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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노적봉 마애여래좌상,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千年의 미소 마주하니 찬탄의 소리 절로나네

눈부시도록 화려한 莊嚴에 가슴 벅차올라

늦가을 햇살 맞닿은 법신 아름다움의 절정

사진설명 : 노적봉 마애여래좌상이다. 마애불이 있는 곳에 호성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두 손으로 연꽃 봉우리를 받쳐 들고 있어 미륵불로 짐작된다.

사진설명 :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이다. 볼륨감이 넘치며 광배를 따라 둥근 구슬 같은 연주문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갓 피어난 구름이 지리산 능선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마 그도 벌건 새벽 놀을 맞이하고서야 먼 하늘로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잰 걸음을 놀렸다. 노란 은행잎이 멍석처럼 펼쳐진 길을 지나 혼불문학관을 에돌아 산으로 들어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산길, 길은 며칠사이에 쏟아져 내린 낙엽들에 뒤덮여 가뭇없이 사라지고 밤새 내린 하얀 서리가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길은 이내 치받이로 바뀌어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묘한 것은 오르는 것만 해도 힘에 부치면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시조를 읊조리듯이 내뱉고 있는 노래는 뜻 밖에도 ‘도솔가(兜率歌)’였다. “오늘 이에 산화(散花) 불러 뿌린 꽃이여 너는 곧은 마음 명받아 미륵좌주(彌勒座主) 뫼시어라”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대며 치받이 길을 벗어나 계곡으로 접어들자 벗겨진 어둠 속으로 저 멀리 미륵불이 눈에 들어왔다.

타다만 향을 다시 사르고 바위 아래로 흐르는 샘물을 떠서 올렸다. 그리곤 지리산 능선을 향해 앉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향훈에 젖어 마음까지 맑아졌는가 싶은데 눈앞에 안화(眼花)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 가득 머금은 해가 능선을 넘어 온 것이다. 미륵불이 새겨진 바위의 정수리에 닿은 햇살은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왔다. 이윽고 법신은 햇살과 함께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겪었던 그 어느 순간이 이토록 장엄하고 또 아름다웠을까. 눈을 뜨고 우러러도 시나브로 깨어나는 모습을 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찌 입을 벌려 찬탄할 새가 있었겠는가. 오히려 벌떡 일어나 두어 발 쯤 물러나 나무에 기댔다. 차마 몸을 가누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미륵불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를 바라보는 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으며 찬탄의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마도 그 누군가가 홀로 미소 짓고 있는 나의 모습을 봤다면 실성한 사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누군들 이 시간, 이 자리에 서면 그렇지 않으랴. 얼굴을 지나 가슴께에 햇살이 비쳤다. 나는 참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무의식적으로 신음과 같은 찬탄을 흘리고 말았다. 손끝을 아래로 하고 가지런히 맞댄 두 손의 손목 위에 받들어진 연꽃 봉우리에 눈길이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금세라도 벙긋벙긋 꽃잎을 열어 천년이나 묵은 향기를 뿜을 것만 같았다.

그뿐이랴. 양쪽 어깨 아래로 활짝 피어난 두 송이 연꽃이 법신을 장엄하고 양쪽 소매 아래로는 법의를 여몄을 긴 고름이 너울거리며 날리고 있으니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두툼한 연화대좌의 양쪽 끝에 또 다시 피고 지는 연꽃이 새겨졌으니 어쩌면 이토록 찬란하게 장엄할 수가 있단 말인가. 또한 넓게 표현된 두 겹의 두광 양쪽에는 한 무더기씩의 구름이 에워싸고 있으니 이는 분명 구름 너울 쓰고 용화회상(龍華會上)의 법석을 펼치려 도솔천(兜率天)에서 하강하는 미륵불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리라.

아직 순례자의 안목이 일천하기는 하지만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들 중 이처럼 화려하게 장엄한 것은 만나지 못했으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앙증맞게도 법의 자락 사이로 내민 오른발의 모습은 보물 제 243호인 동화사 일주문 옆의 마애여래좌상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또한 구름 위에 올라 앉아 유유히 천상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아니던가.

