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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禪宗) 거장 조주 종심선사 ‘조주문풍(趙州門風)’ 형성 도량

조주 종심선사의 행화도량인 백림선사 앞의 측백나무 숲 모습.

백림선사(柏林禪寺) 문 앞 기둥 위 대련에는 “절 안에는 천년을 지켜온 조주탑이 있고, 산문은 조주의 만리교를 마주 대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탑’은 백림선사 안에 있는 당대 고승 조주 종심(趙州 從)선사 사리탑으로 선사의 시호는 ‘진제(眞際)’이며, ‘다리(橋)’는 중국의 남녀노소가 다 알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조주교(趙州橋)이다.

조주 종심선사는 중국 불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사로 6조 혜능의 제5대 제자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청년시절 남전 보원(南泉 普願)선사 문하에서 도를 깨달은 뒤, 몇십 년 동안 행각을 하다 80세가 되어 조주 고관음원(古觀音院)에서 120세에 입적할 때까지 주석했다. 당시 사람들이 고금의 도풍을 훤히 깨달아 밝히고 있는 선사를 존경하여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 칭하였다.

평생 부지런히 정진하여 법을 구하고 도를 전하였으며, 매우 소박하고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만년에는 연왕(燕王)과 조왕(趙王)이 서로 다투어 공양하였으나 선사는 모두 사양하였다. 조왕은 선사의 덕행과 도풍을 ‘천하조주(天下趙州)’라고 찬탄하였다. 조주선사 선풍이 생동감과 활기가 넘쳤던 것은 모두 근기에 맞게 펼치고 인연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차나 마셔라(喫茶去)”,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등의 공안을 많이 남겨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송대 이후, 선문에서는 ‘참화두(參話頭)’를 방편으로 간화선이 성행하였으며, 조주선사 어록은 후대 선사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사원의 역사와 현황

최초의 백림선사는 한 헌제 건안 연간(196~220)에 창건되고, 옛 명칭은 관음원(觀音院)이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몇 번의 흥망성쇠를 겪으면서도 불법을 끊임없이 잇고 고승을 배출하였다. 승전(僧傳)에 의하면, 현장(玄)이 서쪽 인도로 가기 전에 이곳에 와서 도심법사에게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고 한다. 만당(晩唐) 때, 선종의 거장인 종심선사는 40년 동안 주석하며 법화를 크게 행하여 ‘조주문풍(趙州門風)’을 형성하였다. 백림선사는 이로 인하여 중국 선종사에서 중요한 조정(祖庭)이 되었다.

청말 백림선사 시의도(示意圖)에 따르면, 이때 중수된 규모는 대단히 웅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거의 100년 동안 여러 차례 전란을 당하여 전당과 불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1988년에 이르러 다시 승려들이 주석하게 되었을 때는 조주선사 사리탑과 20여 그루의 오래된 측백나무만 남아 있었다.

정혜 노화상이 사원 주지를 맡은 이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바삐 돌아다니며 폐허 위에 조금씩 옛 부처님 도량을 중건하였다. 2006년에 이르러 16년 공사 끝에 만불전이 준공되면서, 마침내 장엄한 사찰의 모습이 드러나고, 뜰 앞에 푸른 측백나무도 생기가 돋아났다.

지금 백림선사는 석가장(石家莊) 성 남쪽 45km 떨어진 조현(趙縣) 현성(縣城)에 위치하고 있다. 전당에 나무가 서 있고, 붉은 담과 황색 기와에 날아오를 듯한 처마와 조각이 새겨진 기둥은 기세가 웅장하며, 푸른 측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회랑이 굽이져 있다. 사찰 전체 면적은 약 100무(畝)에 이르며, 건축 면적은 2만여 평방미터에 이른다.

건축물 배치는 전통 중국사원과 마찬가지로 남향이며 중앙에서 차례로 내려가며 양쪽에 대칭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산문전, 보광명전, 관음전, 선당, 만불루가 배열되어 있고, 겹겹이 있는 누각 사이의 굽어진 회랑에 20여 그루의 오래된 측백나무가 번갈아 서 있다.

