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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종 조사 동산 양개선사의 홍법 도량

 

동산 양개선사가 홍법하던 강서성 의풍현 보리선사에 있는 그의 사리탑.

조동종(曹洞宗) 조사 동산 양개선사가 홍법하던 도량이 강서성 의풍현 동안향 ‘동산(洞山)’에 있는데, ‘신풍산(新豊山)’이라고도 칭한다. 동산 양개선사가 개산한 보리선사는 고목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주위 자연환경이 아름답다. 멀리부터 첩첩 쌓인 산봉우리가 꼬리를 물고 달려와 짙푸르고 울창한 나무들과 대나무가 하늘과 태양을 가린다. 주변 아홉 개 커다란 지형이 중앙으로 집중하여 마치 동굴 같은 형태를 이루어 ‘동산(洞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사원의 역사

당나라 대중 연간(847~859) 양개(良价)선사가 스승 운암 담성(雲巖 曇晟) 선사와 이별할 때,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담성선사는 “여기에서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렵겠구나”라고 말하였다. 양개는 “안 만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답한 후 양개는 다시 담성선사에게, “100년 후, 홀연히 어느 사람이 화상에게 ‘여전히 선사의 참됨을 아득히 얻습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담성선사는 잠시 침묵한 후, “그저 이것이 그렇다”라고 말하였다. 동산은 오랫동안 침묵하여 이해 할 수 없었다.

담성선사는 곧 이어 “양개 아사리여! 깨닫는 일에는 모름지기 자세히 살펴야할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양개선사는 계합하지 못하고 의심을 품고 유행하던 가운데 물가를 지나다 물속 그림자를 보고 깨달음을 얻고 유명한 게송을 남겼다. “결코 남에게서 찾지 말지니, 아득히 자신과 더 멀어질 뿐이다. 나는 이제 홀로 가지만, 곳곳에서 그를 보게 된다네. 그는 지금 바로 나이지만, 나는 그가 아니라네. 반드시 이렇게 알아야만 비로소 여여와 계합하리.”

이것이 바로 선종사 가운데 유명한 ‘과수도영’의 공안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양개선사는 이곳에 머물러 절을 짓고 이름을 ‘광복사(지금의 보리선사)’라고 하였다. 양개선사가 법을 펼치니, 세상에 알려져 제방의 납자와 선남선녀들이 참방하러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조당집> 권6에는 양개선사가 동산에 머물자 500여 대중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산 양개선사 진영.

현재 사찰 뒤에 있는 동산 양개선사 사리탑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새겨져 있다. “학인들은 항하사 같이 많으나 깨달은 사람이 별로 없음은, 혀끝에서 길을 찾는데 허물이 있도다. 형체를 잊고 종적을 없애려는가! 노력하며 은근히 공(空) 속을 걸어라. 상(相)을 잊고 흔적을 지워야 하고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은 수행을 하라.”

<양개선사어록>에 실린 부촉게로 이 게송을 마치고 결가부좌하여 홀연히 입적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중이 통곡하니 양개선사가 홀연히 눈을 뜨고 대중에게 일갈하였다. “출가 사문이란 마음에 외물을 따르지 말아야 참된 수행자로다. 살면 고달프고 죽으면 쉬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가?” 그리고는 주사(主事)에게 우치재(愚癡齋)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모두 섭섭하다기에 7일을 더 머물다 재가 끝나자 양개선사는 비로소 단좌(端坐)하여 입적하였다.

함통 10년(869) 3월 양개선사가 동산에서 입적한 후, 함종황제가 ‘오본선사(悟本禪師)’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법신을 광복사 뒷산에 모시고 부도탑을 혜각탑, 개조탑이라고 칭했다.

사원 현황

동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산 양개의 고사 ‘과수도영(過水睹影)’ 옛 고사가 얽혀있는 봉거계(逢渠溪)이다. 봉거계는 여전히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다. 봉거계에는 지금도 봉거교가 있다. 송나라 때(1098) 이 지방의 가난한 불교신도인 뇌사십삼낭(雷四十三娘)이 벼이삭을 주워 모은 돈으로 돌다리를 만들어 보시한 것이다. 이 공덕으로 뇌사십삼낭 집안은 나날이 번창했으며, 후손들은 좋은 관직과 복락을 구족했다고 전한다.

