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지고 새해가 밝는다. 지난해 마지막 날과 새해 첫 날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내년부터는…’ 라는 계획을 세우기 마련이고 미뤄왔던 그날이 왔다.
새해 첫날을 상징하는 건 일출이다. 새해 일출은 단순히 1월1일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1년의 시작을 알린다. 많은 사람들은 이날 추위와 싸워가며 일출을 기다리고 황홀한 일출을 감상하며 스스로와 많은 약속을 한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일출을 보러가는 곳은 동해안 쪽이다. 하지만 동해안이 아니더라도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지난 12월28일 전남 고흥 거금도를 찾았다. 2009년 고흥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2011년 소록도와 거금도를 잇는 거금대교가 완공되면서 한반도에서 10번째로 큰 섬 거금도는 섬이 아닌 섬이 됐다.
거금도 동남쪽 끝 오천항이라는 작은 항구, 이 곳에서 일출을 기다렸다. 푸른 여명이 사라지고 수평선 끝에선 붉은 해가 솟아올 것을 예고하듯 적색 기운이 감돈다. 바로 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데 수평선 끝에 구름에 쌓여 있다. “나왔다!” 몇이 외친다. 뜨거운 해가 두꺼운 구름 틈 사이로 조금 모습을 드러내더니 구름 위로 강렬한 붉은 모습이 나타난다. 감탄사를 낼 여유도 없이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장시간 푸른 여명과 함께 바다를 지켰던 보상은 짧지만 강하다. 태양은 모든 사물을 붉게 물들인다. 붉은 기운이 가슴을 쓸고 지나간다.
거금도 일출에 들뜬 마음을 다스리기에 적당한 곳이 있다. 거금도 서쪽 용대산 자락에 위치한 송광암이다. 이곳에 니우선원(泥牛禪院)이 있는데 해저니우함월주(海底泥牛含月珠)로 시작하는 고봉대혜스님의 선시 ‘바다 밑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아난다’ 를 화두 삼아 공부하기에 이 보다 좋은 장소가 있을까 싶다.
선원 이름 못지않게 송광암 창건 설화 또한 흥미롭다.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모후산에 올라 수행터를 찾기 위해 나무로 조각한 새 세 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송광사 국사전 앞에 한 마리가 날아갔고 여수 금오도에 또 다른 한 마리, 거금도 금산에도 한 마리가 각각 내려 앉았다고 한다.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사찰이 세워졌으니 이름도 송광사와 같은 송광암이다. 고려 신종3년(1200년)에 창건된 송광암 앞엔 수백년은 된 듯한 느티나무 고목이 절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거금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프로레슬러 김일이 있다. 거금도에는 김일기념관도 있고 둘레길 이름 중 하나가 레슬러의 길이다. 김일의 어머니가 송광암의 독실한 신도였다고 한다. 송광암 극락전 동종에는 ‘발원 공덕주 김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송광암에서 600m 올라가면 용두봉에 닿는다. 용두봉에서 다도해로 떨어지는 해를 감상하며 송광암 종소리를 듣는다면 거금팔경 중 제1경 송암모종(松庵暮鐘)과 제8경 사봉낙조(蓑峰洛照)를 경험할 수 있다.
거금대교를 넘어 오면서 지나게 되는 곳이 소록도다. ‘문둥병’이라 불리던 ‘한센병’ 환자들이 일제강점기부터 버려졌던 곳이다. 그들은 그 곳에서 인간적 모멸감과 고통스런 노역으로 죽어갔다. 섬의 중앙공원에는 옛 감금시설, 기록관 등이 있어서 한센병 환자들의 아픈 과거를 알 수 있다. 작은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소록도(小鹿島). 푸르고 아름다운 섬에 씻겨지지 않는 아픔이 새겨져 있다.
소록도에는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찾아와 환자들을 돌보다 70대가 돼서 부담을 주기 싫다고 새벽에 편지 한 장 남겨놓고 고국으로 돌아간 두 분의 오스트리아 수녀 이야기가 전한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한 보살들이다. 불교는 실천의 종교라고 말한다. 수녀님들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바랬던 사사로운 욕심이 부끄러워졌다. 뭐든 실천하자.
[불교신문3167호/2016년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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