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사 |
선운사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290호로 지정됐다. 대웅보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오른쪽에 약사불이 봉안돼 있다.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 후벽에 조성된 관음보살도. 가공되지 않은, 특유의 휘어짐을 간직하고 있는 만세루. “부처님 계시던 도솔천이 어드메냐
삼세제불, 선운산 도솔계곡에 나투었네”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넓고 하얀 마당이 눈부시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 고승 검단(黔丹)선사가 창건했다. 선운사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자,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숯과 돌을 가져와 큰 못을 순식간에 메웠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쳤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 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쳤다.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하고,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을 ‘검단리’라고 불렀다. 검단선사의 창건이야기 뿐만 아니라 선운사에는 온통 이야기 거리로 가득하다. 대웅보전 뒤쪽에 천연기념물 제184호 동백나무 숲이 있다. 선운사가 동백을 조경한 이유는 화재 예방 때문이었다. 불에 강한 동백나무를 심어 산불로부터 법당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동백나무 숲은 선운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미당 서정주의 시와 송창식의 노래 덕분에 더 친근하다. 선운사 동백꽃은 애달픔의 극치로 표현돼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으로 인식됐다. 대웅보전 앞에 자리한 만세루는 대웅보전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누구나 선운사 인근 차밭에서 따낸 차를 즐길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벽과 도리마다 이곳을 찾은 문인들이 남긴 오래된 작품들이 붙어 있다. 기둥하며 서까래, 보 등이 전혀 가공되지 않고 특유의 휘어짐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한 일본 건축가가 아름다움에 감탄해 만세루를 향해 삼배했다고 한다. 만세루 앞에 위치한 보물 제290호 선운사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 웅장한 대웅보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 후벽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관세음보살이 있다. 연화대좌에 앉아서 기도객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관음보살이 하얀 벽에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1980년대 선운사 노스님들은 사찰을 찾은 신도들에게 꼭 관세음보살님께 안내해 주었다.” 주지 법만스님이 살짝 귀띔해 주었다. 성보박물관에는 보물 제279호 금동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 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여름에 도난 후 일본으로 넘어 갔다. 이 후 몇 차례 소장자가 바뀌는 동안 지장보살이 이 들의 꿈에 나타나 “도솔산에 다시 보내라” 메시지를 전하고 이를 지키지 않자 소장자들의 집에 액운이 닥쳤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마지막 소장자가 고창경찰서에 연락해 당시 주지스님과 경찰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도난 당한지 2년 만에 다시 모셔오게 되었다. 1500년 동안 불법을 전파한 선운사는 힘찬 선운산의 산세처럼 굳건히 이 자리를 지켜왔고, 불보살 한 분 한 분 당호 곳곳마다 역사가 담겨져 있다. 한 여름 밝은 햇살처럼 사시예불 소리가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선운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631호/ 6월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