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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팔상전(국보 제55호)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법주사 경내에 있다.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는 이 건물은 1984년까지만 해도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조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으나 쌍봉사 대웅전이 소실된 이후부터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탑이 되어 있다. 목조탑이라는 점 외에도 법주사 팔상전은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탑의 성격과 예배 장소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탑전(塔殿)’ 형식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 전경.

 

건물 중심 네 벽면에 두 폭씩 팔상도 배치

전체 보려면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게 돼

심초석의 불사리를 중심으로 탑돌이 한 셈

유성출가 사문유관 순으로 바뀐 차례 궁금

 

법주사 팔상전은 5층 누각형식의 목조탑이다. 탑은 인도에서 복발형(覆鉢形)으로 시작되어 중국에 들어오면서 고루식(高樓式) 목탑으로 변형.발달되었는데, 이러한 형식의 목탑이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다. 우리나라 불교 건축사에서 가장 유명한 목탑은 지금은 볼 수 없는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 때 2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탑을 완성하였는데 그 높이가 총 225척에 달했다고 한다. 목탑은 삼국시대 뿐 아니라 고려시대도 세워졌음이 만복사지의 탑지에 의해 밝혀진 바 있고, 조선시대까지도 전해져왔음을 현존하는 유적에서 확인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법주사 팔상전인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553년 신라 진흥왕 당시 의신(義信)스님에 의해 창건, 776년 신라 혜공왕 2년 병진(秉眞)스님에 의해 중창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 병화에 불타 없어진 것을 1605년(조선 선조 38년)부터 1626년에 걸쳐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원래 양식과 거의 동일하게 중건하였다. 지난 1968년 전면 해체수리 할 때, 전체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서 부처님 사리가 들어 있는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법주사 팔상전이 불사리 봉안처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최근에는 상륜부가 기울어 이 부분을 다시 수리한 적이 있다.

팔상도 가운데 두 장면.

법주사 팔상전이 목탑형식의 건물이라는 점에서 흔히 쌍봉사 대웅전과 비교하고 있지만 쌍봉사 대웅전과 크게 다른 점 하나가 있다. 그것은 쌍봉사 대웅전과 달리 법주사 팔상전은 사방에 계단이 설치된 높은 기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단부만 본다면 법주사 팔상전은 쌍봉사 대웅전보다 오히려 불국사 다보탑과 더 가까운 느낌을 준다.

불국사 다보탑은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보신불인 석가모니불이 불이(不二)임을 상징하는 탑으로, 팔상전에서 보듯이 탑의 기단 사방에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정사각형의 모습을 취하면서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의 근본도리를 상징하고, 제1층을 향하여 올라가는 동서남북 사방의 계단은 오직 구도자에게만 허락된 수행의 수행경지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 기단 또한 그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팔상전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각 층의 칸의 수(數)이다. 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너비를 말하는 단위로 정확한 치수는 정해져 있지 않다. 1층.2층은 5칸, 3층.4층은 3칸, 5층은 1칸으로 되어 있다. 전체 층수를 5층으로 설정하고, 각 층의 칸수에 5.3.1의 칸수를 적용한 것은 일정한 체감율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동양 전통의 수리관(數理觀)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5는 양수의 중심 수이고, 3은 완전의 수이며, 1은 그 자체가 양을 의미하는 상수(象數)이다. 옛 사람들은 탑의 층수뿐만 아니라 생활의 여러 방면에 이와 같은 양의 상수를 적용시켰다. 상수는 단순히 수를 셈의 대상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대응과 조화의 이치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와 같은 이치에 인간이 동참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팔상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각들이 많다. 예컨대 쌍계사.통도사.운흥사.선암사.범어사.보경사 등 많은 팔상전 건물들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팔상전 건물들은 예배 공간으로서의 기능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법주사 팔상전은 불탑 형식의 구조로 된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성격과 예배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과 같이 탑의 내부가 예배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최초의 기록이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에서 보인다. 내용 중에, “동입내원탑중이은(童入內院塔中而隱)”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동자가 탑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탑 속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 탑 내부에 그만한 공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 동자가 숨어들었다는 그 탑이 법주사 팔상전과 같은 형식의 목탑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법주사 팔상전은 팔상도를 봉안할 목적으로 건립된 건축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팔상도는 법주사뿐만 아니라 일반 사찰의 팔상전이나 영산전과에서도 팔상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 사찰의 팔상전에서는 8폭의 팔상도가 불단을 향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되어 있어 한 곳에서도 내용 전체를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는 건물 중심에 조성된 네 벽을 돌아가면서 한 벽면에 두 폭씩 팔상도를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한 곳에서는 전체를 다 볼 수가 없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탑돌이를 한 셈이 된다. 이 탑돌이는 곧 심초석(心礎石)에 봉안된 불사리를 중심으로 한 탑돌이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팔상전의 나찰 상.

