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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선 청원 계열의 석두희천 선사 행화한 사찰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의 근원도량인 호남성 남대사 대웅보전.

남악(南岳) 72봉 가운데 하나인 서응봉은 해발 600여 m로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져 해를 가릴 정도이다. 오솔길 그윽한 곳에 계곡이 흐르며 산새가 지저귄다. 산기슭 눈길 닿지 않는 곳에 고풍스러우며 소박하지만 장엄한 사찰 하나가 있다. ‘천하법원(天下法源)’이라 일컬어지는 남대사이다. 절 주변은 푸른 산이 둘러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짙게 드리워 있으며 1년 내내 참배객의 향불 연기가 자욱이 피어 오른다.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맑고 고적한 난야(蘭若)의 경지를 보여 준다. 남종 청원(靑原) 계열의 거장 석두희천이 이곳에서 주석해 남대사도 세상에 이름이 났다.

사원의 역사

양 천감 연간(502) 거의 90에 가까운 노령의 해인(海印)이 형산에 와서 남대사를 창건하였다. 사원 뒤에는 왼쪽에 남산이 있고 남산 암벽 위에 대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그는 항상 그 돌 위에 앉아 좌선을 하였다. 때문에 남대사라고 일컫게 되었다. 해인화상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복엄사에 주석하는 천태 3조 혜사대사와 진리를 논하였고 두 사람은 견해가 아주 잘 맞았다고 한다. 그들이 본래 도가 일색이었던 남악에 불교의 신천지를 열자 법맥이 번창해 연종(蓮宗, 정토종)·율종(律宗)·선종(禪宗)이 계속해서 남악에 들어왔다.

당 천보 2년(742) 희천선사가 강서(江西) 청원산에서 남악으로 와서 절 동쪽 큰 바위 위에 암자를 지었으므로 사람들이 ‘석두화상(石頭和尙)’이라 불렀다. 선사는 서응봉 아래에서 선종의 종풍을 크게 선양하였다. 세상의 불자들이 명성을 듣고 찾아와 화상 앞에서 경전과 불법 강설을 들으니 법도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그에 따라 남대사는 지속적으로 규모가 커졌다. 송에 이르러 주희와 장식이 건도 3년(1167) 남악에 왔다 남대사에 들렸을 때 이미 사찰의 규모는 장대했으며 ‘하늘 아래 아름다운 사원’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역대 고승이 맑고 고요한 경계에 주석하여 남대의 옛 사찰은 천상에 있는 인간의 ‘삼보정지(三寶淨地)’가 되었다. 그러나 긴 역사의 강물 속에서 남대사도 여러 번 보수하지 못하여 수 많은 시간 동안 황폐해지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당대 이후로 점차 쇠락해져 송대 건도 원년(1165)에 이르러 새로 중수되었다. 명초에 사원이 다시 황폐해졌다 명 홍치 연간에 원애화상이 중건하였다.

청대 건륭 시기에는 ‘남대사’ 명칭을 사용하는 여러 사찰이 출현하여 진위 논란이 일어났다. 이에 광서 연간(1875~1908)에 축성사 주지 담운화상과 그 제자인 묘견이 “서로 이권을 다투고 불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남대사 선풍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사천의 순무(巡撫, 각 지방의 군정과 민정을 순시하던 대신)와 승려 복성, 담운, 묵안 등이 가시덤불로 뒤덮이고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곳에서 석두희천의 ‘견상보탑(見相寶塔)’이라고 새겨진 비문과 ‘남대사(南臺寺)’라고 새겨진 편액이 있는 고찰의 옛 터를 찾아냈다. 세 사람은 사우(寺宇)를 중수하여 복원하고 남대사를 중흥하는데 평생의 힘을 다 바칠 것을 서원하였다. 그들은 사방으로 동분서주하며 14년의 세월을 지나 마침내 1만8000여 관(貫)을 모금하였다.

재건 사업은 광서 25년(1899)에 시작하여 5년이 걸려 완공되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옛 사찰이 다시 우뚝 세워졌으며 역대 규모를 뛰어넘어 천하에 잘 알려진 사찰이 되었다. 이 기간에 일본 승려 매효육휴가 조사를 참배하러 왔다가 사우가 준공되는 것을 기쁘게 맞아하며 찬탄을 그치지 않고 대장경 1부와 패엽 불경 32장을 증송하겠다고 서원하였다.

