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 세계가 정말 있습니까? |
문: 불교를 공부하다보니 가장 많이 접하는 말이 해탈입니다. 사실 사는 것 자체가 정말로 행복하다기보다는 솔직히 힘들고 괴로운 일도 많은지라 해탈의 세계를 동경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스님들의 모습을 봐도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분들 같지도 않고, 때로는 실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해탈의 세계가 있긴 한 것입니까? 해탈은 불교존재의 가장 큰 이유 보이는 경계가 아닌 체험의 경지 답: 해탈을 제외하고는 불교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많은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없었다면 불교가 우리 곁에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탈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 그런 의심을 갖게 한 모양입니다. 해탈이란 어느 특정 단체의 전유물도 아니며, 어떤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조건하에서도 가능한 것이며 어느 누구라도 이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어쩌면 너무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쉽다고 한 것은 ‘놓아 버림’을 가리키는데, 지금 자신을 정신없이 끌고 가고 있는 ‘그 무엇’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 ‘놓아 버림’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협조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며,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바로 툭 놓아버리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놓아버리면 낙오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놓질 못하는 것입니다. 놓고 보면 나를 끌고 가던 ‘그 무엇’이 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지만, 놓기 전까지는 나의 모든 것처럼 생각되지요. 그래서 ‘그 무엇’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해탈에 이른 이들은 마치 바위나 고목처럼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해탈의 경지에 있는 이들의 삶은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진 밝음이며, 또한 잘못된 가치관 따위에는 걸리지 않는 무애자재의 경지입니다. 이것은 제도화되고 정형화된 종교마저도 넘어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라도 가능한 경지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세속적 집착과 자기의 종교적 신념마저도 버려야만 합니다. 그러니 결코 쉽다고만 할 수도 없겠군요. 육조 혜능대사는 “선도 악도 생각지 말라! 그 순간 그대의 주인공이 어느 곳에서 편안하게 바로 서는가?”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셨고, 석두희천 선사는 해탈의 경지를 묻는 수행자에게 “도대체 누가 그대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냐?”하며 단도직입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질문에서처럼 스님들을 보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스님들의 모습도 보는 사람의 경계정도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더구나 해탈경계는 모양이 없는 경지로 애당초 눈으로 확인될 성질이 아닙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승복만 걸치고 있는 이들도 있을 수 있고, 또 정식으로 출가한 스님이라도 대부분 수행과정에 있으므로 불자들의 눈에는 불만스런 모습도 많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뿐만 아니라 고승으로 소문난 분일지라도 자신의 마음경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스스로를 살피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해탈은 철저히 스스로가 체험하는 것이지 타인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송강스님/ 개화사 주지 [불교신문 2473호/ 11월5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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