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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회해 선사 ‘선원청규’ 제창해 선풍 날린 도량

백장회해 선사가 선풍을 날린 백장선사 법당과 장경루 모습.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명칭은 백장산(百丈山)에 주석하면서 칭해진 것이다. 백장선사(百丈禪寺)가 있는 강서성 의춘현 백장산은 높이가 해발 1300여 m이다. 다른 산들에 비해 기운이 웅장하여 대웅산(大雄山)이라고도 한다. 산정에 자리한 사찰은 당나라 건축 양식을 재현하고 있어 그때의 융성한 불교문화를 한눈에 짐작하게 한다. 선원청규를 제창하여 선종(禪宗)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이곳이 ‘백장청규’로 유명한 백장회해 선사 도량이다.

사원의 역사

당 대력 연간(766~778)에 향신(鄕紳) 감정(甘貞)이 백장산에 처음으로 향도암(鄕導庵)이라는 암자를 창건하였으며, 784년 감정이 회해선사를 초청한 후 ‘백장사’라 개명하였다. 회해선사가 머문 후 백장산은 불도량의 중심이 되어 많은 불자들이 운집하니 문하에 다수의 선승이 배출되었다. 백장선사가 814년 95살의 나이에 입적하고 절 서쪽에 사리탑을 건립하였는데 ‘대보승륜탑원(大寶勝輪塔院)’이라고 한다. 7년 후 당 목종이 회해선사에게 ‘대지선사(大智禪師)’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당시 백장사에 또 다른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후에 황제가 된 선종(宣宗) 이침(李)이다. 이침은 조카 무종(武宗)과의 정치적 투쟁에서 많은 어려움을 격고 있을 때 하루는 한 고승을 만나 심중을 토로했다. 스님이 떠나면서 “백장으로 물러서라”라는 편지를 남긴다. 고승의 뜻은 이침이 정권투쟁 중심에서 백장(300 미터), 즉 조금 물러서면 개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침은 추상적인 거리가 아니고 지명으로 잘못 알아듣고 지도에서 ‘백장’산 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백장산 백장사에 도착 한 후 사미(沙彌)가 되었다. 이 인연으로 이침이 황제에 즉위한 후 백장사를 거듭 중창하고 ‘대지수성선사(大智壽聖禪寺)’라는 편액을 하사(下賜)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백장사는 당나라 시대에 상당히 번창하였다.

사원 현황

백장사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정에 넓고 평탄한 분지에 위치한다. 옛날 건축물은 대웅보전과 승방 몇 동만 남았다. 대웅전은 청나라 말기인 1868년 세워진 것으로 길이 10m, 너비 12m, 높이 4m이다. 옛 형태의 고(古)사원은 새로 복원된 사원 옆에 보존되어 있다. 지금 백장사는 2004년 본환(本煥)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여러 해에 걸쳐 복원하여 천년고찰의 모습을 회복하였다. 백장사는 필자가 순례한 중국 사원 가운데 가장 당나라 시대 풍모를 지니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백장회해 선사 진영.

사원과 조금 떨어진 산 중턱에 ‘백장청규(百丈淸規)’라고 쓴 장엄한 삼문(三門)이 있다. 양식은 중국 당송(唐宋)대 건축이며 전체적으로 높고 웅장하면서 매우 간결하다. 산문에는 ‘백장고찰(百丈古刹)’이 새겨져 있고 붉은색 산문과 회색 석벽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산문 앞은 넓은 들판이라 필자가 찾은 11월에는 수확을 마치고 남긴 볏짚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옛날 어깨에 괭이를 걸친 백장선사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듯하였다.

산문 안은 넓게 펼쳐져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수목과 화초 뒤에 거대한 방생지가 있고 그 위에 아치형 돌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건널 수 있게 하였다. 다리 옆에는 ‘연지대사방생문(蓮池大師放生文)’이라고 쓴 검은색 석비가 눈길을 끈다. 차례로 천왕전, 대웅보전, 법당, 사래각(師來閣) 등의 전각이 있다. 불전마다 80-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사이에 화단이 있다. 주위에 측백나무와 회양목 등 상록수를 심어 사계절 내내 청량함을 만끽하게 한다.