당시 호남의 명사 왕임추(王壬秋, 王運, 1833~1916, 만청시기 문학가)가 일찍이 <일본승증남대사경기(日本僧贈南臺寺經記)>라는 글에 이 일을 기록하고 돌에 새겨 뜻을 영원히 남겼다. 애석하게도 문화혁명 중에 법보의 문물이 모두 훼손되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긴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석두희천선사 진영.

민국(民國) 시기에 경안, 도계, 태허 등 대덕 고승이 모두 남대사에서 법을 강학하였으며 현대 고승 영도, 거찬, 영근, 명진 등은 항일전쟁 기간에 ‘불학연구사’를 개설하여 덕과 학문을 겸비한 많은 승려 인재들을 양성하고 친히 승도들을 이끌고 항일 애국운동에 뛰어들어 근대불교에 발자취를 남겼다. 새로운 중국이 성립된 이후 남대사는 여전히 남악 승려들이 농사와 선을 병행하는 중요 사원이 되었다.

사원 현황

오늘날 남대사는 사방이 푸른 소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가래나무가 울창하고 녹음이 우거져 싱그러운 바람이 얼굴에 스친다. 높이 20여 m에 달하는 메타세콰이어는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있고 깃털 모양의 침엽들은 하늘하늘 춤을 춘다. 산봉우리 아래를 굽어보면 빽빽한 푸른 봉우리들은 나선형을 이루며 구불구불 이어져 푸른 용이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 명 만력 연간에 재상 장거정이 쓴 다음의 시와 똑같다.

외로운 봉우리 밤안개 깃드는 곳에 베개 베자/ 몸이 푸른 산봉우리에 있음을 모르겠구나.// 종과 경쇠 소리 차갑게 일어 하늘에 처음 울리고/ 결가부좌 시작하니 달이 막 둥글어지는구나.// 속세의 꿈같은 환영 모든 상을 따라 사라지건만/ 깨달은 마음 등불 하나도 비추지 못하네.// 새벽이 밝아 다시 주릉(朱陵)의 길을 찾아서/ 자운(紫雲)을 두루 다녔으나 아직 돌지 못했네.”

9층 돌계단 정면에 있는 돌기둥 위에 다음과 같은 한 폭의 대련이 있다.
“일렁이는 72개 봉우리, 상강에 잠긴 산 그림자 물 속을 내려다 보고, 월인의 선심(禪心)은 위에 둥글게 있구나.”

회색 담벽에 검은 기와가 얹어진 산문은 소박하면서 친근하며 문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돌사자는 장엄한 기운을 전한다. 문 위에는 ‘고남대사(古南臺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두 번째 미타전으로 가면 정면에 가슴과 배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미륵불 좌상이 있고 양쪽에는 높이 3m 정도 되는 사대천왕상이 받들고 있다.

미륵전과 인접한 것이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 앞에 붉을 칠을 한 섬돌이 하나 있고 나한송과 백옥란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금빛이 빛나는 눈과 장엄하고 오묘한 모습의 삼존불상이 팔보금련대(八寶金蓮臺) 위에 앉아 계신다. 정중앙에 석가모니 세존이, 왼쪽에는 약사불,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있다. 불상 높이는 3m 정도 되며 상호는 넉넉하고 자상하며 단정하다. 각각 왼쪽 어깨에 법의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선한 눈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어 대전 안이 엄숙하고 경건하다.

세 번째 불전에는 조소로 장식된 감실이 있고 또한 법당, 조당, 운수당으로 도량을 구성하고 있다. 양쪽 행랑에 각각 재당, 선당, 객방 등이 있다. 절 안에는 크고 방사가 100여 칸이다. 사원 왼쪽에 있는 구불구불한 돌계단을 따라 수 백 미터 가면 커다란 돌 위에 선승의 부조가 서 있다. 그 분은 석두희천 선사이고 조각을 보호하기 위한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사원 뒤로 왼쪽에 있는 남산 암벽 위에 ‘일여대(一如臺)’라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다. 해인화상이 이 바위 위에서 좌선하고 독경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직경이 2척이나 되는 ‘남대사(南臺寺)’라는 커다란 세 글자가 뚜렷하다. 왼쪽에는 ‘梁天監年建(양나라 천감 연간에 세움)’ 오른쪽에는 ‘沙門海印(사문해인)’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두 줄에 작은 글자로 곧게 새겨져 있다. 조각칼로 멋지게 새진 글자는 강건하고 힘이 있는데 해인화상이 친히 새긴 것이라 전해진다.

