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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

‘깨달음의 왕’을 기리며…

조선 숙종때 재건된 국보67호

위아래 트인 2층 다포집 양식

내부천장엔 화려한 단청 흔적

국보 제67호인 화엄사 각황전.불교신문 자료사진

구례터미널에서 탄 화엄사행 버스가 내려준 곳은 화엄사 주차장. 숲길을 따라 한참 걷다보면 일주문을 만날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통과하면 커다란 보제루가 보이고, 보제루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돌면 화엄사 마당이다. 이곳에 서면 새삼 천년고찰의 품안으로 들어왔음을 알아차린다. 오랜 건축물이 풍기는 아늑함과 포근함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화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인도에서 온 연기(緣起)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30(인조 8)년에 벽암스님((碧巖, 1575~1669)이 재건했으며, 1970년대 주지를 지냈던 도광스님의 원력으로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국보 67호 각황전은 1702(조선 숙종 28)년에 조성된 2층짜리 당우다. 원래 각황전 터에는 3층 규모의 커다란 장육전(丈六殿)이 있었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670년에 장육전을 세웠다고 한다. 스님은 장육전 사면을 모두 화엄석경으로 장엄했는데, 임진왜란 때 다 파괴됐다. 현재 만여점이 넘는 석경조각들만 전해지고 있다.

오늘의 각황전은 조선 숙종 때 재건한 것이다. 각황전이란 이름은 숙종이 친히 현판을 내린 것인데, 당시 형조참판 이진휴가 쓴 것이다. ‘각황’이란 명칭은 부처님을 ‘깨달음의 왕(覺皇)’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각황전은 신라시대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 옆면 5칸 규모의 다포집이다. 다포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외에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자리 잡고 있는 형태. 특히 처마 밑에 꽉 들어찬 공포는 각황전에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다. 당우는 위아래가 트인 통층이며, 2층에는 커다란 창을 내 조명역할을 하도록 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외부에서는 단청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내부 천장을 보면 화려했던 단청의 흔적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화엄종 대표사찰이었던 화엄사는 비로자나부처님을 본존으로 한다. 한편 각황전에는 모두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돼 있는데, 다보불과 석가모니불, 아미타불을 비롯해 문수.보현.지적.관세음보살입상 등이 모셔져 있다. 이들 불보살상은 각황전 중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고찰답게 화엄사는 이외에도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보 12호인 각황전앞석등은 높이 6.4m로 세계 최대다. 보물 300호인 화엄사 원통보전앞사자탑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치고 있는 모양이다. 국보 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은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 합장한 채 서있는 인물상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탑 남쪽에는 또 석등이 있는데, 설화에 따르면 탑 안의 스님은 화엄사 창건주인 연기스님의 어머니이고, 석등을 이고 탑을 향해 꿇어앉은 것은 연기스님으로, 스님이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모습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320호/ 4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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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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