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망현산 오층석탑(이하 이천석탑)의 다른 이름은 향교방(鄕校方)오층석탑으로, 이천향교 근처의 탑을 말한다. 본래 위치는 경기도 이천 읍내면(현 창천동) 향교 앞이다. 향교는 조선 태종 2년(1402)에 세워졌는데, 직전인 고려시대까지는 이곳이 사찰 또는 사찰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천석탑 또한 향교 건립 이전에 조성된 것이다. 탑의 높이는 약 6m이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이 탑이 고려말기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 때 ‘경복궁 박람회’ 핑계 로 이관
이천시민 환수委 조직, 반환운동 전개
이름처럼 이천향교 앞에 있어야 할 이 탑이 현재 세워진 곳은 일본 도쿄에 있는 오쿠라 호텔 옆 슈코칸(集古館) 박물관 뒤뜰이다. 일본의 내로라하는 재벌 중 한사람이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1918년 일본으로 반출해간 뒤 90여 년을 그의 뜰에 갇혀 지냈다.
탑이 처음 이천을 벗어나게 된 때는 이보다 앞선 1915년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식민통치 5주년을 자축하며 1915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한달간 경복궁에서 대규모 박람회를 개최했다. ‘조선물산공진회’라 불렸던 이 행사준비를 명목으로 총독부는 온갖 수탈을 자행한다. 경복궁의 전각을 부수고 그 자리에 서양식 건물을 짓는가 하면,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들을 행사장으로 옮겨와 박람회장을 장식했다. 이천석탑 또한 그와 비슷한 시기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3년 뒤 일본인인 오쿠라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사진>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 옆 슈코칸 내에 있는 이천오층석탑. 사진제공=이천문화원
오쿠라가 이천석탑을 소유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이토오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같은 권력자들의 비호를 받았던 그는 을사늑약 이전부터 조선에 들어와 대규모 토목ㆍ건축사업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긴 것은 물론 문화재 수탈까지 자행했다. 아름답기로 정평이 났던 경복궁 동궁인 ‘자선당(資善堂)’을 해체해 자신의 저택으로 옮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권력과 자본을 이용해 숱한 한국의 유물을 일본으로 들여온 오쿠라는 자신의 저택을 일부 개조해 오쿠라 슈코칸이란 박물관까지 세웠다. 개관당시 미술품이 3692점, 서적이 1만5600권이나 달했고, 자선당은 슈코칸 소장품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18년, 슈코칸의 이사인 사카다니는 하세가와 조선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자선당에 세워둘만한 조선석탑 1기를 요구했다. 오쿠라가 지목한 것은 평양정류장에 있던 육각칠층석탑이었는데, 총독부는 사람들의 이목을 문제 삼아 다른 탑을 보낸다. 박람회 때문에 경복궁으로 이관된 후 돌아가지 못한 이천석탑이었다. 같은 해 10월24일자로 총독부의 이관허가를 득한 석탑은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옮겨졌다. 슈코칸에 있던 유물 대다수가 관동대지진 때 훼손됐지만, 이천석탑은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서 있다.
90여 년간의 타행살이로 사람들에게 잊혔던 탑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이천출신 재일교포인 김창진 씨다. 그의 노력으로 현재 지역에서는 탑 반환운동이 전개 중이다. 이천문화원과 이천예총, 환경운동연합 등 지역의 문화ㆍ시민단체들은 지난해 8월 이천오층석탑 되찾기 범시민운동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환수운동에 들어갔다. 이인수 이천문화원 사무국장은 “탑의 주인인 이천지역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당한 방법으로 반출됐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상 당당하게 반환요청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504호/ 2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