남대사 뒤 서응봉 정상에 구름을 뚫고 높이 솟은 보탑이 하나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보검 한 자루가 산봉우리에 우뚝 솟아 있는 듯하다.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강사리탑이다. 1995년 건축하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성했다. 돌이 섞인 구조로 송나라 누각 방식을 모방해 총 9층에 높이 48m인 고전적인 건축물이다. 높이 치켜 들린 처마와 서까래로 된 고풍스런 건축물에 금색 벽이 휘황찬란하다.

탑 안에 있는 나선형 계단으로 오르내리고 굽은 난간에 회랑이 있다. 층마다 불단이 있고 9층에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다. 금강사리탑 사리는 수나라 인수 원년(603) 고조 황제 양견이 조서를 반포하여 정업대사에게 요청하여 남악의 형악사로 모셔온 것이다. 탑의 높이가 49m인 7층 부도는 푸른 산 정상에 우뚝 높이 솟아 있고 정문 기둥에 다음과 같은 한 폭의 대련이 쓰여 있다.

“항하사 같은 겁에 정성이 쌓여 만나게 되는 사리 부도가 영원히 간직된 길상한 성지이며 바가범의 자비로운 서원이 깃든 진공금강정체가 널리 미친 복된 곳이로다.” 지금 우뚝 서 있는 보탑은 부처님 서광을 널리 비추며 명산을 빛내고 있다. 사리탑 한쪽 측면에는 역대 고승의 묘탑들이 보존되어 있다.

불탑묘들을 가로질러 커다란 돌 비탈 하나가 있는데 원형으로 서로 산마루를 이루고 있어 사람이 오를 수 없다. 후인들이 돌을 뚫어 수백 층의 돌계단을 만들었는데 암벽 위에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같아 이름을 ‘천생등(天生)’이라고 한다. 명나라 장원변이 일찍이 돌 비탈 위에 ‘진도파(進道坡)’라는 세 개의 큰 글자를 새겼다. 돌계단 아래 가파른 바위 절벽에 쇠사슬이 걸려 있는 곳에 새겼다. 돌 비탈 옆쪽에 금우의 족적이 찍혀 있는 ‘금우석(金牛石)’도 있다.

석두희천선사의 선사상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는 속성이 진(陳)씨이고 단주 고요(高要, 지금의 광동성 고요현) 사람이다. 어려서 조계에서 혜능 문하로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으며 혜능이 입적하자 길주 청원산 정거사로 가서 행사선사를 의지해 수행했다. 기변(機辯)이 민첩해 행사선사에게 “여러 제자들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기린 하나면 족하다”라는 칭찬을 들을 만큼 신임을 받았다.

얼마 있다 행사선사는 희천에게 명하여 책을 가지고 조계 문하의 또 다른 종장인 남악회양 선사에게 가서 참알하고 수련을 한 뒤에 정거사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 후 행사선사가 교법을 부촉하였다. 당 현종 천보 초년(742) 희천선사는 청원산을 떠나 남악에 이르러 형산 남대사에 머물게 되었다.

석두희천 선사의 저서는 <참동계(參同契)>와 <초암가(草庵歌)> 2편이 있다. 이 2편의 저술은 매우 간결하지만 풍격은 현저히 다르다. <참동계>는 리(理)와 사(事)가 원융하여 물아(物我)가 일체됨을 논하여 현묘함이 깊다. 반면에 <초암가>는 암자에 거주하며 유유자적하는 심경을 묘사했는데 쉽고 명쾌한 말로 선사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연에 맡기고 즐겁게 만족하는 상태를 표현하였다.

선사의 선법은 <참동계>에서 약간 엿볼 수 있다. 희천이 <조론(肇論)>을 읽다 “성인은 만물을 자기로 삼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조론>에서 말하는 “법신은 자타를 떼어놓지 않고, 둥근 거울은 만상을 비쳐낸다”는 도리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어 <참동계>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참동(參同)’이라는 두 글자는 원래 도가에서 나온 말로 희천은 그 뜻을 취하여 ‘회호(回互)’를 주안점으로 그의 선법에 발휘하였다. 이른바 ‘참(參)’은 만물과 제법(諸法)은 각각 위치에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른바 ‘동(同)’은 모든 법(諸法)이 비록 다르나 일원으로 통일되어 있어 개별로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가 창도한 ‘회호(回互)’는 만물제법 사이에 서로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간섭해 들어가는 관계로 보는 것을 가리킨다. 참선하는 사람이 이 도리를 깨달아 일상생활에서 실천해 그 이치를 경험적으로 증명하면 신령스런 빛이 환히 빛나고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다. 이것을 ‘계(契)’라고 한다. 희천선사는 이러한 사상을 선관(禪觀)에 도입하여 선법의 내용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그에 따라 선사는 하나의 종풍을 개창하였다.

