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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종 운거 도응선사 ‘농선병중’(農禪幷重) 실천도량

조동종 선법을 계승한 운거 도응선사의 행화도량인 강서성 영수현 운거산 진여선사 대웅보전 전경.

운거산은 평균 해발 800m로 ‘천하제일의 선산(禪山)’이라 불린다. 1년 내내 구름과 안개에 싸여있어 ‘운거(雲居)’라는 이름도 얻었다. 운거산은 중국 강서성 구강시(九江市) 영수현(永修縣) 서남부에 위치하여 산세가 웅장하고 경치가 뛰어나다. 초목이 우거져 계절마다 아름답고 기후가 수행하기에 적합하다. 운거산 산정 주위에는 산들이 둘러싸여 있고 중간은 분지처럼 평탄하여 마치 연꽃 같아 연화성(蓮花城)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도 갖고 있다.

연화성 안 숲 속에 조동종(曹洞宗) 본사인 진여선사(眞如禪寺)가 자리한다. 조동종은 동산양개와 그의 제자인 조산 본적(曹山 本寂)이 개창하였다. 그러나 조산 본적선사의 법맥이 끊어지고, 동산 양개의 다른 제자 운거 도응(雲居 道膺)이 조동종 선법을 계승하였으니, 운거산 진여선사는 운거 도응선사의 도량이다.

사원의 역사

당(唐)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도용(道容)과 사마두타(司馬頭陀) 두 분이 운거산 정상에 올랐다 주위 산봉이 장벽을 이룬 가운데 중앙은 땅이 평탄하고 호수가 거울같이 맑은 것을 보고 절을 짓게 되었다. 도용선사와 그의 제자들이 운거산에서 70여 년간 불법을 펼치니, 당 헌종이 친히 ‘운거선원(雲居禪院)’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

당 희종 시기(883)에 운거 도응선사가 운거산에 올라 20여 년 주석하면서 사찰도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천하 총림의 모범이 되었으며, 학인들과 신도들이 운집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신라 이엄(利嚴)은 도응선사의 인가를 받아 귀국 후 수미산에 광조사(廣照寺)를 세워 우리나라의 조동종 수미산문(須彌山門)을 개산하였으며, 사후에 진철대사(眞澈大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하북성 백림선사(柏林禪寺)의 조주 종심(趙州 從)선사는 110여 세의 고령에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며칠을 걸어 와 도응선사와 함께 개당(開堂)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그에 따라 지금 연화성 입구에는 ‘조주관(趙州關)’이 세워져 있다.

법안종, 운문종, 임제종의 종장들도 다 같이 운거산 진여선사에서 정진하였으니, 선종도량 가운데 으뜸이다. 도응선사 후에 불인요원, 원오극근, 대혜종고 등 수많은 선승이 운거산을 거쳤다. 진여선사는 당나라 시대에 개산하여 청나라 시대까지 번창한다. 항일전쟁으로 무너진 사원을 근대 고승 허운 노장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러 스님들과 절터를 다시 개간하고 벽돌을 쌓아 복원하였다.

진여선사의 또 하나 특색은 농선병중(農禪幷重, 농사와 선 수행을 같은 중시하는 것)에 있다. 도응선사 때부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一日不食)”는 농선가풍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그 후 50여 대(代)에 이르도록 사찰 주지부터 모두 몸소 실천하여 이 청규를 엄격히 지켜왔다. 지금도 진여선사 스님들은 ‘농선병중’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사원 현황

운거산 가파른 산길에는 지금도 ‘삼보일배(三步一拜)’로 참배하는 스님들과 신도들을 볼 수 있다. 정상이 보이는 양쪽 산 가운데 조주관(趙州關)을 지나면 연화성(蓮花城) 입구에 도달한다. 조주관은 도응선사가 900년에 조주종심 선사가 운거산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에 세웠다. 그 뒤에 몇 번 훼손되었고 지금 건축물은 1984년 복원한 것이다.

조주관에서 들어가면 호수가 보이는데, 잔잔하여 거울같이 맑고 모양은 달과 같아 명월호(明月湖)라 칭한다. 연화성 내에는 벽계교(碧溪橋)가 있는데, 송나라 불인 요원선사가 조성하였기에 ‘불인교(佛印橋)’라고도 부른다. 다리 중간에 끊어진 흔적이 있는데, 어느 고승이 발로 짚어 끊어진 것을 후에 콧물로 연결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불인교 옆 담심석(談心石)은 소동파가 불인 요원선사를 찾아 이 돌에 앉아 자주 얘기를 나누었기에 지어진 이름이다.

