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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종 개창한 법안 문익선사 선법 펼친 도량

법안 문익선사가 강소성 남경 청량산 청량사에서 선법을 펼치며 ‘법안종(法眼宗)’을 열었다. 사진은 청량사 전경.

청량사는 육조(六朝)의 고도(古都) 남경(南京) 서쪽 청량산에 있다. 남경성(南京城)은 강소성 중부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장강(長江, 양자강)이 흐르고 성내에는 명산이 겹겹이 있으며, 진회하(秦淮河)가 관통하고 있다.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진회하를 중심으로 다양한 건축물이 들어서 ‘십리진회(十里秦淮)’라는 명칭을 얻었다. 상업의 발달은 문화의 번영을 이끌어 성 내외 명산에는 각 종파 사찰들이 건립되었는데, 남조시기부터 480여 사찰이 세워졌다. 

법안 문익선사도 남경 청량산 청량사에서 선법을 펼치니, ‘법안종(法眼宗)’ 발원지이다. 법안종이란 명칭은 문익선사 입적 후에 황제에게 받은 시호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원의 역사

청량사는 남조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청량산은 석두산(石頭山), 석수산(石首山) 등으로도 칭한다. 남조 양무제, 당대 온정균, 송대 왕안석, 소동파, 청대 <유림외사(儒林外史)> 작자 오경재(吳敬梓) 등 수많은 이들이 청량사 관련 시문을 남겼다. 남당 승원 원년(938) 원종 황제는 사찰을 중건해 예를 갖추어 문익선사를 주지로 모시고 사찰명을 ‘석두청량대도량(石頭淸凉大道場)’으로 개명하였다. 이로부터 석두산을 청량산으로 칭하게 되었다.

북송 태평흥국 5년(980) 막부산 청량광혜선사(淸凉廣惠禪寺)에 소장하고 있던 제왕들이 하사한 전적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로인해 사찰은 더욱 흥성하게 되었다. 순우 12년(1252) 산 정상에 황제 피서처인 취미정(翠微亭)을 세우니, 뛰어난 경관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명대 건문 4년(1402) 후에 영락제가 된 연왕(燕王) 주체(朱)가 사찰을 중건하고 ‘청량척사(凉陟寺)’라고 사액(賜額)하였다. 당시 사찰 규모는 상당히 커서 터가 20무(畝, 약 4000평)에 달하였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사찰 건축물은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산의 수목마저 전부 베어져 황량하게 되었다. 근대 이르러 사찰 중요 건물들을 중건하였으나, 일본군 침략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중국정부가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현재는 남경의 유명한 관광구가 되었다. 2009년 6월20일, 강소성 남경시 청량사는 정식으로 법회를 열어 중국불교 법안종 조정(祖庭)임을 선포하고 새롭게 수리를 마쳐 개방하였다.

사원 현황

청량산 공원에 들어서면, 양변에 산이 늘어서 있으며, 가운데 좁고 긴 분지가 있는데, 점차 높아지는 형태로 마치 의자 같은 모습이다. 현재 청량사는 공원 내 청량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안에 들어서면 빨간 기둥과 황색 벽으로 이루어진 불전이 세워져 있고, 불전 뒤에 붉은 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들이 배열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최근에 복원된 청량사이다. 사찰 주변은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고, 대나무와 수목, 화초들을 심었으며, 붉은 벽과 파란 기와 등을 사용하여 청정한 명승지로 꾸몄다. 사찰 건축 면적은 287.1㎡이며, 대지는 400㎡이다.

법안종 선법도량인 청량사 일주문.

사찰 가운데에 최근 조성된 커다란 쇠솥이 하나 있는데, 표면에는 보시한 여신도들 이름이 주조되어 있다. 사찰 정문 앞 담으로 둘러진 원형의 문에는 ‘고청량사(古淸凉寺)’라고 쓰여 있다. 사찰 안에는 도금한 대보살이 반좌(盤坐)하고 있으며, 양변에 18나한(羅漢)이 줄지어 있는데, 보살과 나한의 조형이 매우 아름답다.

사찰 뒤에는 피서궁인 덕경당(德慶堂)이 있는데, 남당(南唐) 황제인 이욱(李煜)이 친필로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뒤편에는 육각정이 있다. 육각정 안에는 남당 황제 이경(李璟)을 위하여 보대(保大) 3년(945) 광혜선사가 판 옛날 우물이 있는데 ‘남당의정(南唐義井)’, ‘보대천(保大泉)’이라고도 칭한다. 우물물은 풍부하고 수질이 매우 좋아 스님들이 마셨으며, 늙어도 백발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환양정(還陽井)’이라고도 칭한다. 1982년 공원관리처에서 우물에 정자를 건립하고 북쪽에 석비를 세웠는데, 남면에 ‘환양천(還陽泉)’이라고 새기고 뒤편에 우물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사찰 뒤 산 정상에는 남당 시기에 취미정(翠微亭)을 건립하였는데, ‘서풍정(暑風亭)’이라고도 한다. 송대 문인 오연(吳淵)이 찬술한 <건취미정기(建翠微亭記)>에는 “취미의 풍경은 실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찬탄할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청량사 구조는 일반적인 사원 배치와는 다르게 중국의 원림(園林)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전문가들은 대표적인 불교문화와 원림문화의 융합으로 평가하고 있다.

