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교 무색케 하는 투박한 아름다움
사람들은 보통 산수 간의 정자는 선비들이 자연과 벗하면서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사사로운 건축물이기에 기둥이나 대들보 어디가 좀 뒤틀리고 이상하다고 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 건축, 그것도 중심 법당인 대웅전과 같은 건물의 경우는 그런 모습이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인들의 상식이다. 그러나 안성 청룡사 대웅전(보물 제824호) 건물을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축에 관한 상식이 얼마나 본질과 동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서운산에 있는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대사(明本大師)가 창건하여 공민왕 13년(1364) 승려 나옹(懶翁)에 의해 중창된 유서 깊은 사찰로 조선 초기까지도 왕실의 원찰로 있었다. 대웅전의 중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 34년(1601)에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7세기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숙종 46년(1720), 순조 21년(1821), 헌종 15년(1849), 철종 14년(1863)에도 중수되었다.
청룡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짠 구조, 즉 공포(包)가 기둥 위에도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앙서(仰舌), 수서(垂舌) 등에 새긴 연꽃과 연꽃봉오리 장식에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런 건축 장식의 아름다움보다는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기둥과 대들보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웅전 건물을 지을 때 목수는 벌목해 온 원목의 아래 위를 자르고 잔가지를 쳐내는 정도로 대강 다듬어 기둥으로 썼고, 심하게 굽어서 건물 부재로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목재를 대들보 재목으로 사용했다. 건물 앞쪽 네 개의 기둥은 비교적 잘 다듬어져 있으나, 양 옆과 뒤쪽의 기둥들은 산에서 자랄 때 모습 그대로다. 곧기나 굵기가 제 멋대로 인 관계로 기둥 하나만을 보면 건물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건물이 어떻게 부처님을 모시는 금당 건물로 용인(容認)될 수 있었고, 몇 백 년의 긴 세월 동안 허물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으로 신앙의 중심이 되는 권위건축물이다. 이와 같은 건축물은 당연히 최상품의 재목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인의 상식이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불교국가의 금당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치목(治木) 상태와 기둥의 배치 간격, 완벽한 좌우 대칭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권위 건축물인 청룡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떤 사람은 이런 모습을 사원 경제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훌륭한 재목으로 반듯하게 짓고 싶은 욕망은 있었으나 경제사정이 어려워 주변에서 자라는 아무 나무나 베어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경제사정이 좋은 절의 건물들은 모두 곧고 반듯한 재목으로 지어졌어야 옳다. 그러나 호남 제일의 대사찰이자 선종 대가람인 화엄사 같은 데서도 휘거나 굽은 원목 그대로를 기둥으로 삼은 건축물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제루데, 그 기둥은 사찰 건축물의 굽고 휜 기둥이나 대들보가 경제적 측면에서만 설명될 수 없는 또 다른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에는 곧고 굵은 나무들이 많지 않은 가운데 소나무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기는 하나 굽거나 휘게 자라는 속성이 있어 목조 건축물의 기둥이나 대들보 감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그런 소나무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도 대웅전과 같은 권위 건축물을 짓는 일인 만큼 곧게 치목해서 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청룡사 대웅전을 지었던 목수에게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둥이나 대들보의 모양이 제멋대로인 것이 목수의 기술 수준이 낮았거나 목수가 성실성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기술 수준을 말한다면 이 건물을 지은 목수만큼 최고의 기술을 갖춘 사람이 없고, 성실성에 관해서도 이 목수를 따를 자가 없다.
