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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종 원류’ 형성한 황벽희운 선사 행화도량

새로 신축한 강서성 의춘 황벽선사 전경으로 임제종의 원류 도량으로 불린다.

황벽선사는 중국 강서성 의춘현 황벽산(黃檗山)에 자리한다. 당나라 황벽 희운(黃檗 希運)선사의 도량으로 1200여 년 역사를 갖고 있다. 임제종을 창시한 임제 의현(臨濟 義玄)선사가 여기서 법을 깨달았으므로 임제종(臨濟宗) 본사가 된다.

사원의 역사

황벽산의 원래 이름은 취봉(鷲峰)이다. 옛날 한 인도 고승이 이곳을 지나가다 경치가 마치 인도 ‘취령(鷲嶺)’과 비슷하여 ‘취봉’이라 칭하고, 절을 세워 이름을 ‘취봉사(鷲峰寺)’라고 하였다.

당나라 때, 희운선사는 백장 회해(百丈 懷海)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아 백장의 뜻을 따라 취봉사에 이르러 좋은 수행처임을 단번에 알아보고, 수십 년 주석하고 제방을 행각한 후 만년에 돌아와 입적하였다. 희운선사가 주석하면서, 고향 복건성 복청현 황벽산을 그리워하고 은사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취봉’을 ‘황벽산’으로 개명했다. 사찰 명칭도 ‘황벽선사’라 바꾸었기에, 후에 “천하에 두 황벽산이 있다”는 말이 생겼다.

희운선사가 황벽선사에 주석한 이후 “사방의 학도(學徒)들이 산을 바라보고 모여들어 모습만을 보고도 깨달았으니, 왕래한 대중이 항상 1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문도 가운데 임제 의현이 가장 뛰어났다. 의현은 황벽선사에서 여러 해 수행한 후, 하북성 정정(正定) 임제원(臨濟院)으로 가서 황벽의 선법(禪法)을 선양하여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였다. 따라서 황벽선사는 임제종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송나라 황우(皇祐) 년간(1049~1054)에 임제종 황룡파 개산조사 황룡 혜남(黃龍 慧南)선사가 황벽선사 뒤편에 적취암(積翠庵)을 짓고 안거하였다. 또한 당송팔대가 소철이 서주(江西省 高安)에 관직을 맡아 여러 차례 참방하고 황벽선사에서 생산된 차(茶)를 “중주(中州)의 절품(絶品)”이라 찬탄하였으며, 유명한 황정견(黃庭堅)과 소식(蘇東坡) 등도 황벽선사를 자주 참배하였다.

명나라 중엽, 황벽선사는 뛰어난 고승이 주석하지 않아 점차 쇠락해지자 숭정(崇禎) 2년(1629) 감유리와 주이의 등 신도들의 요청으로 항주 자제사에 주석하던 고승 석행월 선사를 모셔 황벽선을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이로부터 수년 후, 황벽선사에는 수많은 신도들과 학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그동안 쇠락했던 전각들을 다시 중창하여 황벽 종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청 강희 34년(1695) 석행월 선사가 황벽선사에서 입적하였으며 탑비를 ‘황벽중흥조사(黃檗中興祖師)’라고 하였다. 청나라 광서 26년(1900), 황벽선사는 화재로 전체가 소실되었으며, 겨우 몇 채의 전각 기둥만 남게 되었다.

사원 현황

황벽선사는 중창을 했다. 대웅보전과 천왕전은 새로 완성하였고, 종루, 고루, 객당, 선당 등도 중창해 웅장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특히 황벽산에는 70여 부도로 이루어진 탑림(塔林)이 있다. 탑림 가운데 황벽 희운선사 사리탑을 ‘운조탑’, ‘광업탑’이라고 칭한다. 높이는 3.1미터, 넓이는 1.2미터이다. 모양은 보병식(寶甁式)이고, 탑좌(塔座)는 수미좌(須彌座)이다. 탑 중간에 ‘단제운조탑(斷際運祖塔)’이라 새겨져 있다. 희운선사의 유명한 선어(禪語) “앞뒤의 삼제를 생각하지 말라. 전제(前際, 과거)는 감이 없고, 금제(今際, 현재)는 머묾이 없으며, 후제(後際, 미래)는 옴이 없도다”를 당 선종(宣宗) 이침(李)이 듣고 찬탄하며 ‘단제선사(斷際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운조탑’으로부터 동쪽으로 400여 미터 가면 ‘황숙탑(皇叔塔)’이 있는데, 당 선종이 돌아가신 후, 황벽산과의 인연 때문에 세운 탑이다. 절 안에 ‘호포천(虎泉)’이라는 샘물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희운선사가 황벽산에 처음 왔을 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항상 마을 주민을 괴롭히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황벽선사가 입적할 때 이를 슬퍼한 호랑이가 죽어 그 자리에 솟았다고 전하는 호포천.