진여선사 주위에는 지름이 2미터 되는 은행나무가 많이 있으며, 그 가운데 18그루는 도응선사가 친히 심었다 하니, 1100년 동안 절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절 건축 면적은 약 1만 평방미터이고, 주요 건물은 천왕전, 대웅보전, 법당, 옥불전, 선당, 허운노화상기념당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허운노화상기념당은 허운스님이 주석한 운거모봉(雲居茅蓬)에 있다. 면적은 200여 평방미터이며, 외부 벽면은 모두 화강석으로 조성되어 있고, 유리기로 되어 있어 소박하고 장엄하다. 그 안에는 높이 1미터의 허운스님 좌상이 모셔져 있다.

사찰에는 송대에서 명대에 이르는 몇 점의 문물과 청대에 제조한 천승대철과(千僧大鐵鍋, 1000명의 승려가 먹을 수 있는 밥을 지을 수 있는 철로 된 가마)가 보존되어 있다. 명월호 서쪽 산기슭에 허운스님 탑원이 있고, 안에는 스님 사리탑이 있다. 탑은 아래 위 두 층으로 나누고, 위층에는 허운스님 사리를, 아래 밀실에는 다른 고승의 유골을 모시고 있다.

1953년 허운노화상은 114세 고령에 여산 대림사에 머물다 운거산 조사도량을 참배하고 주석하였다. 운거산에 6년 동안 머물면서 ‘승가농장(僧伽農場)’을 세워 많은 땅을 일구고 과실과 차를 심고 대나무 제품도 가공하였다. 스님은 평생 조사도량 남화선사를 비롯하여 10여 대찰을 복원하고 진여선사에서 입적하였다.

운거 도응선사 진영.

현재의 진여선사는 청규에 따라 선 수행이 엄격하고, 아침저녁으로 다 같이 예불을 올리고, 저녁 공양 후 향 4주(柱)를 태우는 동안 좌선을 한다. 중국 선방에서는 아직도 향을 피워 좌선 시간을 정한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포살(布薩)을 실행하여 선(禪)과 계(戒)를 동시에 중시한다. ‘삼여(三餘)’의 시간, 즉 스님들이 한가한 시간, 비가 올 때, 그리고 추운 겨울을 이용하여 좌선을 실참한다. 특히 겨울이 오면 진여선원은 아주 짙은 선의 향기로 가득찬다. 오곡(五穀)을 창고에 들여놓고, 운거산에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이 정진하기 제일 좋은 시절이다. 스님들은 주지스님에게 ‘생사가(生死假, 예불과 농사도 짓지 않고 일체를 내려놓는 것)’를 얻어 새벽 4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선당에서 두문불출하고 ‘칠칠(七七, 총 49일)’을 용맹정진하며 선정에 든다.

운거 도응선사의 선사상

운거 도응(雲居 道膺, ?~902)의 성은 왕(王)씨 중국 하북성(河北省) 옥전현(玉田縣)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널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웠으며, 25세 범양(范陽) 연수사(延壽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도응선사는 출가하여 먼저 계율을 열심히 공부하던 어느 날 문득 “대장부가 어찌 계율에 구속될 수 있겠는가!”라 하고 사방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찾아 나섰다. 후에 동산양개 선사를 만났다. 동산양개 선사는 “이 사람은 나중에 누구도 잡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조동종 선법도 전해주었다고 한다. 운거산에서 20년 동안 주석하면서 조동종 선법을 드날리며 수천 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운거 도응은 스승 동산 양개의 선사상과 가풍을 계승하여 특별한 선기(禪機)를 쓰지 않고 평범하고 친절한 개시(開示) 방편으로 대중을 이끌었다. 조동종에서는 ‘삼종삼루(三種漏)’, ‘삼로접인(三路接人)’, ‘삼종타(三墮)’ 등 교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먼저 학인의 근기를 파악하고 집착을 버릴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학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상과 집착을 쓸어버리고 불법과 선리를 설명한다. 그리고 ‘사빈주(四賓主)’로 체용상즉(體用相卽)을 강조하고 납자들이 망상과 형상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마음이 외물에 따르지 않고 자연적으로 해탈하여 외물과 자신을 다 잊고 만법과 자신이 모두 없어지도록 인도한다.

