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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 금골산 동굴암 마애여래좌상

암반 위 선정 드신 부처님, 여명을 품에 안다

다시 새벽이다. 진도 읍내는 안개에 잠겨있고 밤새 차창에 내려앉은 안개는 호된 추위에 시달려 꽁꽁 얼어 있었다.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어제 치러진 진도씻김굿의 탁월한 전승자인 무형문화재 제72호 고(故) 박병천 선생의 장례식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때문이었는지 내 마음도 꽁꽁 얼어 있었다. 선생의 구성지면서도 기품 넘치던 소리와 북춤은 이제 더 이상 듣고 볼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으니 종일 장례 행렬을 뒤따르며 처연해졌던 마음을 밤이 지났음에도 채 추스르지 못했던 것이다.

<사진설명>조선 전기에 조성된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은 친근한 느낌이 특색이다. 깎아지른 절벽을 힘겹게 내려가면 가까운 이웃처럼 반겨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려 금골산 아래에 다다르자 바위투성이의 산은 감장 물을 들인 듯 하얀 안개 속에서 더욱 우뚝해 보였다. 아직 어둠이 짙어 산 아래를 거닐다가 마주 보이는 첨찰산의 능선이 벌건 새벽 놀로 달구어지는 것을 보며 산으로 들어갔다. 발 밑 조차 가늠하기 쉽지 않은 깜깜한 산길을 10분이나 걸었을까. 큰 구비를 돌아서다가 나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삼키며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곤 한 그루 마른나무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벅차오르는 가슴을 누를 길은 더더욱 없었다.

儒家 군수가 벼랑 끝 비탈 깎아 조성 ‘이채’

수더분한 인상, 한번쯤 스친 모습처럼 편안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이곳에 기도를 하면 돈과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설화 때문인지 요즈음도 섬사람들의 발길은 이어진다.

<사진설명>움푹 파인 동굴은 괴이한 느낌이 들 만큼

마애불에서 바라 본 진도의 일출이다. 섬에서 조성연대가 오래 된 마애불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섬에는 무속을 비롯한 민간신앙의 텃세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거칠고 투박한 섬 생활을 견디기에 정적인 불교보다는 동적인 무속을 통해 신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하늘에 한 송이 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하얀 연꽃이나 덩치 큰 모란과도 같이 송이가 큰 그것은 보름달이었다. 등 뒤로는 붉은 새벽 놀이 타오르고 눈앞에는 둥근 보름달이 하얗게 비추고 있으니 수미산의 새벽이 이러할까, 무릉도원의 새벽이 이러할까. 난데없이 맞닥뜨린 그 환희로운 정경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그 순간 감사하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부처님, 그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순례자의 발길이 이 시간, 이곳에 닿았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아예 바위 위에 배낭을 벗어 놓고 넋조차 놓아 버렸다. 그러나 빤히 바라보지는 못했다. 하얀 달을 바라보고 있자면 등 뒤의 붉은 새벽 놀이 궁금하고, 그곳으로 고개 돌리면 이내 꽃과 같은 달이 이울고 말 것 같아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삭발한 머리 위로 한 차례 맑은 바람이 지나가자 오히려 흔들리던 마음을 붙들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달을 등졌다. 달빛 머금은 산길에는 달이 빚어내는 나무그림자에 묻어 있는 내 모습도 있었다. 얼마만인가. 달빛에 스스로의 옅은 그림자를 이끌어 본 적이 말이다.

가뭇한 기억을 떠올리며 오른 정상, 숨을 고른 후 더듬더듬, 깎아지른 듯 아찔한 절벽을 내려서다가 또 다시 멈춰야 했다. 1시간이 넘게 푸른 하늘을 달구던 해가 첨찰산 능선 너머로 슬그머니 솟아 올라왔기 때문이다. 겨울 해는 여름 해와 다르다. 여름 해가 돈오(頓悟)라면 겨울 해는 점수(漸修)에 가깝다. 그것은 여름 해는 솟아오르자마자 발끈하지만 겨울 해는 은근하게 대지를 붉은색으로 물들인 후 차츰차츰 그 색을 벗기며 자연이 지닌 본연의 색을 되찾아 주기 때문이다.

