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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뛰어났던 백제의 불교문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상시전시를 하고 있다. 1400여 년 전에 만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 향로에 표현된 세계가 경이롭다. 절터에서 발견된 대향로 덮개 맨 위에는 활짝 핀 연화장 세계에서 악사의 연주에 맞춰 극락을 노래하는 가릉빈가가 앉아있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은 13만 병력을 이끌고 서해바다를 건너 부여 사비성을 공격했다. 신라의 장군 김유신도 5만의 병력과 함께 사비성으로 진격한다. 계백장군이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용맹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백제는 개전(開戰) 열흘 만인 7월18일 의자왕이 포로로 잡히면서 마지막 날을 맞는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이 있던 충남 부여를 지난 4월16일 찾았다. 384년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한 후 백제의 중심에는 불교가 있었다. 삼국 중 가장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흔적을 부여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해 7월 부여에 있는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을 비롯 공주 공산성, 공주 송산리 고분군,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 등 8곳의 백제역사유적지구가 대한민국에선 12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백마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부소산 낙화암

백마강에 있는 낙화암을 먼저 찾았다. 백마강과 낙화암은 다 백제의 마지막 순간과 연관이 있다. “백마강 달밤에~”로 시작하는 대중가요로 친숙한 백마강은 부여를 지나는 금강의 별칭으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백마강 구드래 나루터에 배를 탔다. 배안은 역사문화여행을 온 초등학생들로 북적였다. “백마강에~고요한~” 노래가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따라서 흥얼거린다.

“아 노래 구려.” 한 아이가 노래가 별로인 듯 불평을 한다. 구드래선착장에서 고란사까지 10분 남짓한 뱃길이지만 백마강의 정취를 느끼기엔 충분하다. 선장이 안내방송을 한다. “우측으로 보이는 정자가 있죠. 그 바로 아래가 낙화암입니다.”

40m 절벽에는 붉게 낙화암(洛花巖)이라고 쓰여 있다. ‘저기서 삼천궁녀가 뛰어내렸을까.’ 당시 부여엔 1만 가구가 있었고 인구도 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 인구에 삼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고란사, 낙화암, 조룡대에 대한 안내방송이 끝날 무렵 배는 고란사 선착장에 닿는다.

고란사는 낙화암 아래 백마강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인 전통사찰 고란사는 창건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혹자는 백제 제17대 왕인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고 하고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넋을 달래기 위해 고려시대 때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고란사는 또한 ‘불로장생초’로 알려진 고란초와 한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약수가 유명하다. 물맛이 궁금해 법당보다 약수가 있는 고란정을 먼저 찾았다.

 

부여 중심에 있는 국보 제9호 정림사지 석탑.

그곳에도 아이들이 점령하고 있다. “너희들 더 어려 질려고? 한 잔 마시면 3년이 젊어져.” 얘기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가지로 물을 받아 물통에 담는다. 기다렸다 물을 마시니 갈증이 난 탓인가 물맛이 달달하다.

고란사와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은 106m 낮은 산으로 부여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여졌을 부소산성이 있다.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난 후 그날 밤 부여 사비성은 함락된다. 두려움에 부소산까지 밀려간 백성들은 절벽 끝으로 몰려 끝내 뛰어내리는 아수라장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니~’ 따라 부르는 노래가사가 더욱 애틋하다.

고란사를 떠나 부여 중심에 있는 정림사지로 향한다. 538년에 웅진(공주) 시대를 마치고 사비로 천도한 후 123년간 백제의 수도로 자리한 사비도성의 중심지에는 정림사가 있었다. 절은 사라지고 국보 제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만이 그 자리에 서 있다. 백제를 정복한 당나라 소정방은 이 탑이 백제를 점령했다는 비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남긴다. 그래서 한동안 평제탑(平濟塔)이란 오명을 갖고 있었다. 슬픈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한 번도 해체보수한 적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당시 백제 장인들의 기술은 그만큼 뛰어났다. 신라의 자랑인 황룡사지 9층 목탑도 한창 전쟁 중이던 때 적국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데려와 세웠을 정도로 당시 백제의 기술력은 높았다. 정림사지 석탑을 살펴보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백제시대의 화려했던 목탑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정림사지에 있는 정림사지박물관에는 정림사의 원형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는 정림사지관 뿐 아니라 백제인의 우수한 기술력과 백제 불교문화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있는 백제불교문화실과 백제불교역사실이 있다. 백제불교문화를 아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꼭 한 번 들러볼만 한 곳이다.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고분 기념관 주차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다. 왕국이 몰락과 더불어 예술도 쇠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학설이 대향로의 발견으로 바뀌게 된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백제가 최고의 주조기술과 예술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다. 사진과 복제품은 수없이 봤지만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대향로가 있는 전시실에 들어가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낙화암 아래 자리잡고 있는 고란사.

61.8cm의 높이의 향로에는 한 마리 가릉빈가가 향로 꼭대기에 앉아 곧 날아오를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뚜껑은 부드러운 능선이 겹겹이 쌓인 산 모양으로 산악 사이사이로 구멍이 있어 향연(香煙)이 피어오르도록 하였다. 향로에는 완함, 종적, 배소, 거문고, 북을 연주하는 다섯 악사를 비롯하여 신선, 새와 짐승들, 신기한 상상의 동식물들이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약사에 연주에 맞춰 극락에 머무는 상상의 새 가릉빈가의 노래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보통 박물관 유물은 휙 보고 발길을 돌렸었는데 이곳에서는 발길을 돌리기 쉽지 않다. 한참 전시실에 머물며 향로를 눈으로 어루만졌다. ‘삼국을 통일시킨 뛰어난 신라’같은 선입관이 시원한 한 방을 맞은 듯 감동과 흥분은 전시실을 나온 후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백제 후기에도 이렇게 뛰어난 문화를 갖고 있는 백제가 왜 그렇게 쉽게 무너졌는지 찬란한 문화를 접할수록 백제의 멸망이 안타깝기만 하다.

불국토를 꿈꾸던 그들이 왜 쉽게 사라졌는지…. 낙화암 건너편 왕흥사지를 찾아가는 길, 눈물같은 이슬비가 백마강을 적시고 있다. 

 

악사가 표현된 부분 사진.

[불교신문3200호/2016년5월7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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