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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는 점 치지 않고 권력 의지 않고 아첨 않으며…”

조선 후기 최고 권력자 이유원
천마산 아래 살며 목가적 생활

보광사의 고경스님과 친분 맺어
절 중창, 고승 시집 서문도 지어
전쟁으로 폐허…2代 걸쳐 중창

천마산(天摩山)은 동쪽 방면에서 서울로 가는 초입에 높이 솟아 수도(首都)를 사수하는 방벽 역할을 한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은 마치고개 한 곳 뿐이었으니 한양땅으로 들어가는 양반들의 봇짐을 노리는 도적이 들끓었다. 지형이 주변보다 높은데다 북쪽으로 연결돼 도주에 용이한 것도 도적이 창궐한 이유일 것이다. ‘임꺽정 바위’로 미뤄 양주 의적(義賊) 임꺽정도 이 곳 천마산까지 출몰했던 듯 하다.

 

7층석탑에서 바라본 천마산과 남양주 보광사 모습.

태조 이성계가 “인간이 가는 곳마다 청산은 수없이 있지만, 이 산은 매우 높아 푸른 하늘에 홀(笏, 조선시대에 관직이 있는 사람이 임금을 만날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꽂힌 것 같아 손이 석 자만 더 길었으면 가히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라고 했다. 천마산(天馬山)이라고도 표기하는데 마(麻)와 마(馬) 모두 우리 말 ‘머리’에서 나왔다. 하늘의 머리라 부를 만큼 높이 솟았다는 뜻이다. 

‘하늘의 머리’ 천마산

‘하늘의 머리’ 답게 천마산은 많은 절을 품고 있다. 그 중 천년고찰 보광사는 특별하다. 그간 감춰져 있던 이 절은 6·25 때 불탄 가람을 2대 주지에 걸쳐 대대적으로 중수(重修)하고 간직한 역사가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대한(大寒)이 놀러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소한(小寒)날, 눈 대신 비가 내렸다. 겨울비 치고는 꽤 많은 양이 적셨다. 보광사는 한적했다. 운무에 갇힌 천마산도 적요했다. 절 입구 보광사(寶光寺) 비(碑) 풍체가 당당하다. 넓은 주차장에 들어서니 부도와 부도비가 서 있다. ‘화담당유덕대선사’(和潭堂攸德大禪師) 공적비다. 보광사를 중창한 스님이다. 

현 주지 선우스님의 은사이며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 상좌다. 스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보광사 주변 땅을 사들여 중장비를 직접 운전하며 땅을 고르고 가람을 일궜다. 법당 삼성각 요사채 공양간 등을 새로 지었다. 이제는 크고 웅장한 대웅보전에다 넓은 경내와 주차장을 갖춘 가람으로 변모했다. 

대웅보전 앞 넓은 마당 한쪽에 돌 계단이 높게 서 있다. 계단 끝에 탑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자 천진불이 활짝 웃으며 사찰과 마을을 내려다 보고 앉았다. 그 뒤 7층탑이 서있다. 마치 설악산 봉정암 탑에서 내려 보는 모양새다. 주지 선우스님이 절 풍수에 맞춰 작은 산을 쌓고 탑을 올렸다고 한다. 은사 스님이 부지를 사고 터를 닦은 위에 제자가 가람을 배치했다. 그렇게 하여 보광사는 한 세기 만에 다시 비상(飛上) 할 채비를 마쳤다. 경내 곳곳에 붙은 각종 신도교육 강좌 기도 안내판이 활기찬 보광사를 보여준다. 

보광사에는 중창주 화담스님 외에 또 한분의 화담스님이 등장한다. 화담경화(華潭敬和, 1786~1848)선사다. 정안스님(전 불교문화재연구소장)의 연구에 의하면 화담스님은 40년간 솔잎과 죽을 먹고 밤낮으로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수행에 힘썼으며 <화엄경> <열반경> <팔양경(八陽經)> 등 여러 경전에 주석(註釋)을 달 정도로 교학에도 주력했다. 

55회에 걸쳐 화엄강론을 펼칠 정도 화엄강백(講伯)으로 유명했다. 현등사에서 입적하자 절 북쪽에 승탑을 세웠다. 40년간 장좌불와 수행했던 지계청정한 선사며 경전에 달통한 화엄강백으로 명성을 떨치는 고승이니 제자들이 도처에 널렸고 선비들도 존경하고 흠모했던 듯 하다. 문도가 주석한 김룡사, 대승사, 통도사, 표충사 등에 진영을 모셨고 스님의 사후 문집을 정리하는데 한 번도 본적 없는 당대 최고 권력자가 찬을 썼다.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 1888)이다. 그는 이항복의 9세손으로 조선 고종대에 정치가이자 문장가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출가수행자는 아니지만 “승려처럼 거처하며 차를 마신다”고 자신의 시에 남겼고 통도사에 소장돼 있는 성곡신민 선사 진영 찬을 지을 정도로 친불교 인사였다.

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른 조선 후기 최고 권세가였지만 늘 자연을 동경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좋아하였으며 시와 음악 등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권세가 집안답지 않게 겸손하고 친절하여 나이와 학문을 떠나 많은 사람을 사귀었다. 그 중에는 추사 김정희, 고경선사 등도 있었다. 

당대 최고 권력자답지 않게 자연을 그리워하고 불교를 가까이하며 차를 즐겼던 이유원은 46세 되던 해인 1859년 서울을 떠나 천마산 동쪽 가오곡(嘉梧谷)으로 들어갔다. 젊을 적 동경하던 대로 자연에 묻혀 집을 짓고 지인과 더불어 차를 마시고 시를 읊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혼란하던 시기 어쩌면 무책임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당대 지식인과 권력자 어느 누구도 기울어 가는 조선을 구하지 못했으니 차라리 자연에 묻혀 유유자적하는 편이 나았는지 모른다. 어쨌든 가오곡에 들어간 이유원은 꿈에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절을 중창했다. 바로 천마산 보광사다. 
 

