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석굴 본존상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원형 연화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생명력이 깃든 풍부한 양감과 신성의 인체미를 자랑하는 석굴암 본존상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의 종교미술사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석굴내의 다른 존상들과 마찬가지로 본존불은 아직도 자신의 정체를 우리들 앞에 완전히 드러내 놓지 않고 있다. 석굴암 석굴은 땅 속에 조성된 석굴사원으로, 동양 전통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두운 땅굴 속에 돌에 새긴 많은 조각상들이 둘러 서있어 개방적인 지상의 불전에 비해 훨씬 장려하고 신비스럽고 숭엄한 느낌을 준다. 원형의 주실(主室) 벽에는 보살상, 십대제자상 등이 둘러 서있고, 그 위쪽에 마련된 10개의 감실에 8구의 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모든 존상들의 중심에 본존상이 군림하고 있다.
<사진설명: 연화 머리 광배. 본존 뒤쪽 벽에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본존상을 조용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다른 불상과는 다른 차원의 그 무엇이 느껴진다. 사람 형상이지만 실재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감격의 정지화를 거쳐 표현된 연원성을 지닌 인간상이다. 조용하고 온화한 상호는 경배자로 하여금 깨달은 자의 한없는 열락을 느끼게 하고, 당당한 체구는 범접할 수 없는 사자빈신의 위엄을 나타낸다. 행인형(杏仁形)의 두 눈은 적정(寂靜)의 경지에 든 부처님의 내면세계를 비추어 내고 있고, 우아한 나방형 눈썹과 불그레한 입술은 남녀 양성을 초월한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본존상과 관련해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존상의 위치가 주위의 보살상, 천부상, 제자상 등 여러 존상들의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원의 중심에서 약간 뒤쪽으로 물러나 있지만, 그것은 시각적인 문제 해결과 예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 뿐, 본뜻과는 상관이 없다.
밀교에 단(壇), 또는 ‘윤원구족(輪圓具足)’으로 번역되는 만다라 개념이 있다. ‘윤원구족’은 낱낱의 바퀴살이 중심축에 집중되어 둥근 수레바퀴를 이루는 것과 같이, 모든 법을 원만하게 갖추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만다라는 이와 같이 적집(積集)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만다라의 중심은 유아독존의 자리가 아니라 일체 제법이 널리 어울려 하나가 된 원융(圓融)의 자리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상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석굴 본존상은 만다라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또한 적집과 권화(權化)의 원리 속에서 일(一)과 적집을 표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존상은 원형의 복련 하대석과 팔각의 중대석, 그리고 원형의 앙련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 연화대좌 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선정인의 상태에서 오른손을 풀어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형태로, 이 수인은 석존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실 때에 지신(地神)을 깨우쳐 자신의 성도를 증명하게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항마촉지인이 본존상의 명호가 처음부터 석가여래로 불리게 된 근거가 되었다.
당당한 체구는 사자빈신의 위엄을
두 눈엔 부처님의 내면세계가 투영
항마촉지인 결하고 연화좌에 가부좌
석가여래냐 아미타여래냐 학계서 논란
1909년, 조선의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경주에 온 일본 동경대학의 세끼노 다다시(關野貞) 교수는 석굴암 본존상을 조사하고 석가여래라고 학계에 보고했다.
<사진설명 : 석굴암 석굴 본존상.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일본인 학자들이 본존상을 석가여래로 봤던 것은 본존상이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고, 또한 그 주변에 석존의 10대 제자상들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황수영 박사는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아미타여래설을 주장했는데,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학자들 간에 본존상의 성격과 명호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다.
황수영 박사의 아미타여래설 주장의 내용은 이렇다.
석굴 본존상이 석가여래로 불린 것은 일본 학자들에 의한 것일 뿐, 그 이전까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미타불’이라고 불렀으며, 또 그렇게 신앙해 왔다. 1891년 석굴을 중수할 때 마련된 현판에는 ‘미타굴’이라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석굴암 승방에 걸려있는 편액에는 ‘수광전’이라고 적혀 있다. ‘미타굴’ 또는 ‘수광전’이라 한 것은 모두 이곳 본존상이 아미타불 또는 무량수불, 무량광불이란 사실을 가리켜 주고 있다.