선사는 호랑이를 제압하여 땅 밑 석실에 가두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호랑이는 황벽선사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선사가 입적할 때 호랑이는 너무 슬퍼하면서 석실에서 뛰어나와 돌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그 후, 호랑이를 가둔 석실에서 샘물이 흘러나와 지금까지 대중들이 음용하는 공덕수가 되었다고 한다.

황벽 희운선사의 선사상

황벽 희운선사는 키가 7척(2m10cm)에 달하고, 이마에 불룩하게 융기된 혹 같은 큰 덩어리가 있는 외모를 가졌다. 황벽선사 생멸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민(, 지금의 복건성) 지방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홍주(洪州) 고안(지금의 강서성 고안현)의 황벽산으로 출가하여, 후에 마조 도일선사를 참알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마조선사가 입적한 후였다. 그에 따라 마조탑을 참배할 때, 마조 제자 백장 회해선사를 만나 문하에 들어갔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9에 실린 황벽선사 전기에는 백장선사와의 문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백장선사가 황벽한테 물었다. “어디를 갔다 오는가?” “대웅산(大雄山) 밑에서 버섯을 따고 옵니다.” “호랑이(大蟲)를 보았는가?” 대사가 호랑이 소리 흉내를 내니, 백장이 도끼를 들어 찍으려는 시늉을 했다. 대사가 백장을 한 대 갈기니, 백장이 껄껄 웃고 돌아갔다. 백장선사가 상당(上堂)하여 대중에게 일렀다. “대웅산 밑에 호랑이가 한 마리 있으니, 여러분들은 조심하시오. 늙은 백장도 오늘 한 차례 물렸소.”

이러한 문답으로부터 황벽의 대기대용(大機大用) 기질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백장선사에게 깊이 인정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혜능(慧能)-회양(懷讓)-마조(馬祖)-백장(百丈)의 법맥을 계승한 황벽은 마조선사를 참알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마조선법과 유사하지만, 도리어 “만약 마조를 잇는다면, 이후 나의 자손을 죽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황벽선사 선사상은 <육조단경>으로부터 전승되는 정통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황벽선사 선사상은 사법 제자를 자처하는 배휴(裴休)가 편집한 <전법심요(傳法心要)>와 <완릉록(宛陵錄)>에 실려 있다.

황벽희운선사 진영.

황벽선사 선사상은 <완릉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묻기를,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즉심(卽心)이 부처이고, 무심(無心)이 도(道)다. 다만 마음이 일어나 생각이 움직임이 없게 하고, 길고 짧음이 없게 하며, 나와 남이 능히 평등한 마음으로 되게 하라. 마음의 근본이 부처이고, 부처의 근본이 마음이다. 마음은 허공(虛空)과 같아, 부처의 참다운 법신(法身)은 마치 허공과 같아 달리 구할 필요가 없으며, 구함은 모두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전심법요>에도 등장한다. “이 마음은 무심(無心)의 마음으로, 일체상(一切相)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제불(諸佛)이 다시 차별이 없다. 다만 능히 무심할 수 있다면, 바로 구경(究竟)이다. …… 마음은 스스로 무심하고, 또한 무심도 없는 것이다. 마음을 무심으로 하려고 하면, 마음이 오히려 있게 되는 것으로, 묵계(契)할 뿐이다. 모든 사의(思議)를 끊기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절로부터 선사의 대체적인 선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무심시도(無心是道)’ 사상은 <단경>으로부터 마조, 백장에 전승되는 조사선(祖師禪)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황벽선사는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무심(無心)할 수 있다면, 본체(本體)는 스스로 드러나니, 해가 하늘에서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것처럼 시방을 두루 비추는데 장애가 없다”라고 설한다.

또한 황벽선사는 “만약 부처를 이루고 싶다면, 모든 불법(佛法)을 배울 필요가 없다. 오직 구함이 없음(無求)과 집착함이 없음(無著)만 배우면 된다. 구하는 바가 없으면 마음이 불생(不生)하며, 집착이 없으면 마음이 불멸(不滅)한다. 불생불멸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설한다. 그리고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무심(無心)하여 묵계(默契)할 뿐”이고, “다만 능히 무심(無心)할 수 있다면, 바로 구경(究竟)”임을 강조한다.

