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드득 뽀드득, 순백의 세계로 들어가는 소리. 심호흡을 한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타고 돈다. 후~우 숨을 힘차게 토해낸다. 도시에서 쌓였던 좋지 않은 공기가 한꺼번에 다 빠져나가는 듯 상쾌하다. 지난 14일 죽령탐방지원센터에서 소백산 제2연화봉으로 향한지 1시간여만에 겨울 소백산에 입장한다. 소백산은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 봉화에 걸쳐 있으며 주봉은 비로봉(毘盧峯)이다. 금강산을 비롯 묘향산, 오대산, 속리산 등 유명산 봉우리가 비로봉으로 이름 지어진 경우가 많은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서 유래됐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이 융성했다. 소백산 자락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있는 데 화엄십요 사찰의 하나인 부석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 밖에도 희방사·보국사·초암사·구인사·비로사·성혈사 등 여러 사찰과 암자가 있다.
# 출발
겨울산행은 설렘과 긴장감이 동반된다. 흰 눈으로 장엄된 산과 숲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추위와 눈길을 걸을 때 더 많이 소모되는 체력도 걱정해야 한다. 배낭에 먹을거리와 여분의 방한복을 넣었다. 소백산 제2연화봉 대피소에서 1박을 하기로 하고 죽령탐방지원센터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산 아래 쪽에선 보이지 않던 눈이 1시간 정도 오르니 보이기 시작했다. 땀이 나기 시작하면서 몸이 풀린다.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니 기분이 좋아진다. 제2연화봉 대피소까지 오르는 길은 4.3km로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2시간 남짓 걸으니 제2연화봉에 있는 강우레이더관측소와 대피소에 닿았다.
# 대피소
예약을 확인하고 자리를 배정받았다.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대피소는 현장신청은 받지 않고 반드시 사전에 인터넷으로 예약, 결제를 해야 이용할 수 있다. 배정받은 자리에 가보니 나무 칸막이로 분리된 공간은 잠자리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대피소에서 묵으니 산에서 보기 힘든 일몰과 일출을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겹겹이 쌓인 산 뒤로 해가 떨어진다. 해가 떨어지자 칼바람이 불어온다. 대피소에서는 취사가 가능하다. 별도 건물인 취사실에는 사람들이 저녁준비에 한참이다. 힘든 산행을 마친 후 산에서 먹는 한 끼, 북적거리는 취사실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대피소는 9시에 소등을 한다.
# 연화봉
7시39분에 떠올라야 할 해가 짙은 구름 때문에 10분 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운해 위로 아름답게 떠오르는 해를 기대했는데….
연화봉으로 향한다. 연화봉에는 1978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첫 현대식 천문관측소가 있다. 대피소에서 연화봉까지는 2.7km로 능선을 따라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걸을 때마다 탄성이 이어진다. 하얗게 핀 상고대가 나무를 장엄하고 있고 연화봉까지 시야도 시원하게 열렸다. 아침안개에 해까지 가려져 세상이 하얀색만 가득한 모노톤으로 보인다. 상상했던 겨울산 그 이상이다. <화엄경>의 연화장세계를 표현한 연꽃봉우리를 지나면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계시는 비로봉을 향한다. 연꽃 가득한 길을 지나 비로자나부처님을 친견하러 가는 불국토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 예상 밖 하산
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 4.3km, 겨울 소백산의 하이라이트로 알려진 구간이다.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 눈이 쌓인 내리막길에 발을 딛는 순간 무릎에 통증이 온다. 천천히 내려가는 데 걱정이 앞선다. 일단 들어서서 가기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게 된다. 고민 끝에 다시 연화봉으로 올라 희방사 쪽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희방사 등산로를 내려오면서 무릎은 더욱 큰 비명을 지른다. 아이젠이 돌계단에 부딪치면서 무릎에 더 큰 충격을 준다.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는가. 몇 해 동안 게으르게 살아 온 삶이 처참하게 육체에 형벌을 가한다. 절뚝절뚝 내려가 희방사에 닿았다.
# 희방사와 희방폭포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두운대사가 창건한 희방사. <월인석보>를 소장했던 사찰로 유명하다. <월인석보>는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으로 세조5년에 편찬된 한글 불교대장경이다. 월인석보 판목은 한국전쟁의 화마에 대웅전과 함께 재가 되고 말았다고 하니 아쉬움이 크다. 희방사는 신라 경주 호장(戶長) 유석이 화를 당한 딸을 두운대사가 호랑이와의 인연으로 구해줘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처녀를 구한 폭포가 그 유명한 희방폭포다. 28m 높이의 폭포는 한파로도 다 얼리지 못한 모습이다. 얼음 사이로 힘차게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산을 내려가는 길 안개가 걷히고 맑은 하늘이 나타난다. 비로봉까지 못간 아쉬움보단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는 안도감이 더 켰다. 내심 진리자체인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을 비로봉에 가서만 친견할 수 있을까? 하며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넓고 넓은 화엄세계.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불교신문3171호/2016년1월23일자]
'불교유적과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길 머문 그곳]④ 인제 자작나무 명품숲 (0) | 2020.03.24 |
---|---|
[발길 머문 그곳]③ 강원도 고성 (0) | 2020.03.19 |
[발길 머문 그 곳] ① 고흥 거금도 오천항 일출 (0) | 2020.03.10 |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8> 철원 도피안사 (0) | 2020.03.05 |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7> 남양주 보광사(寶光寺) (0) | 2020.0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