸다. 오늘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참(懺)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미혹에 젖은 순례자는 산을 내려 온 지금까지도 미처 모른다. 용화세상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스스로를 참회하고 뉘우치며 몸과 마음을 맑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내일 찾아 갈 진도 금골산의 미륵부처님에게 여쭤 봐야겠다.기록문학가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좌상은

칠송대 바위에 15m 높이로 세워

법신 비해 유난히 큰 두 손 ‘독특’

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좌상은 1995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마애불 앞 공터를 발굴하며 마애불이 있었던 곳을 동불암(東佛庵)이라고 밝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백제의 제 27대 왕인 위덕왕(威德王)(재위 554~598)이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마애불을 새기게 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체 높이 30m에 이르는 칠송대 바위에 15m에 이르는 높이로 새겨진 마애불은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전기 이상은 올라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의 머리 위로 남아 있는 사각형의 구멍이나 어깨 좌우로 나 있는 홈 그리고 쇠못이나 사각형 구멍에 부러진 채 남아 있는 목재들로 봐서는 전각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얕은 저부조로 새겨진 부처님은 3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한 모습이며 법신의 다른 부분에 비해 유난히 커 보이는 두 손은 다리 위에 가지런히 모은 독특한 수인을 하고 있다. 또한 가슴에는 사각형의 홈이 메워져 있는데 사리나 경전과 같은 불구를 넣었던 감실로 보인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 오기를 그곳에 비결(秘決)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비결은 1892년 8월, 무장(茂長) 일대 동학조직의 대접주였던 손화중 포접(包接)에 의해 탈취 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무장, 고창, 영광, 장성, 고부, 부안 등지에서 아전을 비롯해서 농민들의 동학입교자가 수만 명으로 급증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상호는 육계가 표현되지 않았으며 이마에 백호만이 두드러져 있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늘어져 있지만 입술은 투박하며 눈초리는 위로 치켜 올라가 매서운 인상을 준다. 더구나 눈동자가 표현되지 않아 기괴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온화하거나 근엄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목의 삼도는 간략한 선으로 처리되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걸쳤다. 가슴 아래에는 내의를 여민 고름이 표현되었으며 군의 자락은 다리에 이르러 선각으로 희미하게 마무리되었다.

찾아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 선운사 나들목으로 나간다. 나들목에서 좌회전하여 22번 국도 방향으로 좌회전 해 12km남짓이면 선운사 주차장에 닿는데 중간중간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선운사를 거쳐 도솔암으로 오르는데 길은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3.5km 정도를 걷는데 1시간 남짓이다.

[불교신문 2380호/ 11월28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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