참으로 아름다워 찬탄에 찬탄을 거듭하던 순례자는 또 한 번 환희로움에 가슴이 벅차올라 헐떡거리고 말았다. 한 차례 소슬바람이 거칠게 지나가자 미륵불 앞으로 나뭇잎이 꽃비처럼 흩날렸기 때문이다. 채 물들지 않은 감나무 잎은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 맥없이 떨어졌건만 갈색으로 물든 떡갈나무 잎은 흥에 겨워 비산(飛散)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머리나 어깨 위에도 그들은 떨어졌지만 거부하는 몸짓을 하지는 않았다. 툭툭 말을 걸듯이 내 몸에 부딪치는 그들에게서 가을 정취가 물씬 묻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뜩 놀랐다. 산 중에 감나무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개 감나무는 사람이 사는 곳에 심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 이곳은 암자 터였던 것이다. 호성암(虎成庵)이라는 암자는 한국전쟁까지도 존재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돌절구와 같은 몇 개의 석물들만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호성암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가 최명희의 <혼불>이라는 소설에서 되살아났다. 도환이라는 법명을 지닌 스님이 암자에 살았다고 하며 그는 손 맵시가 남달라 연봉과 연꽃, 설중화, 오색등화, 불봉화 같은 꽃들을 생화보다 곱고 섬세하며 선연하게 만들어 보는 이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소설 속에 나타난 도환 스님의 모습은 이렇다. “꽃 만드는 손이어서 그러한가. 도환은 손이 고왔다. 중키 넘어 호리한 몸집이며 얼굴 모습도 단아하고 맑은 쪽이었는데, 눈매만은 뜻밖에도 매 눈이어서, 웃을 때는 얼핏 잘 모르겠지만 무엇인가를 집중적으로 생각할 때 보면, 그 빛이 내리꽂을 듯 날카로웠다.” 그런 스님이 만드는 지화(紙花)들은 금세라도 피어날 것만 같아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종부(宗婦) 청암부인 상을 당했을 때 몇 날 밤을 새며 꽃상여를 장식할 꽃을 만든 것도 도환 스님이었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는 그렇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1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암자 터를 찾았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설 속에는 단 한마디도 언급이 되어 있지 않은 미륵불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은 물론 최명희라는 작가가 어디에서 그런 영감을 받았는지 금방 알아차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위에 새겨진 아름다운 연봉이나 연꽃들에게서 부터가 아니고 무엇으로 부터였겠는가.

정오가 지나자 해는 바위 뒤로 넘어 가버렸다.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며 순례자의 마음을 들뜨게 하던 미륵불도 그늘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거뭇한 바위가 빚어내는 적막함 만이 암자 터에 가득 들어찼다. 정진을 그치지 않고 공덕을 쌓은 자,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으로 탑에 공양하며 주위를 깨끗이 한 자, 삼매에 들어 선정을 닦은 자, 경전 독송을 그치지 않는 자, 미처 번뇌를 끊지는 못했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그리고 깃발로써 장엄하고 참배하는 자, 비록 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을지라도 자비로운 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마음으로 참회하는 자, 여덟 가지 계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놓지 않는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만이 왕생할 수 있다는 도솔천이라지만 나는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말라가는 그윽한 낙엽 향기라도 공양을 올려야 할 것 아닌가. 괜히 바닥 가득히 쌓인 낙엽들을 발로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그리하면 가라앉은 향기가 깨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곤 빛 고운 감나무 잎 서너 장을 주워 샘물 옆에 두고는 산을 내려와 산 너머 마을인 대산면 신계리로 향했다. 빼곡하게 들어 선 소나무 숲을 빠져 나가자 그 모습 여여하게 우뚝했다. 이곳 신계리의 마애여래좌상 또한 화려한 장엄으로 치자면 버금자리가 아까울 만큼 아름답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하룻밤 사이에 돌을 쪼고 저며 이루었다는 전설이 배어 있는 마애여래좌상, 그 당당한 조각은 조금 전 호성암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호성암의 그것은 전체적인 선이 아기자기하여 여성적이라면 눈앞의 여래좌상은 강인하여 남성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조각의 깊이에서도 드러난다. 호성암은 얕은 저부조이지만 이곳은 금세라도 바위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은 고부조이다. 또한 호성암 미륵불은 화려하면서도 소박하여 민불(民佛)과도 같은 느낌이 강하지만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대단히 권위적인 모습이어서 아직 호성암 미륵불의 감흥이 채 가시지 않은 나로서는 잠시 낯설기도 했다.