이와같이 황벽선사는 ‘무심’을 지극히 강조하는데, 이 또한 <단경>의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사상적 색채가 가득한 것이고, 나아가 직접적으로 마조선사의 ‘평상심시도’와 ‘도불용수(道不用修)’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황벽선사는 “매일 밥을 먹지만, 한 톨의 쌀도 씹지 않았으며, 매일 길을 걷지만 한 치의 땅을 밟지도 않았다. 이때 인(人)·아(我) 등의 분별상이 생기지 않는다. 매일 모든 일상을 떠나지 않지만, 어떤 외경(外境)에 미혹되지 않아야 자재인(自在人)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함은 그대로 마조의 ‘평상심시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황벽선사는 ‘즉심시불’과 ‘무심시도(無心是道)’를 통합하여 다시 ‘공여래장(空如來藏)’을 설파하였다. 선사는 “지금까지의 모든 알음알이를 다 쓸어버려 텅 비게 하고, 다시 분별이 없음이 공여래장이다”, “도량(道場)이란 다만 여러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만법이 본래 공(空)함을 깨닫는 것을 공여래장이라 부른다”고 설한다. 이렇게 ‘공여래장’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는 폐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일상에서 자재(自在)함을 목적으로 한다.

황벽선사는 ‘지(知)’와 ‘해(解)’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의 이 선종(禪宗)은 위로부터 전래된 이래, ‘지(知)’를 구하고 ‘해(解)’를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지금 사람은 다만 ‘지’와 ‘해’를 늘리려 할 뿐이다. 문의(文義)를 널리 구하고, 수행을 하는 것이 ‘지’와 ‘해’를 더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거꾸로 옹색함을 이루었다.” “지견(知見)을 구하는 것은 털처럼 많지만, 깨닫는 중생은 토끼의 뿔처럼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지’에 대하여 철저하게 비판하는 원인에는 황벽선사 선사상에 ‘지’와 ‘해’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실제 당시 중국불교계에는 규봉 종밀(圭峯 宗密)의 이른바 ‘공적영지(空寂靈知)’의 화엄학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까닭도 있다. 더욱이 황벽선사를 추종하던 배휴는 그 이전에 규봉 종밀에게 사사하였으며, 규봉 종밀은 배휴의 청에 따라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규봉 종밀은 특히 ‘지(知)’를 강조하였는데, 이른바 “공적(空寂)의 마음이요, 영지(靈知)는 어둡지 않으니, 바로 이 공적의 지(知)가 너의 진성(眞性)이다. …… ‘지’의 한 자(字)는 중묘(衆妙)의 문(門)이다”라는 구절과 같이 ‘지’를 가장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벽선사 지도.

그러나 조사선에 있어서 이러한 ‘지’와 ‘해’의 작용은 이미 <단경>에서 부정되어 왔다. 조사선에서는 ‘선리(禪理)’에 대하여 ‘지해’의 증득이 아니라 ‘견(見)’, 즉 자성(自性)을 철저하게 ‘견’할 것을 제창하고 있는데, 이른바 ‘견성(見性)’이다. ‘지’는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면, ‘견’은 결코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보고 깨달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후대에 조사선에서는 하택 신회(荷澤 神會)와 규봉 종밀 사상을 ‘지해종도(知解宗徒)’로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벽선 종풍 다시 드날릴 것

황벽선사의 선사상은 그대로 임제 의현(臨濟 義玄)에게 전해져 더욱 활달해지면서 임제종(臨濟宗)이 천하를 석권하는 이른바 ‘임천하(臨天下)’의 칭호를 얻게 된다.

지금도 황벽선사(黃檗禪寺)는 시대의 요청에 호응하여 살아있는 사찰로 변신하고 있다. 황벽선사의 ‘무심(無心)’은 한순간에 중생을 자유자재한 경계로 이끌어 버린다. 그리고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지 않게 ‘공여래장’을 제창함에서 선사의 자상함까지 엿볼 수 있다. 현재 중국의 일성(一誠) 장로가 “천하의 임제종은 황벽으로부터 나왔다”고 설한 것처럼 황벽 희운선사가 차지하는 중국선종에서의 위상은 상당히 중요하다. 황벽선 종풍이 다시금 드날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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