달마법계의 선법은 불성론을 기초로 심성(心性)의 깨달음을 중시한다. 북종과 남종 각 파의 계열도 모두 해탈하는데 마음의 작용을 강조하고 마음을 수행과 해탈의 착안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해탈하는데 있어 마음에 대한 중점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공(空)’을 강조하기도 하고 혹은 ‘유(有)’를 ‘상즉불이(相卽不二)’로 강조하기도 한다.

희천선사의 선법도 사람마다 태어나면서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선의 수행론을 전개하였다. 종합해 보면 희천선사는 선리(禪理)에 있어 심성(心性)의 무위(無爲)라는 측면을 더욱 중시했다. 어떻게 해탈에 이를 것인가에 대하여 말할 때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자기는 본래 이미 해탈하여 다시 밖에서 어떠한 추구도 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게 이끌었다. 선사는 사람마다 모두 갖추고 있는 불성을 ‘심(心)’, ‘자심(自心)’, ‘자기심령체(自己心靈體)’라고 하면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제창하였다.

희천선사는 세계의 본체로써 진여불성은 청정하고 무결하고 형상이 없으며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것이나 여기서 나타나는 만사만물은 오염된 것이어서 형태와 특색이 각기 다르고 고통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치(理)와 일(事) 사이 일과 일 사이에는 서로 융섭(融攝)되고 서로 회호(回互)하는 것이며 또한 서로 둘이 아닌 것(不二)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치와 일, 본말(本末) 사이는 서로 섞여 원융해진 경계가 세계의 본래 면모이고 부처와 중생, 성인과 범부가 회통한 최고 경계이다. 세계 만물의 최종적인 귀결점은 이러한 경계이며 사람의 몸과 정신 최후의 이상적인 귀결점도 이 경계인데 이것이 ‘회종(會宗)’이라고 강조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치와 일이 원융하고, 본말이 회통한 ‘회종’ ‘회도(會道)’한 입장에서 모든 사물을 대해야 한다.

남대사 지도.

단편적으로 단지 이치나 일만의 측면에서 문제를 인식해서는 안 되고 이 관점에 근거하여 전진할 목표를 확정하여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희천선사 선풍은 철학적인 사색의 경향을 분명하게 띠고 있어 동 시대 마조도일이 개창한 ‘선불장’에서 대기대용(大機大用)을 크게 선양한 것과 비교된다.

석두희천 선사를 계승한 제자는 21인이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이는 초제혜랑, 천황도오, 약산유엄, 단하천연, 대전보통, 흥국진랑, 담주대천, 수공화상, 서원담장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석두희천 법맥을 번창시켜 지금까지 전승하는 것은 약산유엄과 천황도오 두 갈래 뿐이다. 이 두 법맥이 널리 법을 알려 청원계파에서 조동, 운문, 법안의 세 종이 나왔는데, 선종의 ‘일화오엽(一花五葉)’ 가운데 ‘세 개의 잎(三葉)’이 되어 후세에 길이 빛나게 되었다.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의 근원

남대사는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의 근원이다. 남대사로부터 전개된 삼종의 가르침은 천하에 널리 퍼졌고 불법을 지키는 용상들을 배출하여 지금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보배롭고 고귀한 여러 재산을 남겨주었다. 석두희천 선사의 선사상은 중국 내외 선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심지어 후대 정토종도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지금의 남대사는 역사적으로 유구한 선사상을 적극 계승하고 선양하고 있으며 호남의 유명한 사찰로 강남의 빼어난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

남대고사(南臺故事)

가) 어느 날 석두희천은 잠깐 책을 덮고 꿈을 꾸었는데, 육조혜능과 함께 큰 거북이 등에 앉아 바다를 오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거북이는 신령한 지혜요, 연못은 성품의 바다이다, 나와 조사는 함께 성품의 바다에서 거닐었다.(靈龜者 智也. 池者 性海也. 吾與祖師同乘 靈智游性海矣)”라고 감탄하고 한수를 읊었다.

나) 당나라 때 마조도일은 석두희천과 더불어 선계(禪界)의 쌍벽으로 불리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강서에는 대적(大寂)이 있고 호남에는 석두가 있어 이 사이를 왕래하는 발걸음이 많았다. 강호에서는 두 선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마조는 강서에 살고 석두는 호남에 살았는데 전국 각지의 선승들이 두 선사를 참배하기 위해 강서와 호남 사이를 왕래하였다. 당시에 이것을 “강호를 누빈다(跑江湖)”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외지로 분주히 다니는 것을 “강호를 누빈다”라고 말한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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