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
부처님오신날 이틀 전에 찾은 금산사, 봉축준비가 한창이다. 599년 백제 법왕때 창건된 금산사는 이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대가람이 되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매김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일체생명 보듬은 ‘어머니산’에 나툰 미륵부처님
천년세월 중생과 함께 하네
모악산으로 향하는 길엔 호남평야가 펼쳐졌다. 이제 막 모내기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겨울을 보낸 논에 흙을 잘게 부스는 써레질을 마쳤다. 논은 이제 못자리에서 이사 올 모를 위해 물을 가득 받아 놓고 있다. 넓은 평야 위에 높게 솟아오른 모악산. 그 산에서 생성되는 물이 농부들에겐 젖줄이다. 마른 땅을 적셔주는 생명수이자 여린 생명을 보듬어주는 어머니다. 산의 옛 이름은 ‘엄뫼’ ‘큰뫼’다. ‘엄뫼’는 의역하면 ‘어머니산’이란 의미의 ‘모악산(母岳山)’이다. 큰뫼는 음역한 ‘큼’과 의역한 ‘뫼’를 합쳐서 ‘금산(金山)’을 말한다. 미륵신앙 근본도량인 금산사(金山寺)는 어머니산 서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금산사 원통전, 천수관음이 모셔져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인 서기 599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진표율사는 12세 때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한 후 변산의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수행을 한 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에게 계법을 전해 받았다. 스님은 금산사로 돌아와 중창불사를 시작,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비로소 대가람으로 중창된 금산사, 더욱이 스님이 이룩한 미륵신앙의 토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 미륵전 내 외벽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장엄되어 있다. 미륵전 외벽 보살도.
금산사를 찾던 날, 전날 온 비로 해탈교 아래 개울에는 많은 물이 흐르고 있다. 철철철 흘러넘치는 계곡물 소리를 벗 삼아 금강문과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까지 걷는다. 보제루 아래 계단을 올라서 가람의 중심에 서면 거대한 사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정면에 있는 대적광전과 오른편에 위치한 미륵전 왼편에 대장전과 명부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규모를 보니 1725년 남악선사가 개설한 화엄대법회에 무려 1400여 명의 대중이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난다. 국내 유일한 3층 목조 건축물, 국보 제62호인 금산사 미륵전은 금산사의 상징이다. 진표스님이 세운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1635년(인조13) 수문스님이 재건했다. 건물 내 외벽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미륵전 내부는 겉모습과 달리 하나의 통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거대한 규모의 미륵불과 협시불이 모셔져 있다.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한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 장육전 등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미륵전은 특이하게도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이라는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뜻한다. 서기 981년에 완성된 보물 제25호 오층석탑을 비롯해 26호 방등계단, 27호 육각다층석탑, 22호 노주(露柱), 828호 석등, 24호 혜덕왕사진응탑비, 28호 당간지주, 23호 석련대 등 귀한 성보가 가람 가득이다. “사람들은 모두들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있어 자식이 어버이 공경하듯 하고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듯 하며 말과 행동이 지극히 겸손하다.…” <미륵대성불경>에 묘사된 미륵부처님이 다스리는 세상의 모습이다. 불기 2554년 부처님오신날을 회향하면서 미륵부처님의 마음을 되새긴다. 금산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627호/ 6월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