본존상의 양식이 보여주는 우견편단의 법의와 오른손의 항마촉지인 등 두 가지 특색은 석굴암이 창건된 8세기에 신라의 아미타불에서는 가장 널리 보급되고 있던 양식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본존상, 군위 팔공산 삼존석굴의 본존상들은 석굴암 본존상과 똑 같은 수인의 좌상 양식을 갖고 있지만 신라의 아미타불이다.
석굴암이 불국사와 달리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조성된 것이라면,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봉안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이 동향으로 있기 때문에 석굴암 석굴 본존상의 좌향(坐向)은 동향이고, 이 때문에 예불자는 동쪽으로 들어와서 서쪽으로 향해 예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황 박사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본존상을 석가여래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남천우 박사는 석불사(석굴암) 석굴을 조영한 사상적 배경을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찾으면서 본존상이 석가여래임을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굴암 석굴의 본존상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사자빈신삼매(獅子頻迅三昧)의 장면과 흡사하다. 이 경에 따르면, 실라벌국 서다 숲 급고독원에 있는 장엄한 누각에 오백인의 보살과 오백인의 수도자, 그리고 많은 천왕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 십대제자들도 있었고 회중의 우두머리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었다.
<사진설명:석굴암 본존불을 지지하고 있는 팔각원당형 연화대좌.>
보살들은 석가여래의 사자빈신삼매로 인해 석가여래의 청정법을 즐기고 있었으나 십대제자들은 아직은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알기 이전의 성문(聲聞)의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표정이 환희에 차있지 못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모든 회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삼매에 안주케 하고자 두 눈썹 사이에 있는 백호로부터 보조삼세법계문(普照三世法界門)의 광명을 발하여 시방일체세계의 불토를 비춰주게 된다. 석굴암 석굴의 불상배치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설명되어 있는 이런 내용에 따라 회중들을 배치한 것이며, 석굴의 본존상은 사자빈신삼매경에 들어있는 석가여래가 분명하다.
한편, 문명대 교수는 석존이 가비라성에서 부왕과 이모의 해탈을 위해 여래를 관하고 염하여 삼매의 바다에 드는 방법을 서술하고 있는 신인종(神印宗)의 소의경전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이 석굴암 석굴의 기본 설계도라고 주장한다. 이 경전에서 그는 석굴암 조성과 관련지을 수 있는 몇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있는데, 그 내용이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목적이 전세와 현세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문명대 교수 외에 본존상이 석가여래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민영규, 김상현, 성낙주씨 등이 있으나, 소의경전이나 신앙형태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이밖에 석굴암 조성 당시 화엄사상을 주도했던 의상대사 계열 스님들이 석가여래나 비로자나불의 명호를 사용하기보다 오히려 십불(十佛, 시방불)이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했으므로 석굴의 본존상은 우주 어느 곳에나 계시는 시방불, 즉 편만불(遍滿佛)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또한 〈유마경〉의 견아촉불품에 근거하여, 아촉여래가 계시는 묘희(妙喜)라는 세계로부터 이곳에 태어난 유마가 초인적인 신통력으로 대중 앞에 묘희국을 옮겨 놓은 모습을 재현한 것이 바로 석굴암 석굴이므로, 본존상은 석가여래도 비로자나불도 아닌 아촉여래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석가여래이면서도 비로자나불이라는 주장도 나와 있다.
오늘날 학자들이 이처럼 석굴암 석굴의 본존상에 대해 제각기 자기 나름의 명호와 신앙 배경을 주장하고 있지만, 석굴암 석굴 조성당시 신라의 학승들이 오늘날의 학자들처럼 그들의 소의 경전과 사상체계에 따라 본존상을 제각기 석가여래,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등으로 불렀을지 의문이다.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목적이 전세와 현세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의 신라인들에게는 본존상의 명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오늘날의 대다수 불자들이 그렇듯이 신라 백성들은 석굴암 석굴 본존을 그저 부처님으로 신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 균 /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63호/ 9월20일자]
'불교유적과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석굴암석굴 ④ - 보살 · 신중 · 제자상 (0) | 2014.07.31 |
---|---|
경주 석굴암석굴 ③ - 십일면관음보살상 (0) | 2014.07.24 |
경주 석굴암석굴 ① (0) | 2014.07.11 |
분황사석탑 (0) | 2014.07.05 |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 (0) | 2014.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