곧기와 굵기가 각양각색인 목재들을 사용하여 집을 짓는 것은 곧기와 굵기가 일정한 목재를 사용해서 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성가시다. 같은 굵기와 길이로 잘 다듬어진 목재로 기둥을 세울 경우에는 자(尺)의 기능을 빌어 그 높이와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굽거나 휘고, 가늘거나 굵고, 아래 위 굵기가 다른 목재를 사용할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무게 중심이 제 각각인 기둥으로 지붕의 하중을 거르게 분산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대들보 역시 휘어진 나무를 사용했다. 이처럼 위쪽으로 휘어진 나무를 사용하면 지붕의 수직 하중이 걸려도 밑으로 처지거나 부러질 염려가 없다. 대웅전 건물이 몇 백 년 풍상을 끄떡없이 견디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절묘한 힘의 분산과 그에 따른 완벽한 균형 때문이다. 이것은 수학적인 계산이나 정밀한 목공 연장이 이루어 낸 것이라기보다 목수들이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해 터득한 ‘마음의 저울’과 ‘마음의 자’가 이루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고려말 나옹화상이 중창한 유서깊은 사찰
굽은 원목 그대로 살린 기둥.대들보 ‘이채’
‘마음 저울과 자’로 지은 무심공법에 찬탄
청룡사 대웅전을 지을 당시에 주변에서 곧고 굵은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웠거나, 멀리서 곧은 목재를 조달해 올 수 있을 만큼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대웅전과 같은 건물이 존재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런 현실적 문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인의 성정(性情)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의식이다.
선천적으로 한국인은 조작과 기교는 부리면 부릴수록 그 대상의 본질이 훼손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심하게 꾸미거나 손질을 가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무를 가공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가능한 한 인공의 흔적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한다. ‘노력’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잠재해 있던 한국적 심성과 미의식이 자연적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조선시대 무가(巫歌) 중에 ‘성주풀이’라는 것이 있다. ‘성주풀이’는 집과 집터를 맡아보는 성주신을 노래하는 것인데,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높은 산에 남글 찍고 낮은 산에 터를 닦아 / 휘여진 남근 굽다듬고, 굽은 남근 휘이게 다듬어 / 횡포(橫?) 대포를 먹여 내여, 아흔 아홉 궁(宮) 지을 적에…” 이 짧은 노래 한 대목에 한국인이 지닌 선천적 대의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용마루, 도리, 기둥 재목은 소나무 씨앗이 싹터 자라서 된 것이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휘거나 굽기도 한다. 그러나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는데 별로 아쉬움이 없다. 휜 나무는 굽다듬고 굽은 나무는 휘이게 다듬어 쓰면 되기 때문이다.
현실로 나타난 결과는 사람의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을 내어 쓰게 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좌우된다. 청룡사 대웅전의 기둥이나 대들보가 비정형인 것은 목수가 올곧게 치목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 안될 것은 이런 건물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집을 지은 목수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뵈러 절을 찾는 수많은 불자들, 그 법당에서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 나아가 이 절을 후원했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법당의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하고자 했으나 미완으로 남기는 것과 당초부터 할 생각이 없어 하지 않은 것은 의미상 큰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인간의 능력과 성실성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성정과 미의식에 관련된 문제다. 청룡사 대웅전 건물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능력이나 성실성을 초월해 있는 한국인의 성정과 미의식이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13호/ 3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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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구례 화엄사 보제루 기둥. |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서운산에 있는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대사(明本大師)가 창건하여 공민왕 13년(1364) 승려 나옹(懶翁)에 의해 중창된 유서 깊은 사찰로 조선 초기까지도 왕실의 원찰로 있었다. 대웅전의 중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 34년(1601)에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7세기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숙종 46년(1720), 순조 21년(1821), 헌종 15년(1849), 철종 14년(1863)에도 중수되었다.