봉거교를 지나면 길옆에 ‘목어석’이 누워있다. 모양이 목어(木魚)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두드리면 목탁과 아주 비슷한 소리가 난다. 목어석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면 길 양쪽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에는 절의 산문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야합산(夜合山)’이라 칭한다. 지금도 태양 그림자에 의해 저녁 때면 두 바위는 합쳐지고, 날이 밝으면 또 다시 열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석벽에는 원나라 도창선사의 친서로 새겨진 한편의 시가 인상적이다.

“산문에는 잠금이 없으나 해가 동서로 움직여, 열리고 닫힘이 아득히 까마귀(해)와 토끼(달)가 나는 것과 같도다. 날이 밝기 전에 해탈(解脫)하지 못하니, 누가 감히 닭 울음소리를 짓겠는가!”

‘조동조정(曹洞祖庭)’이라 새겨져 있는 산문 옆에는 한 그루 작은 소나무가 있다. 원래 높이가 10m가 넘었고, 둘레가 13m에 이르렀지만, 2005년 태풍이 불 때 벼락을 맞았다. 이듬해 봄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줄기 껍질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지금은 나뭇잎이 무성하다. <오등회원(五燈會元)>의 기록에 따르면, 이 소나무는 동산양개 제자 청림 사건선사가 심으면서 “높이는 3척(1m 정도) 남짓인데, 나뭇잎의 푸름이 파란 풀을 덮는구나. 어느 시대 사람들이 이 소나무의 늙음을 볼 수 있을까?”라는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동산양개 선사의 선사상

조동종 개산 종사인 동산 양개선사는 당 헌종 원화 2년(807)에 태어났다. 월주(越州) 제기( 지금의 절강성 제기) 사람이며, 속성은 유(兪)씨이고, 고향 사찰에서 출가하였다. <반야심경>을 읽다 “눈, 귀, 코, 혀, 의지가 없다(無眼耳鼻舌身意)”는 뜻을 물었으나 원주가 답하지 못하였다. 원주는 양개선사를 오설화상에게 인도하고, 3년 만에 숭산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이후에 행각을 청하니, 오설화상은 남전 보원선사를 추천하여, 남전선사를 참알했다.

하루는 남전선사가 “내일 마조대사 제사를 지내는데, 마조대사가 오시겠는가?”라고 묻자 대중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양개선사가 나서서 말했다. “도반이 있기를 기다렸다 오십니다”라고 답하자 “이 사람이 후배이기는 하지만 꽤 다듬을 만하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개선사는 “화상은 양민을 눌러 노비로 만들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조당집> 6권에는 동산 양개선사가 “이름이 천하에 퍼지고, 작가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양개선사는 다음으로 위산 영우선사를 참배하여 남양혜충 국사의 무정설법을 토론하였지만, 문답에서 계합할 수 없었다. 위산선사 추천으로 운암산 담성 문하에 의탁하였는데, <조당집>에는 “현묘한 요지를 다하도록 깨달았다”고 하였는데, 이때 기연이 앞에서 언급한 ‘과수도영’이다.

동산 양개선사가 개창한 조동종 학인을 제접하는 방식에 대하여 “면밀함이 서로 잘 들어맞고, 묘용을 친절하게 베풀며”, “마음자리를 궁구한다”라고 논한다. 또한 <인천안목> 권3에서는 “가풍이 세밀하고, 언행이 상응하며, 기연(機緣)에 따라 사물을 통하고, 말에 나아가 학인을 제접한다”고 평하고 있다. 조동종 선사들이 선을 가르치고, 학인을 제접할 때, 비교적 온화하고, 응기접인하는 방편을 보이며, 간략하게 말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조동종에 대하여 후대에서는 다음과 같이 종합하고 있다.

당 대중 말에 신풍산에 이르러 배우는 무리들을 가르치고, 그 뒤 교화가 성하여 예장의 균주 동산(洞山)에 머물렀다. 권(權, 방편)으로 오위(五位)를 열고, 세 가지 근기를 잘 제접하였다. 일음(一音)을 크게 열고, 만품(萬品)을 널리 홍양하였다. 보검을 바로 잡아 빼니, 빽빽한 산림과 같은 견해를 베었다. 묘문(妙門, 禪門)을 널리 펼치고, 수많은 실마리의 천착을 끊는다. 늦게 조산(曺山)의 밝은 종지를 얻고, 묘한 노래가 아름답게 퍼졌다. 도는 군신을 합하고, 치우침과 바름은 서로 감아 돈다. 이로부터 동산의 현풍(玄風)은 천하에 퍼져, 제방의 종장(宗匠)들이 함께 그를 받들었다.

