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향도 1500명 발원
도선국사가 절을 세우고
비로자나부처님을 조성
1200여년 뒤 항일 운동
철원애국단 결성식 열려
교통 요지 위치한 철원
지금의 철원은 잘린 한반도처럼 남과 북으로 몸이 찢겼다. 동서남북 한 가운데가 아니라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겨눈 총부리가 가장 맞닿은 긴장의 땅이다. 철원의 운명은 그래서 한반도 평화와 직결한다.
몇 년 전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고, 북미 정상이 종전 후 처음 군사분계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 때 철원은 온 세계의 시선을 한 눈에 받았다. 외지인들이 너도 나도 부동산을 구입하고 철원 일대 땅값이 치솟았다. 찾는 관광객도 많아졌다. 마치 금방 통일이라도 될 것처럼 술렁거렸다. 남북 교류가 차갑게 식으면서 철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전방의 최전선으로 돌아갔다.
2월22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비가 진눈깨비 되어 흘러내렸다. 코로나19 때문에 도로는 한산했다. 평소 같으면 붐볐을 서울에서 철원으로 향하는 3번 국도와 최근 조성한 고속도로는 비가 뿌려 더 스산했다. 임꺽정이 숨었다는 철원 명물 고석정에는 등산복 차림의 중노년 층들만 간간히 보이고 토요일 오후 답지 않게 펜션도 인기척이 끊겼다. 싸늘히 식은 남북처럼 거센 바람에 눈발만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날렸다.
도피안사는 몇 해 만에 몰라보게 달라졌다. 대적광전은 크고 산뜻하게 단정했으며 일주문에서 대적광전에 오르는 길에는 여러 누각이 생겼다. 최전방에 자리했던 작은 암자는 꽤 큰 가람으로 변모했다. 남북 긴장이 과거와 달리 많이 완화되고 사찰 운영권이 군(軍)에서 종단으로 돌아온 결과다. 평화가 번영임을 최전방 도피안사의 변화가 말해주는 듯 했다.
도피안사는 작은 사찰이지만 역사가 깊다. 신라 경문왕 5년(865년) 도선국사가 철원지역 신도 1500여 명 향도와 함께 철불(鐵佛)을 조성하고 삼층석탑을 세웠다. 화개산이 물 위에 떠있는 연약한 연꽃 모습이어서 철불과 석탑으로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려는 뜻을 담았다. 철불과 석탑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23호 석탑이다.
국보·보물 지닌 유서 깊은 절
불상에는 이 지역 향도(香徒) 1500명이 발원해서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한 지역 신도 1500명은 엄청난 인원이다. 그들은 무엇을 발원했을까?
도피안사를 창건하던 시기는 신라 말로 도처에 군웅이 할거하고 신 사조가 퍼져나가던 격변기다. 신사조는 선(禪)이다. 달마대사부터 시작된 선은 육조 혜능을 거쳐 당 시기에 만개하였으며 도의국사가 이 땅에 들여왔다. 통일신라를 지배하는 사상은 화엄(華嚴)이었다.
화엄은 모두가 하나며 한 몸이라는 일체관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가 화학 결합하는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교학 위주에다 왕실과 밀착했다. 왕권이 약화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선(禪)에 밀려났다. 그러나 선 역시 화엄에서 나온 가지라 서로 공존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신라 왕실 힘이 떨어지면서 전국은 다시 지역 호족이 득세하는 군웅할거 시대로 접어들었다. 문자를 멀리하고 모두가 부처임을 내세우는 선은 신라를 부정하고 왕을 자칭하는 호족들에게 딱 들어맞는 사상이었다. 821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도의국사가 전한 선은 설악산에서 싹을 틔워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 전국으로 퍼졌다.
도의국사의 제자 염거화상을 이은 체징이 전남 장흥 보림사에서 선문(禪門)을 열고 태안사에는 혜철국사가 동리산문을 열었다. 도피안사를 창건한 도선국사가 동리산문 혜철국사 제자니 도피안사에 철불을 조성한 이들은 새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세대였을 것이다.
