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황사석탑 전경. 원래는 9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탑에 봉안된 가위와 금.은제 바늘 등 여성 생활용구.

분황사석탑 감실과 인왕상.

사자상.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은 신라 제12대왕 선덕여왕이 분황사와 함께 건립한 모전석탑으로 현존 최고(最古)의 탑이다. 우리나라 모전석탑의 계보는 분황사 석탑을 시원으로 해서 신라 말기로 계승되었고, 그 전통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분황사탑이 가진 보다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우리나라 모전석탑의 시원이자 가장 오래된 탑이라는 점보다 신라의 여왕체제의 출범을 알린 기념물이자 불교에 의존한 왕권 신성화(神聖化) 작업의 상징물이라는 데 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후 역대 왕조를 통해 성쇠를 거듭하면서 1,4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초기에는 자장율사와 원효대사를 비롯한 고승대덕이 주석하는 왕실 원찰로서의 위상이 높았고, 황룡사 금당 벽화로 이름난 솔거가 이 절의 관음보살도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했다. 8세기 중엽에는 대형 약사여래상을 조성하고 금당을 중건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으나 몽고군의 침입이 있었던 13세기 이후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탑에 드리운 폐허의 그늘 속에서도 옛 영화의 자취를 감지해 낼 수 있다.
선덕여왕은 분황사탑을 단순히 불신사리를 모시는 신앙의 대상으로 세웠을까? 아니면 어떤 다른 건탑(建塔) 의도가 있었을까?
불교가 공인된 이래 신라의 역대 왕들은 장엄하고 화려한 사찰을 지어 부처님께 봉헌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신성화하고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려 했다. 법흥왕이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건립한 것이라든지, 진흥왕이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창건한 것, 또는 진평왕이 황룡사를 대대적으로 확충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세자가 없는 진평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한국역사상 단 세 명(선덕, 진덕, 진성)밖에 없는 여왕이자 그것도 최초의 여왕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그녀는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을 정치적 파행으로 간주하는 당시 남성위주의 정치문화를 극복해야만 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왕권 계승의 정통성 강조와, 여왕체제의 권위 과시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선덕여왕은 분황사 낙성과 때를 같이 해서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연호를 새로 정한 것은 여왕체제의 출범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분황사를 선왕인 진흥왕.진평왕 시대의 왕실 원찰인 황룡사에 잇대어 세운 것은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고, 9층의 웅장한 탑을 세운 것은 불교에 의존하여 왕권의 신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분황사탑은 새로운 여왕체제의 출발을 대내외에 천명한 기념물이자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불교에 의존한 왕권 신성화 노력은 분황사탑 건립에서 시작해서 225척(약 80m) 높이의 거대한 황룡사9층목탑 건립으로 이어졌다.
불교와 연관 지어 왕권을 신성화하려 했던 선덕여왕의 의지는 분황사라는 절 이름에도 투영되어 있다. 분황사의 ‘芬’은 ‘향기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皇’은 황룡사, 황복사, 황성사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 왕실의 원찰을 의미하는 상징어이다. 그리고 ‘皇’또한 ‘王’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글자이므로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로 해석될 수 있다.
1915년, 일제강점기의 일본 사람들에 의해 탑이 해체 복원 될 때 2층 탑신 중앙 석함(石函)의 내부에서 다량의 사리구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사리구들 역시 분황사탑이 일반적인 탑과 다른 성격의 탑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사리구들 중에 유리병.은제 합.원반형 수정.원형 조개껍데기.패류.곡옥.도제 장식품.수정옥.유리.금제 귀걸이.작은 방울.유리제 장식구.금제 실패.유리제 침통.청동 침통.금은 바늘.동제 가위.각종 옥류.금동 금구.금동제 족집게.상평오수전.숭령중보와 이밖에 많은 금동 파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사리구들 가운데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실패, 바늘통, 바늘, 가위, 족집게 등 여성들의 생활 용구들이다. 이러한 여성용 생활용구들이 귀중품과 함께 봉안된 예는 왕릉의 부장품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뿐, 일반적인 탑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점은 분황사탑 건립 목적이 여왕권의 강화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분황사탑은 현재 약 13m 높이의 3층탑으로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 높이의 장중한 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탑신 부재의 재질은 안산암이고, 기단부와 탑신의 동서남북 방향에 나있는 감실 및 그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 인왕상의 석질은 화강암이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의 수는 모두 9708개로 조사되었는데, 이처럼 많은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엄청난 경비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분황사탑이 9층의 대규모 탑으로 건립될 수 있었던 것은 선덕여왕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탑의 각 부분을 살펴보자. 1층 옥신 사방에 석문이 달린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감실은 불상.신주(神主), 또는 기타 여러 가지 물건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공간으로, 줄여서 감(龕)이라고도 한다. 건물보다는 작은 규모로서 벽감(壁龕), 건축물 형태, 공예적 형태의 감으로 구분되는데, 분황사탑의 것은 벽감에 가까운 형태라 할 수 있다. 현재 감실 속에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불상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후대에 봉안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감실 입구 양쪽에 인왕상이 배치되어 있다. 인왕상은 반라의 몸에 천의를 두르고 팔을 들어 왕성한 힘을 강조하는 역사(力士)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왕은 불법 수호신으로, 사악한 것이 사찰 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찰의 문이나 전각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보통 한 쌍이 배치되는데, 한 상(像)은 입을 벌리고 손에 금강저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고, 다른 한 상은 입을 꽉 다물고 주먹을 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단은 막돌로 쌓았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13m, 높이가 약 1m 규모이다. 기단 위 네 모퉁이에 화강암 재질의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사자상이 우리나라 탑의 사자상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사자가 탑 한 구성요소가 되어 있는 예는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 사자빈신사지의 삼층석탑 등 사사자석탑 형식 탑의 사자상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사자상, 의성관덕동석사자 등이 있다. 분황사탑의 사자상을 이들 유례들과 비교해 보면, 배치 방법에서는 다보탑 사자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불교미술에서 사자는 용처럼 신격을 가진 신중도 아니고, 연꽃처럼 불교의 상징형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불국토와 부처님을 장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자상은 사자가 포효하며 일어날 때 다른 짐승 무리는 복종하고 사자 새끼는 용맹을 더하는 것처럼 부처님이 가진 그와 같은 권능과 위신력을 상징하고 있다. 분황사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네 방향을 지키고 있는 사자는 수호의 기능과 함께 부처님의 위의를 상징한다.
분황사탑은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과 동시에 건립되었다는 점, 선대(先代) 왕들이 창건.발전시킨 황룡사 바로 옆에 창건되었다는 점, 봉안된 사리구들 중에 여성용 생활 용구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 몇 가지 일반적인 탑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봐서 분황사탑은 단순히 불사리를 봉안할 목적으로 세운 탑이 아니라 여왕체제의 정통성 강조와 불교에 의존한 왕권 신성화 노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57호/ 8월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