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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종 개창한 운문 문언선사 선법 널리 연 도량

운문종 개창한 문언선사가 선법을 널리 편 광동성 소관시 대각선사 운문불학원 앞에서 필자 법지스님.

운문종(雲門宗)은 남종 오가 가운데 네 번째 종파이고, 당이 멸망한 후 5대10국 시기에 운문 문언선사가 개창하였다. 광동(廣東) 소주(韶州, 5대10국 시기에 불리던 지명으로 현재는 소관시) 운문산을 본산으로 영남(嶺南)에 융성하여 강서, 호남, 사천, 복건 등으로 널리 퍼졌다. 문언선사는 당시 유명한 선승들을 참알하고 마지막으로 운문산 광태선원(현 대각선사)에서 선법을 선양한다. 5대10국과 북송 시기에 운문종은 남종 오가 가운데 가장 커다란 세를 과시하였다.

사원의 역사

923년, 60세가 된 문언선사는 남방 10국 가운데 한 왕조인 남한(南漢)의 왕에게 허락을 받고 영수사(靈樹寺)에서 운문산으로 옮겨 5년 만에 도량을 완성하였다. 문언선사 비명에는 당시 사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방에서 구름이 모이고, 불전(佛殿)의 처마와 기둥은 날아오를 듯하고, 가람의 전각들이 물고기 비늘같이 꼬리를 물었구나. 깊은 골짜기에 그윽한 샘물이 흐르고,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넘나든다. 높이 솟은 소나무와 짙은 대나무 향기가 바람 따라 흐르니 마치 음악이 들리는 듯하구나. 30년이 넘도록 대중이 500명이 넘지만, 승중(僧衆)이 일용할 대중공양이 각 지방으로부터 들어와 곳간에 가득 차니, 사위성(舍衛城)과 달라도 영산(靈山)과 어찌 다를 바가 있겠는가!”

이러한 내용을 보면, 문언선사가 개창한 사찰 규모가 상당히 거대하고, 수많은 대중들이 머물렀으며, 또한 수많은 신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27년 남한왕은 ‘광태선원(光泰禪院)’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후에 다시 ‘증진선사(證眞禪寺)’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문언선사는 만년에 이곳에서 주석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선법을 널리 펼쳤다. 963년 ‘대각선사(大覺禪寺)’라고 사명을 바꾸어 지금까지 내려오지만, 절이 운문산 산기슭에 있어 사람들은 ‘운문사(雲門寺)’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운문사는 개산 이후 10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전란 등으로 소실과 복원을 반복하였고, 근대에 이르러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근대 시기에 남화선사(南華禪寺)에 주석하였던 허운(虛雲) 노장이 운문사를 방문했다 가시덤불로 덮여 있고 무너진 담벼락 속에 운문 문언선사 육신(肉身)과 불상이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복원 원력을 세웠다. 그로부터 1943년부터 1951년까지 대웅전과 많은 전각을 새로 짓고 불상과 보살상을 100좌 넘게 봉안하였다. 이후 운문사는 다시 계율을 설하고 수선안거를 시작하니, 수많은 수행승이 모이게 되었다.

사원 현황

해발 1215m 되는 운문산은 높은 산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하늘을 찌른다. 운문종 발원지인 운문사는 육조(六祖)가 주석했던 남화선사(南華禪寺)에서 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천년고찰이다. 현재 사원은 1984년 중수한 것으로, 1만2000여 평방미터로 전체적으로 장엄하고 우아하며 풍격(風格)도 독특하다.

방생지를 제외하고 180여 건축물이 서로 이어져 일체를 이루고 있다. 주요 전각은 산문, 천왕전, 대웅보전, 법당, 종루, 고루, 선당, 재당, 교학루, 공덕당, 연수당 등이 있다. 그 외에 허운화상기념당과 사리탑 등이 있다.

운문사는 건축 양식이 독특할 뿐 아니라 실내 장엄도 다르다. 예를 들면 대웅보전 석가모니불상 앞에 두기의 작은 미얀마 옥불상을 모셨는데, 1좌는 입불이고 다른 1좌는 와불이다. 세 벽은 모두 도자기로 된 대형 불교 탱화인데, 길이 24m, 높이 4m로 중국 불교회화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벽화로 꼽힌다. 벽화 아래에는 18나한이 있고, 그 위에는 24제천상이 모셔져 있다.