마치 동굴과도 같이 바위가 움푹 파여진 곳으로 한 발 내려서자 바위에 새겨져 있는 부처님은 물론 바위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소슬한 금풍(金風)에 제 모습 드러내기 시작한 나무들과 함께 발아래에 넘실거리는 안개 또한 붉었으니 순례자인들 그 빛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바위틈에 향을 꽂아 사르고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갓 서른 즈음이었을 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의 호는 망헌(忘軒)이며 이름은 이주(?~1504)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인 1502년 10월 이곳에 올라 지금의 나처럼 부처님 앞을 서성거린 것은 물론 무너져 가는 전각에 몸을 뉘이기도 했으며 동행한 스님들과 시문을 읊조리기도 했다. 스스로를 조롱에 갇힌 새라고 했던 그는 진도로 유배를 온 처지였다. 연산군이 집권한 시절인 1498년 그의 벼슬은 정언(正言)이었으며 ‘성종은 우리 임금이다’라고 말한 죄를 물어 탄핵을 당하여 유배를 온 것이었다. 3년을 진도에서 지냈지만 사면령에서도 풀려나지 못한 그가 금골산을 찾은 까닭은 다음과 같다.

“나는 혼자서 자탄하여 사군자(士君子)가 이 세상에 나면 반드시 충효로써 스스로 기대하는데, 지금 나는 죄악이 지중하여 성조(聖朝)에서 버림받는 물건이 되었으니, 신하 노릇을 하고 싶지만 임금에게 충성할 수도 없고, 자식 노릇을 하고 싶지만 부모에게 효도할 수도 없으며, 형제.붕우.처자가 있지만 또한 형제.붕우.처자의 낙을 가져 보지도 못하니, 나는 인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이 세상을 살아갈 뜻이 없었다.”

스스로 처한 처지를 비관한 그는 산에 올라 23일 간 머물렀는데 그때의 일을 ‘금골산록(金骨山錄)’에 자세히 남겼다. 글에 의하면 금골산 아래에는 이미 폐사가 된 해원사(海院寺)가 있었으며 9층 석탑이 있었다. 그리고 산에는 모두 세 군데의 굴이 있는데 기슭에 있는 것이 서굴(西窟)이며 일행(一行)이라는 스님이 향나무로 16나한을 깎아 모셨으며 굴 곁으로 따로 고찰(古刹) 67칸이 있어 다른 스님들이 머물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굴은 상굴(上窟)인데 “굴이 중봉 절정의 동쪽에 있어 기울어진 비탈과 동떨어진 벼랑이 몇 천 길인지 알 수 없으니, 원숭이같이 빠른 동물도 오히려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다.’라고 했다. 나머지 또 하나의 굴은 동굴(東窟)인데 ‘굴 북쪽 비탈을 깎아서 미륵불(彌勒佛)을 만들었는데, 옛날 군수 유호지(柳好池)가 만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유호지는 1469년부터 1472년 까지 미륵불을 조성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군수가 미륵불을 새긴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수라면 당연히 유가(儒家)였을 것이며 더구나 흥미로운 것은 미륵불을 새기게 된 까닭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산이 옛날에는 영검이 많아서 매년마다 방광(放光)을 해서 신기한 점을 보이고, 유행병이나 수한(水旱)의 재앙에도 기도를 드리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났는데, 미륵불을 만들어 놓은 뒤부터는 산이 다시 방광한 일이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주의 기록대로라면 유호지는 불법을 숭앙한 것이 아니다. 다만 불가(佛家)에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는 신비로운 기운을 억누르려 미륵불을 새긴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 미륵불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기를 누르려고 하는 마음을 먹은 사람이 새긴 것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부처님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으며 전체적인 모습 또한 세련되어 숭엄하기 보다는 수더분하여 어디선가 한번 쯤 어깨를 맞대고 스쳐 지나간 얼굴인 것 같으니 말이다.

그 때 이주는 서굴에 머물던 스님인 언옹과 지순 그리고 동자 한 명과 동행이었다. 서굴과 상굴 그리고 동굴을 모두 둘러 본 이주는 상굴에 거처를 정했으며 그곳에서 게를 짓기도 했다. 게는 모두 다섯 가지였으며 청송게(靑松偈), 낙엽게(落葉偈), 조게(潮偈), 백운게(白雲偈) 그리고 죽게(竹偈)였으니 이는 불가의 게송(偈頌)을 본 뜬 것이다. 그리고는 동행한 지순 스님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은 게를 새벽 4시가 넘도록 소리 내어 읽게 하고 자신은 누워서 들었다고 한다.

일순 그런 그의 모습이 이해가 되는 것은 당시 그는 “한낮에 밥 한 사발을 먹고, 아침저녁으로는 차 한 잔씩을 마시며, 닭의 울음을 들어 새벽인줄 알고 앞바다의 밀물을 살펴 때를 짐작하며, 침식(寢息)을 마음대로 하고 동작을 편한대로 따랐다.”고 하고 있으나 그것은 마음가는대로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어느 비오는 날 밤에는 그 참담한 심정을 ‘밤에 앉아서(夜坐)’라는 시에 고스란히 토해 놓았다.

