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이차돈 성사의 순교 원력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경주 백률사(栢栗寺)의 일제강점기 모습이 담긴 사진이 공개됐다. 본지가 최근 입수한 이 사진에는 대웅전과 2층 누각, 그리고 느티나무 등 일제강점기 백률사의 모습이 손에 닿을 듯 선명하다.
절마당과 연결된 허름한 누각 통해 寺格 짐작
주지 성암스님 “日帝때 모습 만나 감회 새로워”
본지가 입수한 사진은 그동안 존재 여부가 알려지지 않았던 경주 백률사 2층 누각이 현존했음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은 다섯 개의 나무기둥을 기초로 하고 절마당과 연결된 구조이다. 2층 누각은 사찰 행사시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한 불자들이 사용하거나, 강당(講堂)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일제강점기 경주 백률사 전경. 누각은 사라졌고, 대웅전과 느티나무는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따라서 2층 누각을 구비한 경주 백률사는 사람들의 많은 왕래가 있었던 도량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백률사 사격(寺格)을 짐작케 한다. 사진을 살펴보면 2층 누각의 창호(窓戶)에서 두루마기를 입은 한 인물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데, 그늘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2층 누각은 남아있지 않고, 그 자리에는 축대를 쌓은 후 조성한 범종각이 대신 도량을 지키고 있다.
아쉽게도 2층 누각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2층 누각이 언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추후 전문가의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을 살펴본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본지 논설위원)은 “2층 누각이 있는 백률사 사진은 처음 본다”면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백률사 가람배치와 사격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사진에 나타난 백률사 2층 누각은 18세기에 세워진 건물들에 많이 나타나는 양식으로 18세기경에 조성된 누각일 가능성이 높다. 영천 운부암 보화루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누각이다. 신대현 연구원은 “2층 누각 아래 계단을 통해 대웅전 앞마당으로 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정면이 아닌 대웅전 측면에 누각이 위치한 것은 특이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후 중건한 백률사 대웅전은 단층 목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 형식을 갖추고 있다. 대웅전 현판 글씨에서 ‘大’가 지금과 달리 오른쪽 아래로 흐르고 있어 지금 걸려 있는 현판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백률사 대웅전에 모셨던 금동약사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로,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백률사 사진의 아랫부분에는 한문으로 ‘朝鮮慶州新羅古蹟 栢栗寺 全景’라고 적혀있다. 이는 ‘조선 경주 신라 고적 백률사 전경’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조선 전역의 사찰과 문화재 등을 촬영할 당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신대현 연구원은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는 백률사 대웅전 사진과 불교신문이 입수한 사진이 서로 다르지만 대웅전 현판 글씨는 같다”고 밝혔다. <조석고적도보> 제작 시기가 1915년부터 1935년까지로, 경주 백률사 사진은 짧게는 70여 년 전 길게는 90여 년 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도 “일제강점기 경주 지역 사찰이나 문화재를 촬영한 사진이 많이 있지만, 백률사 누각이 있는 사진은 처음 본다”면서 “일제강점기 경주지역 불교 상황을 짐작하고, 백률사의 가람 구조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경주 백률사 주지 성암스님은 “이차돈 성사가 부처님 법을 이 땅에 펴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던진 숭고한 의미를 지닌 도량이 백률사”라면서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백률사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느티나무 근처에서 대웅전을 향해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에는 2층 누각과 대웅전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느티나무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오르막은 지금과 달리 바위들이 노출된 오솔길로 참배객을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률사는 어떤 절인가 /
신라 법흥왕 때 창건한 고찰
임란때 소실…1600년경 중건
법흥왕 15년(528년)에 창건된 고찰(古刹)로 경북 경주시 동천동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 사명(寺名)은 자추사(刺楸寺)이다. 백률사는 법흥왕 14년 불교 공인(公認)을 위해 순교를 자청한 이차돈(異次頓, 506∼527) 성사와 인연이 깊은 도량이다.
이차돈 성사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다가 떨어졌는데, 그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였다. 이차돈 성사의 순교로 이적(異蹟)을 경험한 왕과 신료, 그리고 백성들이 성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절이 백률사이다. 헌덕왕 9년(817)에는 이차돈 성사를 추모하는 석당(石幢)을 세우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폐허가 된 것을 1600년경에 경주 부윤(府尹)으로 부임한 윤승순(尹承順)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했다. 제11교구 불국사 말사이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78호/ 11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