사원에 운문불학원이 있다. 대문 양측에 불원(佛源)스님이 쓴 “자교오종(籍敎悟宗)으로 대각선사를 빛내고 농선병중(農禪幷重)으로 가풍을 세우다(藉悟宗光大覺, 農禪重樹家風)”라는 대련(對聯)이 있다. 매일 오후에는 불학원 스님들이 ‘농선병중’의 사풍(寺風)을 따라 함께 노작(勞作)을 하고, 해마다 음력 11월17일이면 전국에서 모인 납자와 불학원 대중이 함께 5주간 집중적인 선칠(禪七, 7일간의 좌선) 정진을 한다.

절 앞 200m 떨어진 곳에 ‘소서천(小西天)’이 있는데, 비구니 스님들만 수행하는 공간이다.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비구니 스님 전용 선방도 있어 100여 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9층으로 조성된 해회탑(海會塔)이 있으며, 허운스님이 기초를 닦고 불원스님이 1953년에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해회탑 주위에는 나한송 1250그루가 있다. 운문사 뒷산에는 아주 유명한 계화담(桂花潭)이 있다. 계화담은 벼랑에서 떨어지는 몇 십 미터 되는 폭포가 장관이고, 산비탈엔 계수나무가 빼곡하여 매년 8~9월이면 꽃향기가 가득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귀한 문화재도 보존되어 있는데, 남한(南漢) 시기(957, 964)에 완성된 운문 문언선사의 비(碑) 두 좌가 있다. 비에는 문언선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개산한 과정과 발전 상황이 기록돼 있다. 또 송나라 법지스님이 새긴 이도량비(移道場碑)가 있는데, 서체가 힘 있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밖에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러 스님들과 문인들이 남긴 시(詩)와 서예작품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운문 문언선사 진영.

 

운문 문언선사의 선사상

문언선사가 수립한 운문종 선풍(禪風)에 대하여 임제종 양기파 오조 법연(五祖 法演)선사는 “붉은 깃발을 번쩍인다”고 평하였으며, 천여 유칙(天如 惟則)선사는 <종승요의(宗乘要義)>에서 “운문종은 기품이 높고 고풍스럽다”라고 하여 선풍이 높아 오르기 쉽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지소선사는 <인천안목(人天眼目)>에서 운문종 종풍을 종합하여, “운문의 종지는 중류(衆流)를 절단하고, 의논을 용납하지 않으며, 범부와 성인이 길이 없어, 정해(情解)가 통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인천안목>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북두칠성에 몸을 감추고, 동산(東山)의 물 위를 홀로 걷는다. 바르게 밝혀 돌아보고 살피며, 털끝도 범하지 않고, 격외(格外)로 놓았다 잡았다하며, 말 앞에서 반드시 빼앗으니, 다만 칼끝에 길이 있고, 철벽에 문이 없으며, 칡덩굴과 등나무로 뒤엉킨 길을 치고 뒤집어, 상정(常情)의 견해를 자르니, 어찌 맹렬한 불길에 머묾을 용납하겠는가, 빠른 번개가 사량(思量)에 미치지 못한다.”

이로부터 운문종에서는 학인을 제접할 때, 늘 단편적인 말을 사용하고 언의(言意)를 초탈하여 정견(情見)을 남기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운문종 선풍이 위험하고 험준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송대 소해선사의 <운문광록(雲門廣錄)>에 붙인 서문(序文)에는 운문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사의 등불을 서로 이어, 수백 년간, 중류(衆類)를 벗어나고 인륜에서 멀어지며, 고금을 초월하여 묘함을 다하고 신통함을 다하여도, 천하에 도(道)가 성한 자는 몇 사람 뿐이다. 운문 대종사를 특히 최고로 여긴다. 잡아들이고 놓아주고 부정과 긍정함이 종횡으로 변화한다. 강과 바다를 열어 물고기와 용이 수영하는 방법을 얻었고, 하늘과 땅을 끊어, 귀신이 다닐 길이 없다. 초목 또한 마땅히 머리를 조아리고, 흙과 돌이 그것을 위해 빛을 발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잡아들이고 놓아주며, 부정과 긍정을 종횡으로 변화시킨다’는 활달한 선풍을 운문선의 특질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오대와 북송 시기에 운문종은 남종 오가 가운데 가장 흥성하게 되었다.