그 외에 ‘오위설법(五位說法)’ 등이 있는데 학인들이 편정(偏正)을 알게 하여 진정으로 법계(法界)의 사사무애(事事無)를 깨닫고 완전히 해탈하게 한다. 중생과 부처, 공(空)과 색(色), 이(理)와 사(事), 체(體)와 용(用), 정(淨)과 염(染)을 초월하여 어느 쪽도 치우치지 않도록 한다. 심지어 오(悟) 자체도 초월하여, 즉 ‘천진하고 오묘하여, 미혹도 깨달음도 속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도응선사 종풍은 <오등회원(五燈會元)>에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선사가 운거산에 있을 때, “어떤 승려가 방에서 경을 읽는데, 선사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묻기를, ‘승려가 읽는 것은 무슨 경인가?’라고 하자, 승려는 ‘<유마경(維摩經)> 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가 ‘<유마경>을 물은 것이 아니다. 읽는 것이 무슨 경전인가?’라고 하였다. 그 승려는 이로부터 득입(得入)하였다”라고 하였다. 도응선사는 다시 “배우는 곳은 그윽하지 않으니, 다함은 속(俗)으로 흘러, 규각(閨閣) 가운데 물건이니, 삼루(漏)를 갖춤이 아쉽다. 바로 여기로 향해 취(取)하고, 가고, 온다. 일체의 일을 함께 다하니, 비로소 잘못이 없음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오등회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묻기를, “무엇이 일법(一法)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무엇이 만법(萬法)인가?”라고 물었다. “아직 어떻게 깨닫는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선사는 “일법은 너의 본심이고, 만법은 너의 본성이다. 또한 도심(道心)과 성(性)은 하나인가 둘인가?”라고 하였다. 승려가 예배하자, 선사는 게송으로 “일법은 제법의 종(宗)이요, 만법은 일법에 통하고, 유심(唯心)과 유성(唯性)은 다름이 같음을 겸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도응선사가 이사원융(理事圓融)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법’은 진여본체이고 ‘만법’은 삼라만상의 대천세계이며, 이사원융하기 때문에 일법과 만법의 본체가 하나이며, 불이(不二)라는 것이다.

<조당집(祖堂集)>에 실린 선사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세속의 선비가 승려에게 묻기를, “내 집에 솥 하나가 있는데, 항상 밥을 지으니, 세 사람이 먹기에 부족한데, 1000 사람이 먹고도 남음이 있다. 상좌(上座)는 무엇을 하는가?”라고 하자, 승려가 대답하지 않았다. 선사가 답하여 말하기를, “다투면 부족하고, 양보하면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도응선사는 또한 “출가한 사람은 다만 자기 분수에 의거해 결택(決擇)하되, 밖(外)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조당집>에 실려 있다. 당시는 당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이라 사회가 많이 불안정했다. 하루는 운거산에 말을 탄 군졸들이 들이 닥친다. 이때 대중들은 당황하여 모두 피신을 하였는데, 오직 도응선사만이 태연하게 조용이 앉아 있었다. 군대의 수장이 도응선사에게 “혼란한 세상이 언제 안정을 얻을 것 같소?”라고 묻자 선사는 “장군의 마음이 만족을 얻을 때이다!”라고 답하자 그는 선사에게 예배하고 물러났다. 이로부터 도응선사는 자신의 안분(安分), 무쟁(無爭), 심족(心足) 등을 상당히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 소종 천복 2년(902) 도응선사는 운거산에서 입적하였으며, 시호는 ‘홍각선사(弘覺禪師)’라고 하였다. <경덕전등록>에는 도응선사 문하에 28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대다수 전기가 명확하지 않으며, 몇몇은 한 두 세대를 지난 후 단절되었다. 도응 법맥은 동안도비(同安道丕)에 의하여 전승되고, 일맥은 조동종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계열로 끊어지지 않고 전승되었다.

운거산 진여선사 지도.

양송(兩宋) 시대에 가장 이름이 난 조동종 선사는 굉지정각이며, ‘묵조선’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역대로 선종에는 ‘임천하(臨天下), 조일각(曺一角)’이라고 하는데, 임제종 천하에 조동종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로 비록 임제종에 미치지 못하지만 운거 도응선사 법력으로 조동종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정통의 선학 중심’ 자리매김

운거산 진여선사는 도용선사가 개산(開山)하고 운거 도응선사가 주석함으로써 조동종 선풍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법안종, 운문종, 임제종의 많은 납자들이 이곳에서 수선(修禪)한다. 비록 여러 번 재난을 당했지만 다른 도량에 비하여 뛰어난 수행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뛰어난 조사들을 배출한 원인도 있겠지만 세속과 단절하고, 농선병중(農禪幷重)의 전통을 이어 왔기 때문이다. 현재도 진여선사는 아름다운 전통인 농선병중을 따르며 ‘동참하학(冬參夏學, 겨울에 좌선, 여름에 불법을 공부함)’을 실시하여 ‘세계적으로 제일 크고 제일 정통의 선학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늘도 눈 푸른 납자들이 열심히 정진하고 있어 진여선사에 이르는 이들에게 깊은 선향을 느끼게 한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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