고요하기만한 솔숲에서 책을 읽으며 서너 시간이나 머물렀을까. 늦은 오후가 되자 해가 비쳐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 굵은 부처님의 모습은 더욱 뚜렷해지며 아름답게 빛났다. 그러나 잠시였다. 키 큰 소나무들이 해를 막아서자 이내 그늘을 드리우곤 산 너머로 사라져갔다. 마치 만화경의 한 장면이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해가 뜨고 다시 질 때 까지 두 분 곁에 머문 여운이 여느 날 보다 깊었기 때문이다.기록문학가

■남원의 마애여래좌상 두 부처님은…

노적봉 화려한 듯 소박한 ‘民佛’ 느낌

신계리 고부조로 제작…강한 남성미

노적봉 마애여래좌상은 문화재자료 146호로 지정되었으며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에 있는 혼불문학관 뒷산인 풍악산 노적봉 중턱에 있다. 높이와 너비가 15m남짓한 거대한 바위에 저부조로 새겨졌으며 원형이 제대로 잘 남아 있다. 마애불 앞에 있었던 호성암이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마애불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마애불은 두툼한 연화대좌에 앉았으며 손에는 연봉을 받쳐 든 흔히 보지 못하는 수인을 하고 있다. 더구나 가지가 없이 봉우리만 들고 있어 특이하며 연봉을 들었으니 용화수인(龍華手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본디 연봉은 관음보살이 드는 지물이지만 고려시대에 들면서 미륵불의 도상(圖像)으로 퍼져 유행했으니 이 여래좌상 또한 고려시대에 조성된 미륵불로 봐야 할 것이다.

법신은 두 겹의 굵은 두광과 신광으로 싸여 있으며 머리에 육계는 없다. 머리는 나발이지만 도식적인 문양이 반복되어 독특하며 귀는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다. 목에는 내의의 목선과도 같은 것이 새겨져 있지만 삼도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상호는 둥근 형지만 입은 작게 표현되었고 그 주위로 광대뼈가 돋보이도록 움푹하게 주름을 잡았다.

그 외에도 이 마애미륵에게는 마애불에게서 흔히 보지 못하는 요소들이 많이 베풀어져 있어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크기는 높이가 6m에 달하며 너비가 4m인 결코 작지 않은 크기이며 조성 시기는 고려 후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산 18번지에 있으며 보물 제 423호로 지정되었다. 산기슭의 독립된 바위의 한 면을 감실처럼 움푹하게 다듬으며 여래상을 새겼다. 대좌는 따로 새기지 않고 자연석을 대좌로 삼았는데 옷깃이 무릎까지 덮고 있는 상현좌(裳懸座)이다.

둥근 원으로 된 두광은 바깥 선을 따라 구슬과 같은 것이 베풀어진 연주문(連珠文)을 새겼으며 원 안에는 11엽의 소판연화문을 새겼다. 신광 또한 안쪽에는 연주문을 새겼으며 밖으로는 화염문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이렇듯 연주문이 두광이나 신광에 베풀어진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육계는 두툼하게 솟았고 머리는 소발이다. 볼륨감 있는 상호의 모습만으로는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과 닮아 있지만 손과 발과 같은 부분의 표현으로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높이는 3.4m이다.

찾아가는 길

남원 시내에서 전주로 향하는 길을 따라 10km 달려가면 사매면 서도리에 혼불문학관이 나온다. 혼불문학관 주차장에 차를 놓고 혼불문학관 뒤로 2.3km 정도 걸어가면 ‘노적봉 마애여래좌상’의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가 알려주는대로 산길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혼불문학관을 지나서 큰길로 내려와 남원-순창간 24번 국도를 따라 10km 가면 대산면 면사무소가 나온다. 최근 이 곳에 전주-광양간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옛길과 많이 달려졌기 때문에 면사무소에 들어가 문의하는 편이 낫다. 면사무소에서 3km 가량 들어가서 주차를 한 뒤 400m쯤 걸어가면 마애불이 보인다.

[불교신문 2378호/ 11월21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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