그 가운데 산문전은 1993년 중건되었으며, 청나라 건축을 모방하여 문 입구는 1m쯤 되는 높이의 돌사자 한 쌍이 천년 고찰을 보호하고, 그 뒤에는 위타전(韋陀殿)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백림사 주전인 보광명전이 있다. 이곳은 승려들이 아침저녁으로 염불을 하고 중요한 불교 행사를 거행하는데 1992년 건립되었다. 정 중앙에 한백옥석가모니좌상이 모셔져 있고, 가섭과 아난의 상이 좌우에 있다.

정혜법사 말에 의하면, 백림선사는 동한 때 창건된 이후 줄곧 관음도량이고, 조주선사가 계실 때 ‘고관음원’이라 불렀으며 사원을 복원하고 관음전을 중점적으로 건설했다고 한다. 관음상은 사원 안에 이미 죽은 1000년 된 측백나무로 조각해 만든 것으로, ‘천년고백조관음’이라 한다. 고관음원을 상징하며, 백림선사가 1800년 관음도량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사원 안에는 회현루(會賢樓)가 있는데, 그 안에는 객당과 승방이 있고, 양쪽에 복혜당과 가람전이 있다. 맞은편에 있는 지월루는 위 아래층이 각각 데이터센터로 백림선사의 ‘생활선’ 웹 사이트를 유지 관리하는데 사용한다. 회객청은 손님을 접대하는데 쓰인다. 양쪽에는 각각 원해당과 조사전이 있다.

백림선사는 특히 선수행을 중시하여 선당(禪堂)이 매우 크고 사원 중심에 있는 관음전 뒷면에 자리 잡고 있다. 42칸 방이 있고 면적은 거의 1000평방미터에 이른다. ‘무문관’이라고도 하며, 원래 조주선사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라는 공안에서 온 것이다.

맨 마지막에 있는 만불루는 높이 37m, 너비 70m, 길이 32m이며, 안내에 따르면 동시에 25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문 앞 광장은 1만명이 대형 법회를 열 수 있다고 한다. 1999년 첫 삽을 떠서 2003년 초 완공하였다. 안에 만불을 모셨는데, 실제는 1만53개의 불상이 있으며, 중생이 모두 부처이며, 모든 부처가 무량함을 의미한다. 평소 승려가 상주하면서 아침저녁 공부를 하고, 매년 대형 법회도 여기에서 거행한다.

조주선사탑은 사원 동쪽에 우뚝 솟아 있고, 탑액(塔額)에 ‘특사대원조주고불진제광조국사지탑(特賜大元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之塔)’이라고 새겨있으며, 원 천력 3년(1330) 건립되었다. 조주 종심선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종심선사 시호가 ‘진제선사’인 까닭에 ‘진제선사탑’으로 칭해졌다. 또 옛 탑이 백림사 안에 있었기에 ‘백림사탑’이라고도 한다.

탑 높이는 40m이며, 벽돌을 차곡차곡 튼실하게 쌓은 구조로 7층 8각형으로 고아하고 단아하다. 1966년 형태시(邢台市) 대지진 발생 때, 탑이 무너지고, 인위적 파괴가 더해지면서 심각하게 훼손되고 기울어졌다. 1997년과 1998년 복원이 진행되어, 탑찰(塔刹), 상륜(相輪)을 다시 주조하였다. 안에 불상과 불경을 넣고, 가장 높은 꼭대기 층에는 피뢰침을 세우고, 경사도 바로 잡았다.

복원 원칙은 ‘옛 모습으로 옛 것을 복원하는 것’으로 원래 구조를 완전히 보존하여, 부서지고 파손된 기물이 있으면 모두 원래 모양대로 보수하고 새로 복원하였다. 1층 4면에 격자무늬 창이 조각되어 있으며, 아래에는 사각형 탑 기단부가 있다. 탑 기단부에 수미좌(須彌座)가 있으며, 자리 위 벽돌 두 층에 도안이 조각되어 있다. 위층에는 악사, 금강, 역사, 아래층에는 용, 코끼리, 사슴, 모란 등의 도안이 조각되어 있는데, 정교하고 생동감 있다.

