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현장 탐방이면 절이나 절터에서 역사적 의미를 읽어내는 게 보통이겠지만, 역사 현장이라는 것이 반드시 공간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이번에 다루려는 것처럼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자취를 좇는 것도 긴요한 역사현장 탐방인 것이, 공간에서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한 인물의 체취가 물씬 전하는 공간을 찾아가 보았다.
경서능통 글씨탁월…5년 동안 대비주 10만번 염송
영남서 태어나 호남서 활약했으며 사대부들도 존경
나는 평소 우리의 인물사(人物史) 연구와 관심이 지나치게 위인(偉人) 위주로만 치우쳐 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과도한 영웅사관 탓이랄까, 아니면 어렸을 적 위인전기를 필독 탐독하던 습관이 남아서일까, 사람들 대부분은 알게 모르게 위인 몇몇이 우리의 장구한 역사를 책임져왔다는 착각에 빠져 있곤 한다. 그들 덕에 어려운 시절을 슬기롭게 넘어온 건 분명하지만, 우리 역사가 몇몇 위인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단순하고 폭이 좁지 않다.
이름 모를, 혹은 덜 알려진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뒷받침 되었기에 영웅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런즉 영웅과 위인에만 쏠린 관심을 이들에게도 얼마 간 돌려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사에도 그런 악습이 종종 보인다. 이른바 고승(高僧) 중심으로 불교인물사를 엮어내는 관습이 그것이다.
원효나 의상, 혹은 의천이나 사명대사 같은 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로 봐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우리 불교사가 좀 더 풍요로워지려면 고승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폭넓게 발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영파성규(影波聖奎, 1728~1812) 스님의 자취를 찾아가는 까닭을. 영파는 법호, 성규는 법명이니 그냥 성규라고 부르겠다.
<사진> 직지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영파성규 스님 진영. 조선시대 화엄학의 대가로 학문이 출중하여 사대부의 존경을 받았다.
불교사에 있어서 성규스님의 존재 가치는 고승과 무명의 스님 중간쯤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시간적 공간적 활동무대는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영남 지방이었다. 특히 대구와 경북 일대의 사찰에서 그와 관련된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그의 일생은 <동사열전>과 지금 은해사에 있는 그의 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태어나기는 경남 합천 해인사 부근이었는데, 영특해서 어려서부터 경서를 두루 읽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난히 글씨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문하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대로 착실히 공부한다면 과거를 통한 출세를 노려볼 만 했을 것이다.
<사진> 성규스님이 쓴 거조사 편액. 성규스님은 말년에 거조암에 근거하면서 오백나한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불교와의 인연이 더 질겼다. 열다섯 살 때 청량암에서 공부를 하다가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고, 몇 년 간의 정신적 혼돈과 방황을 거쳐 스무 살 때 출가를 결심했다. 청도 용천사에서 머리를 깎았고, 해봉 유기(海峰有璣)를 비롯한 여러 고승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 무렵 황산 퇴은(黃山退隱)에게 <화엄경>을 받았는데, 여러 해 전 꿈속의 계시와 맞아떨어져 계시로 여기게 되어 이 책들을 30년 동안 계속해서 읽고 또 읽으며 공부했다. 학문하는 끈기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의 이러한 기질은 1777년부터 1781년까지 5년 동안 대비주(大悲呪)를 10만 번이나 염송하는 수행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독학한 것은 아니고, 1754년 스물일곱 살 이후로 설파 상언(雪坡尙彦).함월 해원(涵月海源) 등의 대강백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했었다. 이렇게 해서 깊어진 학문은 그 뒤 강석을 통해 후학과 대중들에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대체로 조선시대 후기의 이름 난 고승들은 자신의 출신 지역이나 인연이 깊은 사찰이 있는 곳 위주로 수행생활을 하여 그 지역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말하자면 지역적 편재가 심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성규스님은 이때부터 전국 곳곳을 순력하며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바를 펼치며 다녔다. 이른바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규스님은 영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주로 그쪽의 사찰에서 머물렀으면서도 학문이 깊어진 다음에는 호남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예컨대 해남 대흥사 약사전에서 가졌던 법회에는 수많은 대중들이 운집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 뒤 해남의 신월암(新月庵)과 진불암(眞佛庵)에서 각각 하안거와 동안거를 마쳤으니 호남과의 인연이 적다고 못하겠다.
