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지훈 조동탁선생의 ‘승무’ 첫 대목이다. 그가 이 시를 지은 것은 스무 살 때로 수원 용주사에서 본 승무와 어느 미술전람회에서 본 승무에 대한 그림, 그리고 궁중 아악인 영산회상 가락에서 영감을 얻어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승무의 기원에 대해서 지족선사를 유혹한 황진이 춤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선녀들과 어울리다 뒤늦게 해탈개오한 성진의 이야기를 다룬 김만중의 구운몽에 유래했다는 설, 또 탈춤의 노장과장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 등 여러 이견들이 분분하나 이능화 강백의 <조선불교통사>에서 불교의 작법(作法) 중 법고춤에서 승무가 기원했다고 그 연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승무가 오늘날 불교에는 없고 민속무용의 영역에만 남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기에는 숭유억불의 조선왕조 500년을 살아 온 한국불교의 질곡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성출입이 금지되고 자유로운 포교활동도 할 수 없음은 물론 지속적인 탄압에 의해 사원경제가 피폐해지자 조선중기 이후 한국불교는 탁발에 의지해 근근이 사찰살림을 꾸려가게 되었다. 아울러 이전의 지식인들이 아닌 일반 민중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범패작법 중 일반 민중들이 선호하는 작법들을 탁발과 결부시켜 발전시키게 되었다.
불교의식음악에서 궁중무용 반주곡으로도 활용
현재는 예술 춤 변모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법무가 전문 어산스님을 거쳐 탁발승에게로, 그리고 탁발활동에 전문 기예집단인 사당패가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당패들에게 전승되었고 이는 다시 무동(舞童)들과 전문연희자인 창우들에게로 전해졌다가 나중에는 기생들이 추는 교방기예의 하나가 된 후 전문적인 예술인의 춤으로 변모, 중요무형문화재 27호로 지정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승무가 불교의 작법에서 비롯되어 일반 민중들이 선호하는 춤이 되었다고 한다면 본래 불교의식음악이었으나 궁중무용의 반주곡이 된 것이 있으니 영산회상과 미타찬, 본음찬, 관음찬이 그것이다.
조선왕실에서 나례나 궁중연희시 항상 시연했던 처용무와 학춤, 그리고 연화대놀이(蓮花臺戱) 때 반주곡으로 이들 노래가 연주되었는데 영산회상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부처님과 당시의 모습을 찬탄한 노래이고, 미타찬은 조선 초기 기화스님이 지은 아미타불을 찬탄하는 노래, 본음찬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세종 때 지은 찬불가, 관음찬은 관세음보살을 찬탄하는 노래이니 이 모두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실에서 연주곡으로, 혹은 반주곡으로 불리워졌던 찬불가들이었다.
영산회상은 “영산회상불보살”이란 가사가 삭제된 채 기악곡으로, 관음찬의 경우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에는 수록되었으나 순조 때 <정재무도홀기>에서는 사라졌지만 나머지 미타찬과 본음찬은 그대로 전승되었다.
특히 영산회상은 오늘날 국악의 중심음악으로 자리잡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지훈이 승무가 착상에만 11개월, 집필에 7개월, 완성 후에도 수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쳐 불후의 명작이 되었듯이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거쳐 우리 곁에 다가 온 불교문화에 대해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애정어린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바라 볼 일이다.
김유신 / 불교문화정보연구원 이사
[불교신문 2476호/ 11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