운문 문언선사(864~949)는 장(張)씨이고 절강 가흥 사람이다. 선사는 고향의 공왕사에서 지징율사를 따라 동진 출가하였다. <운문광록>에는 “모든 경전을 한 번 읽고 나면 두 번 볼 필요가 없다. 지징율사의 큰 관심과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상주(常州)에서 비구계를 받고 다시 지징율사에게 돌아가 여러 해를 시봉하였으며, 이후 여러 선사를 참알하였다.

먼저 목주 도종선사를 찾아 갔는데, 도종선사는 문언이 오는 것을 보고 문을 닫아버렸다. 문언이 문을 두드리자 도종선사는 누구냐고 물었고, 문언이 대답하자 도종선사가 다시 문언에게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질문했다. 문언이 “자기의 일이 아직 밝혀지지 않아 선사께 가르침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도종선사는 문을 열어 보고 다시 문을 닫았다. 이같이 3일 동안 문언이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으나 문밖에서 거절당했다. 3일째에 이르러, 도종선사가 문을 열 때, 문언은 곧 밀고 들어갔다. 도종선사가 그를 붙잡고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라”라고 재촉했다. 문언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목주가 곧 그를 밀고는 “진나라 때의 삐걱대는 경첩이다.(秦時轢鑽)”라며 문을 닫았는데, 문언의 다리가 문 사이에 끼었다. 문언이 여기에서 깨달았고, 이로부터 도종선사 문하에서 수년간 수학하였다.

그 후에 도종선사가 설봉 의존선사를 참알할 것을 권하였다. 문언선사가 설봉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어떤 화상을 만났다. 문언선사는 그 화상에게 설봉산 위에 가서 의존을 참배하려 하는가 묻자 그렇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문언선사는 설봉선사에게 몇 마디 전해줄 것을 청하며,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말 것을 다짐하자, 그 화상은 허락하였다. 문언선사가 부탁한 말은 설봉선사에게 “이 늙은 화상아. 어째서 머리의 쇠도리깨를 버리지 않는가?”라는 것이었다.

그 화상이 설봉선사에게 가서 문언선사가 부탁한 대로 하였다. 설봉선사는 그 말을 듣고, 내려와 화상의 가슴을 잡고, “빨리 말하라, 빨리 말하라!”라고 소리쳤지만 화상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 설봉선사는 그를 밀며 “조금 전 그 말은 네가 한 말이 아니구나”라고 하자 화상은 절강(折江)에서 온 선사가 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설봉선사는 여러 승려들에게 “500인의 선지식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하였다. 다음 날 문언선사가 설봉선사를 만났을 때, “무엇이 부처인가?”라고 묻자, 의존선사는 그에게 “잠꼬대 하지 말라”라 하였다. 문언선사는 곧 참배하고 3년을 머물렀다. 어느 날 설봉 의존선사가 “그대가 본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문언이 “나의 견처(見處)는 위로부터 여러 성인과 더불어 털끝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다. 문언은 설봉 의존선사로부터 종인(宗印)을 부촉 받았다. 의존선사가 입적한 후 문언선사는 비로소 설봉산을 떠나 여러 곳으로 행각하면서 많은 고승들도 만나며 이름을 사해에 떨쳤다.

문언선사는 이후 영수 여민선사 회상에서 수좌를 맡아 8년을 지냈다. 여민선사는 입적하기 전 남한(南漢) 황제에게 “인천안목을 구비한 이는 바로 우리 수좌 스님이다”라는 유서를 남겼으며, 황제는 그 뜻에 따라 문언선사에게 주지 자리를 부촉하고 자의(紫衣)도 하사하였다. 8년 후 문언선사는 운문산에 주석하면서 일가의 종풍(宗風)을 개창하였다.

운문 문언선사에게 큰 영향을 준 스승은 목주 도종, 설봉 의존, 영수 여민선사이며, 그 중 설봉 의존 법맥을 계승하였다. 또한 선사의 <유계(遺誡)>에는 “내가 영수(靈樹)선사에게 머물다 산으로 옮긴 것이 무릇 30여 년이다”라고 말하고, 30여 년 동안, “크게 홍법하여 교화하니, 선(禪)의 학인들이 모이고, 문에 올라 입실한 자를 다 기록 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 8권에 “이제 천하가 그를 숭상하여 운문종이라고 하였다. 그 법사가 무릇 88명이다”라고 하였으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사법제자가 61인,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76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득법제자 가운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선사로는 덕산 연밀, 향림 징원, 동산 수초, 파릉 호감, 쌍천 사관 등이 있다.