역대로 황정견, 류공권, 주돈이 같은 명공(名公)들이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황정견은 “영경대에 높이 누워 지팡이로 푸른 하늘을 가르니, 뭇 별이 떨어져 들판을 가득 채우고, 산승이 등불아래 설법을 한다”고 시를 읊었다. 이러한 시구처럼 지금의 백장사도 깊은 고요와 찬란한 밤하늘을 간직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의 해서(楷書) 사대가(四大家) 가운데 한 사람인 유공권이 쓴 ‘천하청규(天下淸規)’라는 석각과 ‘법정선사비(法正禪師碑)’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또한 ‘진원(眞源)’이라는 석각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당 선종이 백장사에 사미로 있을 때 수원(水源)인 이곳을 찾아 ‘진원’ 두 자를 친히 쓴 것이라고 한다. 뒷산에 ‘용반석(龍蟠石)’이 있는데, 회해선사가 자주 좌선하던 곳이라고 한다. 선문에서 진정한 수행자를 ‘용상지재(龍象之才)’라고 하니 ‘용반석’이라는 이름이 가슴에 와 닿는다. 당 선종도 여기에서 자주 좌선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백장사는 완벽하게 중창된 선종 전통사찰로 모든 산림과 논밭을 사부대중이 직접 일구어 자급자족을 실천하고 있다. 백장사는 그야말로 선수행하기 좋은 도량이다. 오늘도 납자들이 매일 향을 사르며 백장가풍을 보존해가고 있다.

백장회해 선사의 선사상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선사는 속성이 왕(王)씨이고, 복주(福州) 장락현(長樂顯) 출신이다. 대지선사(大智禪師)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탑호는 대보승륜(大寶勝輪)이다. 일찍이 광동 조양 서산에 주석하던 혜조(慧照)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마조도일(馬祖道一)선사 문하에서 수좌로 6년을 시봉하고 인가받았다. 회해선사는 서당지장, 남전보원과 함께 마조 문하의 ‘삼대사(三大士)’로 칭해졌다. 인가 받은 얼마 후 홍주(洪州) 신오(新吳, 지금의 강서성 봉신현) 대웅산에 이르러 백장총림을 개산하였다. 그 후 회해선사는 20년 동안 백장사 주지로 주석하면서 선법을 펼쳤다.

선사는 혜능(慧能)조사와 마조도일의 선사상의 진수를 전수받았다. 또한 여래장사상을 기초로 중생의 심성은 본래 원만구족하고 자재하니 자유롭게 해탈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불법은 모든 사람의 자기 심중에 이미 존재하니 달리 밖에서 구하지 말고 오직 자심(自心)에서 스스로 깨달을 것을 강조한다.

다만 망상의 속박을 받지 않으면 부처와 다름없이 심성이 밝혀져 불법은 저절로 드러난다고 한다. 선사의 선사상은 “신령스러운 광명이 홀로 빛나, 육근과 육진을 멀리 벗어나니, 본체는 참으로 항상됨을 드러내어, 문자에 구속됨이 없도다. 심성은 오염됨이 없어서, 본래 저절로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으니, 다만 허망한 인연만 떠나면, 곧 여여한 부처라네”라고 개괄한다.