조동종에서 학인을 접인하는 선법으로는 ‘오위(五位)’설과 ‘삼종삼루(三種漏)’, ‘삼종타(三種墮)’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조동종의 ‘오위’와 관련된 선법은 ‘정편오위(正偏五位)’, ‘공훈오위(功勛五位)’, ‘군신오위(君臣五位)’ 등이 있다. ‘정편오위’는 ‘정중편(正中偏)’, ‘편중정(偏中正)’, ‘정중래(正中來)’, ‘겸중지(兼中至)’, ‘겸중도(兼中到)’ 등 다섯 가지를 말한다. 양개선사의 <보경삼매가(寶鏡三昧歌)>에서는 “육효(六爻)를 거듭 떠나, 치우침과 올바름(偏正)이 서로 갈마들어(回互), 겹치어 셋이 되며, 변함을 다해 다섯이 되었다”고 설하고 있다.

‘정편오위’에 대하여 양개선사 제자인 조산 본적은 이렇게 해석했다. “정위(正位)는 공계(空界)에 속하여, 본래 무물(無物)이고, 편위(偏位)는 색계(色界)로 만상(萬象)의 형상이 있다. 정중편(正中偏)은 이치[理]를 등져 일(事)에 나아가고, 편중정(偏中正)은 일을 버리고 이치에 들어간다. 겸대(兼帶)는 중연(衆緣)에 그윽하게 상응하여 제유(諸有)에 떨어지지 않고, 오염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아, 그러므로 이르기를, ‘텅 비고 오묘한 대도는 집착이 없는 진종(眞宗)이다’라고 한다.”

따라서 ‘정’은 체(體), 이(理), 공(空)이고, ‘편’은 용(用), 사(事), 색(色)이다. 그러므로 ‘정편오위’는 실제로 체용(體用), 이사(理事), 공색(空色)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관계라 할 것이며, 이러한 관계를 통하여 ‘무착(無著)’의 경계에 도달하도록 하는데, 그것은 무심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양개선사는 ‘정편오위’ 각 위에 대하여 게송을 짓고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중편’으로, “삼경의 초야 달빛 밝은 앞에, 서로 만나 몰라봄을 의아해하지 말지니, 오히려 은은히 옛날을 싫어함을 품는다”고 한다. ‘위’에서는 이를 버리고 사를 취하는 것으로, 학인이 다만 사(事), 용(用), 색(色)을 알뿐이고, 이(理), 체(體), 공(空)은 알지 못하여 이사(理事), 체용(體用), 공색(空色), 정염(淨染)의 관계를 나누게 된다.

두 번째, ‘편중정’에서는 “눈 먼 노파가 옛 거울을 만나니, 얼굴을 봄에 분명하여 달리 참됨이 없는데, 그만두고 다시 어리석음은 오히려 그림자를 찾는구나.” 여기에서는 사(事)를 버리고 이(理)에 들어간다. ‘위’에서 학인은 비록 이(理), 체(體), 공(空), 정(淨) 등에 대한 인식에 이르고, 사(事), 용(用), 색(色), 염(染) 등이 가상(假象)으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지만, 사(事)를 버리고 이(理)에 들어가는 것도 단편적일 뿐만 아니라, 이(理), 체(體), 공(空), 정(淨) 등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님을 인식하지 못한다.

세 번째, ‘정중래’에서는 “없는 가운데 길이 있어 진애(塵埃)와 떨어지고, 다만 능히 지금의 싫어함과 부딪치지 않으니, 또한 전조(前朝)를 이기고 말하는 재주를 끊는구나.” ‘위’는 이를 버리고 사에 나가는 것이 아니고, 사를 버리고 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이(理), 체(體), 공(空), 정(淨)을 인식하였으며, 이로부터 사(事), 용(用), 색(色), 염(染) 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그 관계가 멀어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이, 체, 공, 정이라는 일면에 치우쳐 있다.

네 번째, ‘겸중지’에서는 “양쪽 칼날이 서로 부딪침에 피할바 없으니, 서로 받들어 불 속의 연꽃 같아, 완연히 절로 뜻이 하늘을 찌른다.” ‘위’에서는 학인이 이미 현상세계가 환유(幻有)임을 인식하고, 이러한 환유를 통하여 본체세계 인식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한 경계는 아니다. 다섯 번째, ‘겸중도’에서는 “유무에 떨어지지 않음을 누가 감히 알겠는가? 사람마다 중류(衆流)를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를 끊어 다시 잿구덩이로 돌아가 앉는다”라고 한다. 