문언선사의 교화 방식은 다양하지만, 제자 덕산 연밀은 그를 ‘운문삼구(雲門三句)’로 개괄하였다. 덕산 연밀은 “내게 삼구(三句)의 말이 있어 너희들에게 보여주겠다. 일구는 함개건곤(函蓋乾坤)이고, 일구는 절단중류(截斷衆流)이며, 일구는 수파축랑(隨波逐浪)이다. 무엇으로 변론을 하겠느냐? 만약 변론이 나오면, 참학(參學)에 분위(分位)가 있음이요, 만약 변론이 나오지 않으면 장안의 길 위에서 나란히 굴러갈 것이다”라고 설하였는데, 이 삼구가 문언선사의 선법을 정리한 것이다.

‘함개건곤’은 사물(事物)의 보편성, 즉 사물의 본체를 의미한다. 본체는 보편하여 없지 않은 곳이 없으며,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 두루 구족함을 말한다. 운문종에서는 모든 사물을 진여 혹은 불성으로부터 현현한 것으로 진여불성이 우주만물의 본체임을 강조하며, 본체를 ‘돈오(頓悟)’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펴고 있다고 하겠다.

문언선사 <어록(語錄)>에 “모든 화상들은 망상하지 마라.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僧)은 승이고, 속(俗)은 속이니라”라고 설하는데, 이러한 구체적 존재인 자연에 일종의 보편성, 즉 보편적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건곤 그리고 만상, 지옥 및 천당, 사물 사물이 모두 참된 현상이요, 각각 모두 상하지 않는다.”라고 송(頌)하고 있다.

‘절단중류’는 운문선사가 학인들을 제접할 때 사용한 방법이다. 학인들의 생각을 끊는 방법인데 학습된 생각을 따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못하게 논리를 절단하는데 목적을 둔다. 문언선사의 유명한 ‘일자관(一字關)’은 한 글자로 학인들의 물음에 답하여 분별사량을 끊어 버리는 ‘절단중류’의 방편이다. 그에 따라 “퇴적된 산악이, 하나하나 다하여 티끌이 되고, 다시 현묘(玄妙)함을 헤아리면, 얼어붙은 쇠사슬이 와해되어 꺽인다”라고 송하고 있다.

‘수파축랑’은 학인들의 근기에 맞추어 법을 베푸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예리한 물음은, 높고 낮음이 이지러지지 않고, 여전히 병에 맞는 약처럼, 진단은 때에 맞음에 있다”고 송한다. 운문종에서는 ‘삼구’을 ‘취모검(吹毛劍)’, ‘운문검(雲門劍)’으로 말하는데, 날카롭고 예리하여 학인의 지해(知解)와 정식(情識)을 단숨에 단절하여 마음이 무심으로 돌아가 한 터럭도 붙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대각선사지도.

 

운문 문언선사 제자들은 영남(嶺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지에서 각 지방 종장이 되어 선법을 펼쳤으며, 송나라 때 유명한 운문종 선승으로는 설두 중현과 불일 설숭을 꼽는다. 전자는 운문종 중흥조이고, 후자는 송나라가 정책적으로 불교를 배척함에 따라 수많은 문인과 사대부들이 불교를 비판 할 때 하나하나 직접 설복하여 불교에 입문케 하였다.

농선병중으로 불법 선양

천년고찰 운문사는 초창기에 황제의 지원을 받아 규모가 가장 크고 호화롭게 조성되었다. 당시 선종 사찰로는 보기 드물다. 운문종 법맥은 200년 밖에 계승되지 못하고 송나라 때부터 점점 쇠락하였다. 다행히 현재 운문사는 다시 중창되어 세상에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운문종 법맥도 계승하고 있다. 특히 ‘농선병중(農禪幷重)’ 전통을 유지하면서 불법을 선양하고 있어 번잡한 현대인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대도량이다.

[불교신문 3756호/2023년2월21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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