청룡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짠 구조, 즉 공포(包)가 기둥 위에도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앙서(仰舌), 수서(垂舌) 등에 새긴 연꽃과 연꽃봉오리 장식에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런 건축 장식의 아름다움보다는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기둥과 대들보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웅전 건물을 지을 때 목수는 벌목해 온 원목의 아래 위를 자르고 잔가지를 쳐내는 정도로 대강 다듬어 기둥으로 썼고, 심하게 굽어서 건물 부재로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목재를 대들보 재목으로 사용했다. 건물 앞쪽 네 개의 기둥은 비교적 잘 다듬어져 있으나, 양 옆과 뒤쪽의 기둥들은 산에서 자랄 때 모습 그대로다. 곧기나 굵기가 제 멋대로 인 관계로 기둥 하나만을 보면 건물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건물이 어떻게 부처님을 모시는 금당 건물로 용인(容認)될 수 있었고, 몇 백 년의 긴 세월 동안 허물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으로 신앙의 중심이 되는 권위건축물이다. 이와 같은 건축물은 당연히 최상품의 재목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인의 상식이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불교국가의 금당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치목(治木) 상태와 기둥의 배치 간격, 완벽한 좌우 대칭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권위 건축물인 청룡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떤 사람은 이런 모습을 사원 경제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훌륭한 재목으로 반듯하게 짓고 싶은 욕망은 있었으나 경제사정이 어려워 주변에서 자라는 아무 나무나 베어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경제사정이 좋은 절의 건물들은 모두 곧고 반듯한 재목으로 지어졌어야 옳다. 그러나 호남 제일의 대사찰이자 선종 대가람인 화엄사 같은 데서도 휘거나 굽은 원목 그대로를 기둥으로 삼은 건축물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제루데, 그 기둥은 사찰 건축물의 굽고 휜 기둥이나 대들보가 경제적 측면에서만 설명될 수 없는 또 다른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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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안성 청룡사 대웅전 전경. |
곧기와 굵기가 각양각색인 목재들을 사용하여 집을 짓는 것은 곧기와 굵기가 일정한 목재를 사용해서 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성가시다. 같은 굵기와 길이로 잘 다듬어진 목재로 기둥을 세울 경우에는 자(尺)의 기능을 빌어 그 높이와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굽거나 휘고, 가늘거나 굵고, 아래 위 굵기가 다른 목재를 사용할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무게 중심이 제 각각인 기둥으로 지붕의 하중을 거르게 분산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대들보 역시 휘어진 나무를 사용했다. 이처럼 위쪽으로 휘어진 나무를 사용하면 지붕의 수직 하중이 걸려도 밑으로 처지거나 부러질 염려가 없다. 대웅전 건물이 몇 백 년 풍상을 끄떡없이 견디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절묘한 힘의 분산과 그에 따른 완벽한 균형 때문이다. 이것은 수학적인 계산이나 정밀한 목공 연장이 이루어 낸 것이라기보다 목수들이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해 터득한 ‘마음의 저울’과 ‘마음의 자’가 이루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고려말 나옹화상이 중창한 유서깊은 사찰
굽은 원목 그대로 살린 기둥.대들보 ‘이채’
‘마음 저울과 자’로 지은 무심공법에 찬탄
청룡사 대웅전을 지을 당시에 주변에서 곧고 굵은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웠거나, 멀리서 곧은 목재를 조달해 올 수 있을 만큼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대웅전과 같은 건물이 존재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런 현실적 문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인의 성정(性情)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의식이다.
선천적으로 한국인은 조작과 기교는 부리면 부릴수록 그 대상의 본질이 훼손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심하게 꾸미거나 손질을 가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무를 가공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가능한 한 인공의 흔적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한다. ‘노력’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잠재해 있던 한국적 심성과 미의식이 자연적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조선시대 무가(巫歌) 중에 ‘성주풀이’라는 것이 있다. ‘성주풀이’는 집과 집터를 맡아보는 성주신을 노래하는 것인데,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높은 산에 남글 찍고 낮은 산에 터를 닦아 / 휘여진 남근 굽다듬고, 굽은 남근 휘이게 다듬어 / 횡포(橫?) 대포를 먹여 내여, 아흔 아홉 궁(宮) 지을 적에…” 이 짧은 노래 한 대목에 한국인이 지닌 선천적 대의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용마루, 도리, 기둥 재목은 소나무 씨앗이 싹터 자라서 된 것이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휘거나 굽기도 한다. 그러나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는데 별로 아쉬움이 없다. 휜 나무는 굽다듬고 굽은 나무는 휘이게 다듬어 쓰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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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대웅전 좌측 기둥. 비교적 잘 다듬어진 앞쪽 네개의 기둥에 비해 이 기둥은 곧기나 굵기가 제각각이다. 기둥 하나만 집중해서 보면 건물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
하고자 했으나 미완으로 남기는 것과 당초부터 할 생각이 없어 하지 않은 것은 의미상 큰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인간의 능력과 성실성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성정과 미의식에 관련된 문제다. 청룡사 대웅전 건물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능력이나 성실성을 초월해 있는 한국인의 성정과 미의식이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13호/ 3월22일자]