이 탑의 특징은 두공(斗拱, 지붕받침)이 웅대하고, 처마가 깊고, 조각이 풍부하기 때문에 원나라 탑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나중에 두 층의 탑 기단부에 청석(靑石)으로 난간을 더했고, 탑원 전체는 한백옥(漢白玉)으로 난간을 만들었으며, 2층 기단부 좌대 정중앙에 조주종심선사정상비를 세웠다. 탑 앞에는 명 가정 연간에 중수한 비, 정혜(淨慧)장로 중수 조주선사사리탑공덕비 등이 안치되어 있다.

조주 종심선사의 선사상

조주 종심(趙州 從, 778~897)선사는 속성이 학씨이고, 청주(현 산동성 청주)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해, 선종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선사이다. 선사는 스스로 출가한 이후 속가와 관련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듯하다. 한번은 은사가 조주에 계신다는 말을 들어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조주는 선사의 고향이라 은사가 선사의 집에 알렸고, 집안 사람들이 선사를 만나러 온다는 말을 듣고는 한밤 중에 짐을 챙겨 떠나버렸다. 18세에 지주로 가서 마조(馬祖) 문하의 남전보원 선사를 참알하였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남전선사와의 문답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조주 종심선사 진영.

“근래에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근래에 서상원(瑞像院)에서 출발했습니다.”
“서상(瑞像)을 본 적이 있는가?”
“서상은 보지 못했고, 다만 누워 있는 여래만을 보았습니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인가? 주인이 없는 사미인가?”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

“주인이 어디 있는가?” “한겨울 날씨가 지독히 차가우니, 화상께서는 존체만복(尊體萬福)하십시오.”

이러한 문답 끝에 남전선사는 조주를 법기(法器)로 여겨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남전문하에 입실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한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까?”
“향하려고 하면 바로 어긋난다.”
“향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도인 줄 압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속하지 않으니, 아는 것은 허망한 지각이고, 알지 못함은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통달하여 의심치 않는 도라면, 마치 태허(太虛)와 같아 확연하여 텅 비어 트인 것과 같으니, 어찌 억지로 시비를 일으키겠는가!”

조주선사는 그 말끝에 이치를 깨달았다. 이렇게 깨달음을 연 후에 잠시 남전 문하를 떠났다 구족계를 받고 돌아와 30년 동안 남전선사를 모셨다. 자료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남전선사가 입적한 이후, 남전 회상을 떠나 제방을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조주선사는 현재의 하북, 강서, 호남, 호북, 절강, 안휘 등을 유행하면서 제방의 선지식들을 참알하였다. 선사는 항상 “일곱 살 아이라도 나보다 뛰어나면 가르침을 청할 것이고, 100세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가르쳐줄 것이다”라고 말하며 제방을 다녔는데, 철저한 구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당 대중 11년(857), 80세 고령인 종심(從)선사는 조주(趙州)에 도착해 신도들의 간곡한 청으로 관음원에 주석하며 40년 동안 법을 펼치니, 승속이 모두 우러르고 총림에 모범이 되어 사람들은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고 칭했다.

당시는 번진(절도사)들이 할거하던 시기였다. 전설에 따르면, 연왕(燕王)이 그 지역의 조왕(趙王)을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군대가 조왕의 경계에 이르자 천상(天象)을 관하는 사람이 연왕에게 아뢰기를, “조주에는 성인이 거주하고 있으므로, 전쟁은 승리하지 못한다”라고 하여 연왕과 조왕은 전쟁을 멈추었다. 그 성인이 누구인가 묻자 대신이 “<법화경>을 강의하는 대사가 계신데, 가뭄을 만나 대사에게 대산(臺山)에서 기우(祈雨)를 청하면, 매번 영험이 있고, 대사가 돌아가기도 전에 장대처럼 비가 내립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천상을 관하는 사람은 결코 그 대사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 다른 대신이 “이곳에서 120리를 가면 조주 관음원에 종심선사가 계신데, 연세가 많고, 도안(道眼)이 밝습니다”라고 하자 천상을 관하는 사람이 그렇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연왕과 조왕은 선사를 알현하였는데, 서로 다투어 공양을 올리자 선사는 모두 받지 않았으며, 그들이 올린 자색 가사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선사의 청빈한 생활은 선사의 행장(行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때부터 주지를 하였는데, 궁한 살림에도 고인의 뜻을 받들어 승당(僧堂)에는 전가(前架, 승당 앞에 설치하는 좌선하는 자리)와 후가(後架, 승당 뒤에 설치하는 세면장 등)도 없었고, 겨우 공양을 마련해 먹을 정도였다. 선상(禪床)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 타다 남은 부지깽이를 노끈으로 묶어 두었는데, 누가 새로 만들려고 하면, 그 때마다 허락하지 않았다. 40년간 주지를 하는 동안 편지 한 통을 단월(檀越)에게 보내는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이 선사는 평생 청빈하게 살다 갔지만, 선사의 선풍은 선기가 상당히 넘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후대에 다양한 공안으로 활용되고, 나아가 간화선에서는 핵심적인 화두로 운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無)’자 화두이다.