“소슬바람 쌀쌀하고 비는 추적추적(陰風慘慘雨淋淋) / 바다 구름 산에 닿아 굴이 깊숙하다(海氣連山石竇深) / 이런 밤 뜬 인생은 흰머리만 남았는데(此夜浮生餘白首) / 등불 켜고 때로 옛 마음을 돌이키네(點燈時復顧初心)”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가. 어느덧 해는 중천을 향해 치달리고 저자를 피해 산 중으로 숨어 든 한 사내의 처연했을 심정을 헤아리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렇게 쓸쓸한 심정을 헤아리기에는 해가 너무도 맑고 밝았기 때문이다. 바다가 잘 내다보이는 자리를 찾아 굴의 끝머리에 앉았다. 그러나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스스로를 사람도 아니라는 식으로 폄하하며 고독한 자괴감에 젖었던 한 사내를 떨쳐버렸는가 싶었더니 이내 찾아 든 것은 어제 치러진 굿과 장례의 몇 장면이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비록 녹음 된 것이긴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당신이 가는 북망산천 길을 수놓던 장면이었다. 그것은 죽어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자신에게서 풀어 놓는 해박보(解縛步)를 걷는 것과 같았으니 그가 지녔던 한의 크기는 쉬이 가늠하지 못하는 크기일 것이다. 그만 일어섰다. 무거워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곤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고 절을 올렸다. 진도에서 만난 두 남자의 해원(解寃)을 바라면서 말이다.기록문학가

■ 금골산 동굴암 마애여래좌상

석굴 벽 저부조로 연화대좌위 ‘오롯이’

강한 권위보다 친근한 이웃 같은 느낌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은 문화재자료 제 110호로 지정되었으며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금성초등학교 뒷산 마루에 있다. 금골산(金骨山, 193m)은 바위로 이루어진 악산이며 그다지 높지 않아 한달음에 오를 수 있다.

금성초등학교의 교사 왼쪽 끝에는 보물 제529호로 지정 된 백제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의 5층 석탑이 있다. 이주는 ‘금골산록’에서 산 아래 해원사의 폐사지에 9층 석탑이 있다고 했으나 지금 남아 있는 탑은 5층이어서 이주가 본 것과는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탑 위로 오르면 해언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금골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곳이 곧 해원사가 있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서굴은 해언사를 바라보면서 왼쪽으로 난 산길을 1~2분 정도 올라 금골산의 바위 벼랑을 따라 오른쪽으로 따라 들어가면 큰 굴 서넛이 보이는데 그곳쯤이다. 더러 와편들도 흩어져 있으며 석굴의 크기 또한 만만치 않아 이주의 말대로 많은 수의 스님들이 머물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이 새겨진 동굴은 등산로를 따라 20분 정도 산을 오르면 정상에 닿고 정상에서 다시 산 아래로 5분 정도 내려가면 만난다.

사람 서른 명은 너끈히 머물 수 있는 동굴암의 옛 모습은 이주가 남긴 ‘동굴(東窟)’이라는 시에 남아 있다. 그가 동굴을 처음 찾았던 날은 밤낮 없이 비가 내렸으며 세 칸 정사는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곧, 마애불 곁에 전각이 있었다는 말이다. 마애불은 석굴 벽에 얕은 저부조로 새겼으며 선으로 새긴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전체적으로 봐서 친근한 이웃과 같은 느낌이 강하며 불상으로서의 숭엄한 권위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두광이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에는 선운사 동불암 마애여래좌상과 같이 사각형의 감실이 파여져 있다. 오른 손은 시무외인이며 왼손은 엄지와 네 번째 손가락을 맞댄 하품중생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여래를 표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찾아가는 길

뭍에서 진도대교를 건너 읍을 향해 채 10분을 달리지 않아 오른쪽으로 군내우체국과 주유소가 있다. 그곳에서 우회전하여 50m 정도 들어가다가 길가의 이정표를 따라 금성초등학교 방향으로 다시 우회전한다. 300m 가량 들어가면 산 아래에 주차장이 있으며 유자밭을 지나면 산으로 오르는 이정표가 보인다. 마애불까지 채 30분이 걸리지 않으며 산길에 들어서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정상에서는 쇠줄로 만든 난간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불교신문 2382호/ 12월5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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