선사는 모든 집착이 불교의 기본정신과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부처는 다만 “가고 머무는 자유이다”라고 하여 ‘자유인’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자유인은 이미 외재적인 일체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구하여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사는 “부처란 집착이 없는 사람, 구함이 없는 사람,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무착(無着)’은 어떠한 법에도 집착함이 없는 것이며, 어떠한 법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다. ‘무구(無求)’는 밖으로 향하여 구하지 않으며 부처도 조사도 구하지 않고 선(禪)도 선사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말하는 이른바 부처는 다만 약(藥)으로 중생의 약일뿐이며, 병자가 없으면 약을 구하거나 약을 먹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무의(無依)’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도와 궁극적 해탈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경전 교설에 의지하여 자기가 해탈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모든 것이 다만 자기에 의할 뿐, 마땅히 믿는 바는 자기의 그러한 자유인의 마음이다. 이렇게 해야 자유적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 선사는 “지금 다만 하나하나의 경계와 법에 모두 물듦이 없고, 또한 지해(知解)에 의지하여 머물지 않아야 곧 자유인이다”라고 설하였다.

선사는 일체의 집착과 오염된 마음은 선의 종지와 위배되어 해탈 할 수 없다고 재삼 강조한다. 그리고 반대로 묶여 있지 않고 해탈해야만 진정한 해탈인이라고 설한다. 불도와 부처를 구하는 것도 집착으로 ‘운분입(運糞入, 똥을 퍼들이는 것)’에 비유하며 이르기를 “지금 부처와 보리를 구하고자 하는 일체의 유무(有無) 등의 법은 똥을 퍼 들이는 것이지, 똥을 퍼 밖으로 보내는 것이라 하지 않는다.

지금 부처를 보고, 부처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보는 것과 구하는 것, 집착하는 것은 똥에 대한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자신이 깨닫고 해탈하고자 한다면 ‘제분(除糞)’, 즉 탐욕과 집착을 무조건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선사는 중생의 청정한 본성은 모자란 적이 없으나 자신의 깨달음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지견’과 ’지해’를 내는 것을 극복하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라 “두 구절을 자르고”, “세 구절을 뛰어 넘으라”는 두 가지 방편을 설하였다. 선사는 우주와 인생은 나누어 질 수 없는 일체(一體)로 모순과 차별의 현상은 화합 통일된 정신적 실체가 환상(幻像)으로 나타난 것이라 주장한다. 일체 인식은 사람의 분별을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긍정 혹은 부정의 착오에 빠져들게 하여 최종적으로 우주 인생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게 한다고 설한다.

오직 개체의 정신(精神)을 무한히 넓혀가야 자신과 우주 본체가 하나가 되어 절대 정신통일의 경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본체(本體)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어야 비로소 생사에서 열반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현재 자기 생활의 중심에서 사람의 독립과 자유를 실현할 것을 호소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처는 단지 사람이고, 사람이 다만 부처이다”라고 하여 중생과 부처가 평등함을 역설하였다. 차이가 있다면 “부처는 오고 감에 자유로워 중생과 다르다”는 것이다. 

즉 자유로우면 사람이 곧 부처이고 자유롭지 못하면 부처가 사람이다. 부처와 사람이 구별되는 유일한 기준은 자유로움과 자유롭지 못함에 있을 뿐이다. 수행 목표는 눈앞의 외경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경교(經敎)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단경(壇經)>의 “<법화경>을 돌려야지 <법화경>에 돌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누구나 자유 독립적이어서 부처와 차별이 없다는 것은 일체 법과 가르침을 자신이 쓰는 동시에 구속과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종발전사에서 회해선사의 중국선종에 대한 공헌은 세 가지로 개괄할 수 있다. 우선 선사는 선문의 종규, 즉 천하청규 혹은 백장청규를 만들어 “천하의 승려들은 이 청규를 따르라”고 지시한다. 초기 선종에는 정해진 청규가 없어 율종(律宗)의 규례(規例) 의식을 따랐다. 이에 회해선사는 백장사에서 다년간 불경과 선리(禪理)를 연구하여 선종에 맞는 의식과 청규를 제창하는 <선문규식(禪門規式)>을 찬술하였다. 이 규식의 제정은 선승들이 율사(律寺)에서 수행하던 것을 선원에서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원(律院)에 속했던 선원을 독립하게 한 것이다. 불교사 관점에서 청규의 제정은 선종이 불교에서 독립된 종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는 “선문의 독립은 백장선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선가에서 “마조선사가 도량을 열고, 백장선사가 청규를 세웠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둘째로 선사는 농선병중(農禪幷重)의 보청법(普法)을 제창하여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 후 선원에서는 보청법에 따라 모든 승려들이 단체로 노동(울력)에 참가하여 산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고, 물을 긷는 일을 의무화하는 농선 생활 방식이 채택되었다. <백장선사어록(百丈禪師語錄)>에 따르면, 회해선사는 노동을 할 때면 가장 먼저 나섰으며, 매일 대중과 같이 작무(作務)를 했다고 한다. 훗날 회해대사가 70세 고령이 되었을 때, 일을 관리하는 스님이 선사를 쉬게 하려고 농기구를 숨겨 버렸다. 그때 선사는 “부덕한 내가 어찌 다른 대중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하겠는가”라고 하며 농기구를 찾지만 찾지 못하자 하루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고, 대중이 할 수 없이 농기구를 돌려 주자 선사는 다시 노동에 참여했다. 회해선사가 보청법을 실천하는 것은 본래 소승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다. 