청량사는 법안종 조정으로 국가2급문화재 향로(香爐)를 비롯해 불교 문물이 많다. 이 가운데 남당 황제 이경의 ‘팔분서(八分書)’ 동우(董羽)의 ‘용화(龍畵)’, 이소원(李遠)의 ‘초서(草書)’는 진귀한 예술품으로 청량사의 ‘삼절(三絶)’로 칭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역대 수많은 문인과 화가의 작품이 사찰에 소장되어 있다.

청량 문익선사의 선사상

청량 문익선사는 속성이 노(魯)씨이고, 여항(余杭, 杭州)사람이며, 당 희종 광계(光啓) 원년(885)에 태어나 남당 중흥(中興) 원년(958)에 입적하였다. 7세에 순안(淳安) 지통원(智通院)에서 출가하여 12세에 월주(越州, 절강성 소흥) 개원사(開元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명주(明州, 절강성 영파) 아육왕사(阿育王寺)에서 율(律)과 유학(儒學)을 익혔다. 후에 선사상에 매료되어 남쪽으로 선사를 찾아 유력하였다. 현사사비 제자인 나한 계침선사 문하에서 ‘일체현성(一切現成)’의 개시(開示)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후 임천(臨川, 지금의 강서성 임천시)에서 법을 열었다.

남당 황제 이승(李昇)이 명성을 듣고 선사를 금릉(金陵, 현 남경)으로 청하여 먼저 보은원에 주석하게 하였으며, 후에 청량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에 따라 후인들은 청량사에 주석하여 청량문익(淸文益)이라 불렀다. 당시 선사 문하가 매우 흥성하여, “삼좌(三坐) 대도량(大道場)은 아침, 저녁의 설법 때, 제방 총림이 다 존경하여 교화되었다. 이역(異域)에도 법을 사모한 자가 있어, 멀리 건너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가 입적 후, 남당(南唐) 군주 이경(李璟)에 의해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라는 시호와 ‘대지장대도사(大智藏大導師)’ 시호를 받았다. 이러한 시호에 따라 문익선사가 개창한 종을 법안종이라 한 것이다.

문익선사 선사상은 선사가 개오한 인연인 ‘일체현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선사의 <어록>에 따르면, 문익은 일찍이 복주(福州)에서 장경(長慶)선사를 참배하였다. 그러나 깨달은 바가 없어 다시 그를 떠나 제방을 참학하였다. 지장원(地藏院)을 지날 때 눈을 만나 잠시 머물러 나한계침(羅漢桂琛)선사를 참알하였다. 화로 옆에서 계침선사가 문익에게 “이번에 어느 지방으로 가는가?”라고 묻자, 문익이 “행각(行脚)하러 갑니다”라고 답하였다. 계침선사가 다시 “무엇이 행각인가?”라고 하자, 문익이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계침선사가 “가장 친절함을 모르는 구나”라고 의미 깊은 말을 하였다.

법안 문익선사 진영.

눈이 그친 후에 문익이 떠나려는데 계침선사는 입구까지 나왔다. 이때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계침선사가 문익에게 “너는 늘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을 말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집 아래 돌을 가리키며 문익에게 “이 돌은 마음 안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 밖에 있는가?”라고 묻자, 문익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 돌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계침선사가 곧 다시 “너는 행각하는 사람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데, 어째서 돌을 마음에 두는가?”라고 하자, 문익은 말이 궁벽해져 대응하지 못하고 행장을 내려 놓으며 남기로 결정하고 계침선사를 따라 참선하였다. 