 

남양주 보광사 대웅보전.

당대 최고 권력자가 중창주

이유원은 꼼꼼하게 기록을 남겼다. 임하필기(林下筆記)다. 일기형식으로 자신의 일상과 시 사람에 관한 평과 교류 등 잡사(雜事)를 담았다. 그 속에 그가 보광사를 중창한 연유, 불교와 인연 등이 담겨 있다. 

그는 보광사를 중창한 연유를 ‘임하필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만회암은 어떤 중이 옛 절을 폐기하고 새 터에 고쳐 세운 것이다. 계유년 여름에 내가 꿈 속에서 절에 올라가니, 관세음보살이 공중에 나타나서 노한 기색을 띠었고 또 몇 마디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은 기억나지 않으며, 관세음보살이 또 어떤 중을 포박하여 이불로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매우 괴이하게 생각되어, 중으로 하여금 옛 절을 중수하고 옛 부처를 도로 봉안하게 하였다. 이 절이 두 번이나 꿈에 나타난 것 또한 괴이한 일이다.” 

누군가 옛 절을 폐기하고 만회암을 지었는데 이유원의 꿈에 관음보살이 현몽하여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여 새로 중창했다는 내용이다. 이유원이 말한 옛 절은 보광사의 원래 절로 보인다. 보광사는 고려시대인 서기 10세기 혜거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폐찰 지경에 이른 절을 새로 지었는데 완전하지 않았던 듯 하다. 이를 가오곡에 들어와 살던 이유원이 계유년(癸酉年)인 1873년 여름에 중수했다는 것이다. 

이유원이 만회암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경이라는 스님 때문이다. 고경스님은 이유원에게 차를 건네고 함께 다회를 열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 고경에게서 배운 차에 관한 지식을 이유원은 ‘죽로차’에 자세히 남겼다. 천마산 보정사(寶晶社)에서 간행한 목판본 ‘지장보살본원경’ 역자(譯者)에 고경(古鏡)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고경은 화담경화스님의 상좌다. 화담경화스님은 1848년, 이유원이 아직 천마산으로 들어오기 전 입적했다. 화담스님의 제자들은 스님 사후 스승의 은사인 화악지탁선사가 쓴 시편을 모아 시집 <삼봉집>을 편찬했는데, 이유원이 그 서문을 썼다. 그리고 <삼봉집> 뒤편에 화담스님의 비명(碑銘), 영찬, 행장을 수록했다. 덕분에 서산-편양-환성-함월-화악-화담으로 이어지는 조선 중 후기 선맥(禪脈)이 밝혀졌다. 삼봉집은 1869년 지었다. 

이유원이 1859년 천마산에 들어와 유유자적하며 살다 인근 만회암의 고경스님과 친분을 맺고 교류했다. 1869년 고경이 노승(老僧) 화악선사의 시편을 엮으며 당대 최고 학자며 권력자인 이유원에게 서문을 부탁하였고 그로부터 4년 뒤 만회암을 새로 중창했다. 
 

 

보광사 칠층석탑.

관세음보살 친견 후 중창

이유원은 보광사와 관련된 꿈을 자주 꾸었다. ‘임하필기’에 또 이렇게 적었다. “내가 노경에 꿈 속에서 산중에 들어가 보았더니, 석벽에 천광대사정식(天光大師淨食)이란 여섯 글자의 대자(大字)가 새겨져 있고, 그 곁에는 밥 먹는 중들이 수없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큰 숟가락 여섯 개를 주었다. 그 모양이 고려 때의 숟가락과 같았다.

두 개는 따라온 자들에게 나눠 주고 네 개는 품에 품고 깨었다. 그 숟가락을 그림으로 그려 고경이라는 선승에게 질정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향산에 운광대사가 남긴 숟가락이 있는데 그 모양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당대 최고의 학자답게 그는 불교에도 밝았다. ‘임하필기’에 그는 “불가의 말에 네 가지 정식(淨食, 깨끗한 생활)이란 것이 있으니, 유구식(維口食, 주술이나 점을 치는 일)을 아니하며, 앙구식(仰口食, 조정에 의지하여 먹는다는 뜻)을 아니하며, 방구식(方口食, 부호에게 아첨하여 생활하는 것)을 아니하며, 하구식(下口食, 논 밭을 갈거나 탕약을 지어서 생활하는 것)을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불교를 꽤 많이 공부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불교는 정법(正法)을 살필 겨를도 가늠할 눈도 없었다.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였다. 그런데 비법(非法) 사승(邪僧)만 가득할 줄 알았던 불교계에 초의와 같은 대선사, 화담 화악과 같은 청정율사 대강백이 넘쳤다. 

조선의 불교는 성리학자와 권력이 500년간 지속적으로 탄압하고 억눌렀지만 정법을 지켰고 뛰어난 고승을 길렀다. 갖은 수를 다했지만 끝내 기울어버린 쪽은 불교가 아니라 유학자들의 조선이었다. 보광사 중창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자리에 있었던 조선 최고 권력자의 불교에 대한 사죄이자 불교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 했던 몸부림은 아닐까? 

보광사를 떠나오는데 천마산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겨울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승려는 주술과 점을 치지 않고 권력에 의지하지 않으며 부자에게 아첨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원의 말이 귓전을 울렸다. 
 

 

탑으로 가는 길.

 

화담 유덕스님 부도와 비.

남양주=박부영 주필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54호/2020년2월5일자]

 

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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