여기에 이르면, 유무에 떨어지지 않고, 체용을 모두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이사, 체용, 공색, 정염 등이 겸대(兼帶) 상태에 이르렀고, 오염되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정(正)도 편(偏)도 아니며, 이사가 모두 밝고, 체용에 집착이 없어야 비로소 대도에 합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높은 경계가 오히려 가장 평범한 상태라고도 하겠다.

또한 양개선사는 ‘공훈오위’를 설하는데, 이는 수행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향(向), 봉(奉), 공(功), 공공(共功), 공공(功功)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양개선사어록>에는 상당법어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향(向)의 때는 무엇을 하는가? 봉(奉)의 때는 무엇 무엇을 하는가? 공(功)의 때는 무엇을 하는가? 공공(共功)의 때는 무엇을 하는가? 공공(功功)의 때는 무엇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승려가 묻기를, “무엇이 향(向)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밥 먹을 때 무엇을 하는가?”라 하고, 다시 “모름지기 힘을 다하여 배부름을 잊고, 음식을 쉬어 다시 주리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무엇이 봉(奉)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등질 때는 무엇을 하는가?”라 하고, 다시 “다만 고관(高官)이 귀한 줄 알고, 홀로 본래인(本來人)을 진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공(功)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괭이를 내려놓을 때는 무엇을 하는가?”라 하고, 다시 “손을 거두어 단정히 앉으니, 백운이 그윽한 곳에서 한가롭구나”라고 하였다. “무엇이 공공(共功)입니까?”라 하자, 선사는 “색을 얻지 못한다”라 하고, 다시 “흰 가루는 흔적을 찾기 어렵고, 장안에 머지않아 머문다”라 하였다. “무엇이 공공(功功)입니까?”고 하자, 선사는 “함께 하지 못한다”라 하고, 다시 “뒤섞여 거리낌이 없는 곳이니, 이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공훈오위’는 앞의 ‘정편오위’와 유사한 과정이며, 또한 <양개선사어록>에는 오위에 대하여 역시 각 게송을 남기고 있다. 마지막의 ‘공공’에 대한 게송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머리의 뿔(번뇌)이 조금 생겼는데 이미 견디지 못하고, 의심하여 부처를 구함이 너무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까마득한 공겁(空劫)은 인식이 없어, 기꺼이 남쪽을 향해 53번을 물었다.” 이 역시 무공용(無功用)의 완전한 자유의 경계라 하겠다.

‘군신오위’는 앞에서 설명한 ‘정편오위’와 유사한데, 이를 군신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인천안목> 권3에는 조산본적의 “군신의 편정(偏正)으로써 말함은, 범하고자 하지 않음이요, 그러므로 신하가 임금을 칭함에, 감히 말을 배척하지 못함이 옳다. 이것은 내 법의 종요(宗要)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러한 것은 조동종 선사들이 현실적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당시는 지방 절도사인 번진(藩鎭)의 세력이 급격히 강화되면서 황권(皇權) 세력이 쇠약해진다. 이러한 현실에서 조동종 선사들은 ‘군신오위’로 군주와 신하의 화합을 제의하면서 번진 세력을 반대하지만 절대 황권도 찬성하지 않는다. 선사들은 군주나 신하가 어느 한쪽에서 지나친 권한을 갖는 것이 결코 민생의 평안을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외에도 조동종이 학인에게 가르치는 선법에는 앞에서 언급한 삼종타(三種墮), 삼로접인(三路接人), 사빈주(四賓主), 삼종삼루(三種漏) 등이 있다. 이러한 선법들은 모두 조동종 종풍의 치밀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출세간의 풍광 연출

보리선사는 동산 양개선사가 개산하면서부터 해외의 불자들이 받드는 조동종 본사가 되었다. 지금도 동산은 풍경 등 자연환경이 아름다워 마치 인간세상의 소란과 번잡함을 멀리한 듯하다. 봄의 꽃, 가을의 달, 여름의 바람, 겨울의 눈은 마치 출세간의 풍광을 연출하는 듯하다. 그에 따라 옛적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문인들과 시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현재 보리선사는 시대에 맞게 복원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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