한 달 동안 매일 견해를 밝혀 도리를 말하였다. 그때 계침선사는 매번 “불법(佛法)은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문익이 “저는 이미 언어의 궁리(窮理)를 끊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계침선사가 “만약 불법을 논하자면, 일체가 현성(現成)한다”라고 하자, 문익은 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이러한 까닭에 문익선사 선사상은 ‘일체현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는데, 제자 천태덕소(天台德韶)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불법(佛法)은 눈앞에 드러난 것(現成)이요,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어찌 도(道)가 원만하여 태허(太虛)와 같아, 부족함도 없고 남음도 없음을 보지 못하는가. 만약 이와 같으면 또한 누가 부족하게 하고 누가 남게 하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누가 깨달은 자이고 누가 깨닫지 못한 자인가? 따라서 도는 동쪽으로 가도 또한 상좌(上座)이고, 서쪽으로 가도 상좌이며, 남쪽으로 가도 또한 상좌이고, 북쪽으로 가도 또한 상좌이다. 무엇으로 인하여 동서남북이 있겠는가? 만약 깨닫는다면, 자연히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길이 끊기어, 일체(一切) 제법(諸法)이 앞에 나타난다. 무슨 까닭으로 이러한가? 법신(法身)은 상(相)이 없으나, 눈에 부딪치면 모두 형상이 생긴다. 반야(般若)는 앎이 없어, 인연을 대하여 비추니, 일시에 철저히 깨달아 얻을 수 있겠는가? 여러 상좌(上座)와 출가한 이들이 함께 무엇을 하는가? 이것이 본유(本有)의 이치이니, 나누어져 밖으로 하지 않는다.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을 통달하였기 때문에 사문(沙門)이라 칭하였으니, 만약 마음을 알아 밝디 밝게 하면, 실로 털끝만큼의 장애도 없다.”

이로부터 문익선사가 ‘일체현성’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는 <오가종지찬요(五家宗旨纂要)>에서 “법안의 가풍(家風)은 바로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聞聲悟道),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見色明心). 구(句) 속에 예리함이 숨어 있고, 말속에 울림이 있다. 삼계유심(三界唯心)으로 종(宗)을 삼아 불자(拂子)로 그것을 밝힌다”라는 법안종 평가에서도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일체현성’은 화엄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실제 문익선사가 찬술한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는 화엄학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종문십규론>에는 “이치(理)와 일(事)이 서로 위배되어, 탁하고 깨끗함을 나누지 못한다”는 병폐를 바로 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문익선사는 “대개 조불(祖佛)의 종(宗)은, 이치를 갖추고 일을 갖추었다. 일은 이치를 의지해 서고, 이치는 일을 빌려 밝혀진다. 이치와 일이 서로 바탕이 되어, 또한 눈과 발이 같다. 만약 일이 있는데 이치가 없으면 진흙에 막혀 통하지 못하고, 만약 이치가 있는데 일이 없으면 질펀하게 젖어 돌아오지 못한다. 그 불이(不二)를 바란다면, 원융(圓融)을 귀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이사불이(理事不二)’, ‘이사원융(理事圓融)’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선사 <어록>에도 “선사가 ‘단지 예컨대 만상 가운데 홀로 몸을 드러내면, 만상을 뺀 것인가, 만상을 뺀 것이 아닌가?’라고 하자, 덕소(德韶)가 이르길, “빼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두 개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지켜보던 몇몇 사람이 연달아 ‘만상을 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선사는 ‘만상 가운데 홀로 몸을 드러냈다’고 하였다”는 문답이 있다. 이로부터 ‘일체현성’과 화엄의 ‘이사원융’ 도리를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남경 청량산 청량사 지도. 

이와 같이 법안종 선사상은 화엄학과 선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보이는데, 특히 문익선사의 가장 유명한 제자 천태덕소의 법을 계승한 영명연수(永明延壽)는 <종경록(宗鏡錄)> 100권을 찬술하여 본격적인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제창하고 있다. 연수선사 ‘서문’에는 “이제 조불(祖佛)의 대의(大意)와 경론(經論)의 정종(正宗)을 자세히 하고자, 번잡한 글을 제거하고, 오직 요지를 가려 가설을 펼쳐 묻고 답하고, 널리 이끌어 증명한다. 일심(一心)을 들어 종(宗)으로 삼고, 만법을 거울처럼 비춘다. 옛날에 만든 깊은 뜻을 엮고 이어, 보장(寶藏)의 원만함을 포섭하여 간략하게 하고, 이와 똑같이 나타내고 드날려, 그것을 록(錄)이라고 하였다”고 <종경록> 찬술 목적을 밝히고 있다. 문익선사의 <종문십규론>을 계승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선종오가 중 가장 풍부

문익선사가 개창한 법안종은 ‘오가’ 가운데 마지막으로 성립된 종파이다. 비록 전승은 5대 이후로 미미해지지만, 문익선사와 천태덕소, 영명연수 등의 사상은 지금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법안종은 선종오가 가운데 저술이 가장 풍부하며, 특히 ‘선교불이(禪敎不二)’, ‘선교융합(禪敎融合)’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청량사는 법안종 조정으로 선종사에서 분명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청량사는 복원이 진행되고 있으며,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본래 모습을 되찾고자 속도가 비교적 완만하다. 머지않아 천년 고풍이 온전하게 복원되어 우리 눈앞에 다시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불교신문 3760호/2023년3월21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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