백장선사 지도.

계율에는 출가자의 노동을 금하고 있지만, 회해선사가 제창한 보청법에서는 오히려 노동이 필수이며, 수행의 연장선이다. 보청법으로 인하여 사원이 경제적 자급자족을 이루어 깊은 산속에서도 원만한 선수행으로 많은 선승을 배출하여 선종의 발달을 가져오는 초석이 되었다.

회해선사 문하에서는 20년 동안 개당 설법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 제자 황벽희운은 훗날 임제종(臨濟宗)을 개창하고, 임제종은 양기파와 황룡파로 분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자 위산영우(山靈祐)는 위앙종(仰宗)을 개창한다. 선종사에 ‘일화오엽(一花五葉)’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가운데 ‘양엽(兩葉)’, 즉 임제종과 위앙종이 모두 백장선사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는 백장회해 선사가 중국불교사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이라고 하겠다.

백장선사 대장부 기풍 압도

백장사의 조사전(祖師殿)에는 소박한 회해선사 진영(眞影)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찬시(讚詩)가 있다. “백장청규로 뭇 승려를 가르치고, 출가자의 선법(善法)으로 후학들에게 길이 남겼도다. 들오리가 날아 지나면 코끝이 시리고, 꿈에서 깨어나면 눈을 뜨기가 힘드네. 권석(卷席)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고, 어제가 아련하게 느껴지네. 대웅산 산상에 광명이 무량하고 부처의 혜명을 이여 종풍을 떨쳤도다.” 짧은 구절이지만 백장회해 선사 일생의 공적을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다. 지금은 1000년이 흘렀지만, 새로운 1000년을 맞이하는 백장사의 대장부 기풍은 사람을 압도한다. 미래의 백장사도 선종 중심에 우뚝 서 억조창생(億兆蒼生)과 하나 되길 기원한다.

백장고사(百丈故事)

어느 날 백장선사의 설법이 끝난 후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지만 한 노인만 남아 돌아가지 않았다. 선사가 이유를 묻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가섭불(迦葉佛) 시대에 이 절 주지였는데 어떤 스님이 나에게 ‘깨달아도 인과에 빠집니까? 안 빠집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빠지지 않는다’고 대답 한 후에 잘못 대답한 업보로 여우 몸을 받고 말았습니다. 스님께서 그 탈을 벗겨 주십시오.”

백장은 노인에게 “그러면 나에게 다시 질문하라”하여 다시 질문하니, 백장이 “인과에 매(昧)이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노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내 이미 여우의 몸을 벗었도다!” 하고는 백장에게 절을 하며 부탁을 했다. “뒷산에 여우 한 마리가 죽어 있을 터이니 장사를 좀 지내주십시오.” 백장은 이튿날 대중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가 동굴에서 여우 시체를 찾아 다비식을 해주었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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