도피안사를 창건 하고 40년 뒤 궁예가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에서 태봉으로 바꾸고 철원을 수도로 삼았다. 그는 도선국사가 도피안사를 창건하던 당시 왕인 경문왕 아들로 알려진 인물이다. 후궁에서 난 4남 궁예가 자신이 미륵의 화신으로 칭하며 아버지의 나라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나라를 세우는 거사나 절을 창건하며 불상을 조성하는 불사나 외형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목적은 같다. 바로 평안(平安)이다. 개인이 평안하면 사회가 평안하고 온 나라가 태평해진다. 하지만 그 방법은 다르다. 나라를 세우는 군인이나 정치가는 무력과 법으로 이루려 하고 종교는 각 개인의 각성과 배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성취하려 한다.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철불을 봉안했던 철원의 향도들도 그러했다. 이들은 철불에 이런 발원을 담았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세상이 어둡게 되고 삼천광(三千光)이 비치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865년 1월에 향도 1500여 명이 발원하여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
불상에 조성 주체 명기
어두운 세상을 부처님 자비광명으로 다시 밝히기를 염원했다.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비추는 미륵세상은 말을 탄 절대자가 아니라 각자가 탐진치를 버리고 서로를 챙기는 자비심이 가득할 때 찾아온다. 나쁜 종교도 좋은 종교도 자신에게 달렸다. 선의 요체 심즉시불(心則是佛)이 말하는 바가 여기에 있다.
마조도일 선사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다. 이 땅에 선의 씨앗을 뿌린 도의국사도 “조사선 가풍에서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구별을 두지 않고 깨침의 본래성을 곧바로 드러낼 뿐”라고 했다. <화엄경>에서도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고 했다. 철불을 조성한 1500여 명의 향도는 그래서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발원하고 이곳 도피안사에서 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승이었던 궁예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자처했다. 구세주를 칭하는 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근 자연재해 불안한 사회 전쟁 같은 생명을 위협하는 외부의 힘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파고들었다. 궁예가 그러했으며 지금 대한민국을 바이러스 공포로 내모는데 결정적 요인을 제공한 모 종교단체 교주가 그러하다.
중생도 부처도 모두 내 안에 있으니 자신을 먼저 돌아볼 것을 가르치는 선(禪)과 자신만 따르면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현혹하는 ‘구세주’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지는 모두 자신에게 달렸다. 나약한 인간은 늘 노력 없이도 행복과 안식을 준다는 ‘구세주’에게 손을 내민다. 시골 장터를 돌며 만병통치약이라며 현혹하는 약장수에게 돈을 건네듯이.
그러나 결과는 파멸과 후회다. 손 쉬운 선택을 한 마음은 욕심이다. 노력 없이 얻으려는 헛된 욕심이 자신과 주변, 사회를 구렁텅이로 내몬다.
장군 꿈에 나타난 불상
철원의 1500여 향도들은 1200여 년 뒤 빼앗긴 나라를 찾는 항일(抗日)애국단의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다. 1919년 8월11일 도피안사에서 철원애국단 결성식이 열린다. 3·1 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여러 대중단체가 결성된다. 대한독립애국단도 그 중 하나였다. 교통과 교육 중심지였던 철원의 종교인 지식인 교육자들은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 지부를 만들었다. 바로 도피안사에서 결성식을 가진 철원애국단이다.
철원애국단은 스님 3명을 비롯해 전도사 등 종교인과 연희전문학교 학생, 면서기, 목재상, 약재상 등 다양한 직업군이 참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은 농사꾼이었다. 3·1운동 이후 대중항일조직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대었던 철원의 항일 애국자들이 바로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밝은 세상을 염원했던 1200여년 전 통일신라 시대 향도(香徒)였던 것이다.
1898년 봄 큰 화재로 사찰 건물이 모두 불탄 것을 월운(月運)스님과 강대용(姜大容)이 재 창건했던 도피안사는 한국전쟁 때 다시 전소된다. 다행히 철조비로자나불상만 땅속에 묻혀 화를 면했다. 1959년 육군 제15사단 사단장 이명재 장군은 꿈을 꾸었다. 불상이 나타나 땅속에 묻혀 답답하다고 했다.
이튿날 이 장군은 전방 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갈증을 느껴 민가에 들렀는데, 안주인이 꿈속에서 불상과 함께 보았던 그 여인이었다. 이 장군은 여인의 안내를 받아 불타 없어진 도피안사 터를 찾아 뒤져 땅 속에 있던 철불을 찾아 도피안사를 복원하고 불상을 모셨다.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 군에서 관리하다 1985년 조계종으로 이관돼 이후 불사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가람으로 변모했다.
피안은 극락이며 정토다. 미륵세상이다.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다. 그러나 그 세상은 절대타자나 누군가의 구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피로 밝은 세상을 염원했던 향도(香徒), 자신의 재산을 털어 독립자금을 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철원의 애국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주인이다. 땅에 묻혔다가 다시 솟아난 비로자나불처럼 부처님 광명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발원하며 도피안사를 떠나 다시 차안(此岸)으로 내려섰다.
철원=박부영 주필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62호/2020년3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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