묻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佛性)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없다”라고 하였다. 학인이 “위로 제불(諸佛)에 이르고, 아래로 땅강아지 개미에 이르러, 모두 불성이 있는데, 개는 어째서 없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그대에게 업식(業識)의 성(性)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상당히 유명한 ‘공안’으로 간화선 제창자인 대혜종고(大慧宗)는 이로부터 ‘무(無)’자 화두를 강조하고 있다.

생(生)이 온 곳을 알지 못하고, 죽음이 갈 곳을 모르는 의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 생사가 서로 더해진다. 다만 서로 더해지는 곳에서 화두를 간(看)하라. 승려가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하자, 조주는 “없다.”라고 하였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생이 온 곳을 모르고, 죽음이 갈 곳을 모르는 의심하는 마음을, ‘무(無)’자로 옮겨오면, 곧 서로 더하는 마음이 행하지 못한다. 서로 더해지는 마음을 이미 행하지 못하면, 생사가 오고가는 의심하는 마음이 장차 끊길 것이다.

간화선에서 원용하는 조주선사 화두는 이외에도 상당히 많다. 예컨대 “무엇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이다.(庭前柏樹子)”라고 하거나, 어떤 승려가 조주종심에게 청하자 “죽을 먹었는가?”라고 묻고, 학인이 “죽을 먹었습니다”라고 하자, 조주는 “발우를 씻어라”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선사의 유명한 공안과 화두는 수 없이 많은데, 모두 선사의 “평상심시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특히 선사는 “노승이 행각할 때, 두 끼 죽과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번거롭게 마음을 쓸 곳이 없었으며, 잠잘 곳을 제외하고는 달리 마음을 쓸 곳이 없었다”라고 하여 언제나 평상심을 강조하였다.

하북성 조현 백림선사 지도. 

또한 조주선사는 “나는 풀 한 포기를 여섯 장(丈) 금신(金身, 부처를 가리킴)을 위해 사용하고, 여섯 장 금신을 한 포기 풀로 만든다. 풀 한 포기와 여섯 장 금신의 둘이 아닌 것(不二)이다. 부처는 번뇌이고, 번뇌는 부처이다”라고 하여 ‘불이(不二)법문’을 강조하였다.

궁극적인 선리(禪理) 체득 강조

조주선사는 항상 <신심명>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만을 꺼릴 뿐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평상심시도’와 ‘불이법문’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부처라는 이 말을 나는 듣고 싶지 않다.”고 설했으며, 또한 “금불(金佛)은 화로(火爐)를 건너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을 건널 수 없으며, 니불(泥佛)은 물을 건널 수 없고, 진불(眞佛)은 안에 앉아 있다.”라고 하여, 중생심 가운데 스스로 ‘진불’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선사는 “만약 제일구(第一句)면 조불(祖佛)과 더불어 선사가 되고, 제이구(第二句)면 인천(人天)과 더불어 선사가 되며, 제삼구(第三句)면 스스로도 구제할 수 없다”라고 하여, 반드시 ‘제일구’에 깨달을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제일구’는 언어문자로 종지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고, ‘제일구’에 바로 깨달음을 얻어야 초불월조(超佛越祖)하여 궁극적인 선리(禪理)를 체득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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