바로 이렇게 한 지역에 안주하지 않고 국토의 동서를 마다않고 오가며 인재를 기르고 화엄학을 전파함으로써 불교를 고루 홍포한 점 역시 성규스님의 업적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규스님의 위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성규스님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두예(斗藝)의 다음과 같은 말을 빌려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연담스님이 입적한 이래 명성과 인품에서 영파 성규스님보다 뛰어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蓮潭沒後 名德之盛 無出波之右).”
이 한마디로 성규스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존경심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안타깝게도 그의 불교사적 가치에 대한 전문적 연구는 결코 흡족하지 못하다.
성규가 열반하자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규장각 제학으로 있었고 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손수 비문을 지었고, 그 비석이 현재까지 은해사에 전한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 승려의 비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한다. 지금 성규스님에 대해 말한다면서 이 비석을 안 보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은해사에 먼저 가기로 정했다.
<사진> 영천 은해사에 있는 영파스님 비. 영의정 남공철이 스님을 기리는 글을 지었다. 연담유일 스님 이래 최고의 학식과 수행을 했던 인물로 꼽힌다.
5월의 마지막 주 오전, 오랜만에 동대구역에 내렸다. 주말이라 역 안팎은 사람들로 퍽이나 붐볐다. 여기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은해사에 가려면 방법은 두 가지다. 걸어서 15분 거리인 동부터미널로 가서 영천으로 간 다음 거기에서 은해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거나, 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읍으로 간 다음 거기서 은해사행 군내버스로 갈아타도 된다. 전에 잘 다녔던 길인만큼 하양을 거쳐 가기로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는데, 마침 하양에 5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구경삼아 이리저리 다니면서 컬컬한 목도 축이니 꼭대기에 걸렸던 해가 어느새 기우려고 한다. 서둘러 은해사 행 버스에 올랐지만 오랜만에 장에 나와 서로 안부를 묻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할매’, ‘할배’들을 기다리느라 출발이 더디기만 하다. 급한 마음에 빨리 안 떠나느냐고 버스기사를 재촉해보았지만 들은 척도 안한다.
한참 후 버스는 널찍한 은해사 주차장에 나를 내려 주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며 일주문을 지났다. 주변은 울창한 솔밭이다. 은해사 솔밭은 숙종 때 심은 것이니 대략 300년쯤 되는데 은해사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솔밭을 지나 좀 더 가면 왼쪽 부도밭 안에 그의 비석이 있다. 은해사 중건에 도움을 준 군수나 관찰사, 혹은 상궁(尙宮)의 공적비가 가득한 가운데 여느 유학자나 관리의 비보다 크고 우뚝한 성규의 비석이 있다. 비석의 상태는 아직 괜찮지만, 한문의 내용을 누구나 와서 이해할 수 있게 풀어쓴 한글 안내판이 옆에 있으면 좀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여기서 조금 떨어진 거조암(居祖庵)으로 향했다. 요사에 걸려있는 성규 스님의 편액 글씨를 보기 위함이다. ‘居祖庵’ 편액은 그가 일흔두 살 때 쓴 글씨인데, 나이를 의심할 만큼 필체가 단정하고 힘 있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남공철은 그의 성격에 대해 말하기를 온순하고 부드럽다고 했고, 호서지방의 대표적 학승이었던 몽암기영(蒙庵箕潁)은 그와 나눈 편지에서 그의 깊은 학문을 찬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하긴, 이름을 남긴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예천 용문사에 그의 진영이 전하는데, 그림 속에다 성규스님 스스로 적어 넣은 이 글을 읽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림이 참인가, 아니면 내가 참인가? 본래의 면목으로 본다면야 둘 다 참은 아니겠지. 오라! 땅과 하늘이 둘이 아닐진대 걸림 없이 트여있으니 모습도 없는 것, 하물며 색과 형상은 무슨 까닭에 찾는다는 말인가?”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433호/ 6월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