법주사 팔상전의 팔상도 역시 다른 절의 팔상도처럼 도솔내의.비람강생.사문유관.유성출가.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 등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 중 여덟 가지 중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팔상도의 각 장면의 배치는 시계방향으로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솔내의상’을 시작으로 해서 ‘쌍림열반상’에서 끝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법주사 발상도의 경우에 배치 순서가 좀 어긋나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원칙대로라면 ‘도솔내의’, ‘비람강생’, ‘사문유관’, ‘유성출가’ 등의 순으로 되어 있어 하나 실제는 ‘유성출가’, ‘사문유관’ 순으로 차례가 바뀌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배치해 놓은 이유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팔상전 외부 장식 중 우리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2층 처마 밑 네 모서리에 장식된 난쟁이 형상의 인물상과 용의 형상이다. 난쟁이상은 공포를 구성하는 수서(垂舌 : 공포에서 쇠서 끝이 아래로 삐쭉하게 휘어 내린 모양으로 된 것) 위에 있는 두 개의 연꽃 봉오리 위에 쪼그리고 앉아 두 팔과 머리로 추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눈은 왕방울 눈이고, 나선형으로 표현된 눈썹과 수염은 짙은 색깔로 채색되어 있다. 이 난쟁이 형상은 불교 외호신중의 하나로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함과 동시에 불자와 불전을 수호하는 기능을 가진 존재로 알려져 있다.

이 난쟁이 상과 닮은 조각상이 팔공산 환성사 대웅전 불단 우측면에도 있다. 적갈색 몸에 볼록 튀어나온 배, 부리부리한 눈과 주먹코가 인상적인 이 난쟁이상은 쪼그리고 앉아 짧고 통통한 두 팔을 들어 위쪽의 단을 받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 절 스님들 이것을 나찰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의 사찰 건물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조각상을 볼 수 있는데, 나라 현 호류지(法隆寺)의 오층 목탑에 장식된 난쟁이 조각상이 바로 그런 예다.

팔상전의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호.

끝으로 살펴 볼 것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장치이다. 1968년 9월 팔상전을 해체 할 때 심초석에 마련된 네모꼴의 사리공안에서 사리장엄구와 함께 은제 사리호가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석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경우는 많지만 목탑에서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사리장치가 발견됨으로써 법주사 팔상전이 사리 봉안처로의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사리호는 연꽃 모양의 뚜껑을 가진 그릇 표면에 큼직한 연당초(蓮唐草) 무늬를 새기고 여백 부분에 어란(魚卵) 무늬를 채운 소박한 장식의 용기이다. 사리호를 쌌던 보자기에는 한글이 섞인 축원문이 먹으로 쓰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 ‘병生王孫昌盛萬歲’.‘身如金剛심신안락’.‘을사생최씨’ 등의 글자가 판독되었다. 함께 발견된 사리함 내부 장식 동판에서도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 의해 팔상전의 중건내력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허균 /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53호/ 8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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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송김실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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